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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는구나. 그 동안 잘 지냈니?”
“저도 좀 바빴어요. 여기 아이스크림 괜찮은 걸요?”
“난 여기나 저기나 다 비슷한 거 같은데. 그나저나 시험 문제 낸다고 일주일 꼬박 고생했더니 일 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 고등학교도 대학처럼 6월 말에 방학하면 좋을 텐데 말야. 하하”
다형이 파스타치오 아몬드를 입에 넣으며 말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은 모두 수업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공부는 아이나 어른이나 힘든 거야. 오죽하면 교무회의에서 오전수업만 한다는 발표가 나면 환호성이 울리겠니?”
“정말이예요?”
“마음 속의 환호성. 서로 얼굴만 봐도 알지. 아이들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걸. 후후”
“하하...머릿 속에 그림이 그려지네요.”
지갑 도난 사건이 해결되고 한 달이 지난 토요일 오후, J는 다형과 ××쇼핑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참. 요즘도 시험 후 선배와의 만남 행사가 있나요?
“기억하는구나. 얼마 전부터 명사와의 만남으로 바뀌었어. 꼭 선배가 아니더라도 명망 있는 지역 인사들을 초빙해 강당에 아이들 모아놓고 강연하는 거지.”
“이번에 누가 오죠?”
“누군가 오겠지. 난 크게 관심 없어.”
다형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J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선생님. 예전엔 안 그러셨던 거 같은데...”
“혹시 강의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니? 그럼 알아보마.”
“그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웃음을 머금고 지그시 다형을 쳐다보던 J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교수, 의사, 법조인,…초청 강사의 범위가 너무 좁아.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도 물론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결국 결론은 비슷하고”
“그래도 아이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너무 부정적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비싼 돈을 엉뚱한 데 들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전 W여고 학생들이 부러운걸요?”
“음...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이번에 오는 강사나 알려주세요. 혹 괜찮으면 들어보게요.”
“하하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W여고 졸업생인데 대학병원 의사래. 신경계통에서 꽤 유명하다는데 교장선생님과 고교 동기라고 하더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체리 초코를 한 입에 넣는 J를 약 오른 표정으로 잠깐 쳐다보다가 다형도 질세라 파스타치오 아몬드를 한 숫갈 입에 넣는다.
“의사는 별로네요. 전 보다시피 건강하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팸플릿 같은 거 나오면 연락주세요. 그건 그렇고 교실은 별 일없나요? 저 번에 지갑 사건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그랬지. 별 다른 일은 없어. 이제 기말시험이라 다른 일이 생기기도 힘들고. 음...별 일은 아니고 조금 묘한 아이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궁금해요. 얘기해 주세요.”
다형은 입에 넣은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J와 눈을 맞춘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열흘 쯤 전 일인데 쉬는 시간에 우리 반 아이 하나가 무슨 일인지 급히 뛰어가다가 복도 벽에 설치된 음수대에 다리를 부딪치는 걸 내가 우연히 봤거든. 아이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곧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섰지.”
“아팠겠다.”
“난 아이의 뒤쪽 복도 끝에 있었지만 다친 것 같아서 급히 일어선 아이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어.”
다형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눈으로 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런데 내가 뒤에서 다가가는 줄 모르고 절뚝거리던 이 녀석이 날 보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뒤에서 넘어지는 걸 선생님이 보셨으니까 쑥스러워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러고는 절뚝거리지도 않고 걸어가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다친 것 같은데 양호실로 가보든 조퇴하고 빨리 병원에 가보든 하는 게 어떠냐고 하니까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며 걱정 마시라는 웃음과 함께 아이는 교실로 멀쩡히 돌아갔어.”
“끝인가요?”
실망한 다형에게 J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 한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후였어. 그러니까 그저께지. 점심시간에 복도에 줄 서 있는 아이들을 지나서 학생 식당에 급식 지도를 하러 가다가 식당 안쪽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보았지”
“......”
“2학년 학생이 식판에 밥을 받아가다가 실수로 1학년 학생의 신발에 국물을 조금 흘린 거야. 그런데 1학년 학생이 2학년에게 항의를 하며 따지기 시작했어.”
“그건 그럴 수 있죠.”
“문제는 그 정도가 심했다는 거야. 실수로 일어난 일이고 2학년이 사과를 하는데도 1학년 학생이 모욕적인 말을 해 댔지.”
“뭐라고 했어요?”
“학년 믿고 까부는 거냐고.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더군.”
“어휴. 그 정도면 그 2학년 학생이 가만있지 않았겠는데요?”
그것보라는 듯이 말없이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J를 보며 다형은 뭔가 생각난 듯 대답한다.
“그러니까 그 2학년 학생이 복도에서 넘어져 다친 그 학생이군요.”
“그래. 우리 반 성지라는 아이야. 화를 낼 줄 알았는데 1학년 학생에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며 자리를 피하더군. 내가 문 쪽에서 보고 있었다는 걸 몰랐나봐.”
“혹시 그 1학년 아이가 일진이라던가 그런 아이였나요?”“아냐. 우리 학교 일진들은 내가 대충 알고 있어.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성지가 싸움을 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다는 느낌이었어.”
“만약 참은 거면 의지가 대단한 학생이네요. 그럼 앞의 복도 사건도 설명되겠군요.”
“......”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성지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성숙한 학생인 거 같아요.”
어느덧 빅 사이즈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장난스럽게 J를 쳐다보는 다형은 J의 표정 속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제 저녁에 야근을 했거든. 수업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8시 조금 넘어서 교무실로 황당한 전화가 한 통 왔어.”
“......”
“1학년 학부모인데 자기 아이가 평소에 8시 정각이 되면 자율학습실에서 휴대폰으로 공부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 날은 휴대폰을 집에 놓고 가서 딴 데로 샜는지 걱정이 되니 전화 받은 나더러 자율학습실까지 가서 확인해 달라는 거야”
“정말 황당하네요. 평소에 사진으로 체크한다는 것도 그렇고. 또 알지도 못하는 선생님에게 확인해달라는 것도 그렇구요.”
“이런 사람들은 확인해줘야만 끝나는 사람들이야.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이름을 듣고 건너편 자기주도학습관 건물 3층으로 갔지. 문제의 학생은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잘 자고 있더군.”
“하여튼 못 말리는 극성 어머니들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하는 거 같아요.”
“건물을 나오는데 건물 뒤쪽 끝 숲길 벤치에 누가 앉아있는 게 살짝 보이는 거야. 이상해서 조금 가까이 가보니 성지였어.”
“설마 거기서 공부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아이가 볼까봐 근처까지 가지는 못했지만......울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달래주려고 다가갔는데 이 녀석이 날 보고 깜짝 놀라 인사하더니 후다닥 자습실로 올라가 버리더라구.”
“......”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소심한 아이. 말없이 생각에 빠진 J를 보고 다형은 짐짓 명랑하게 말한다.
“성지가 조금 소심한 면이 있지만 삶에 절도가 있는 좋은 학생인거 같아요. 말씀하신 일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들이구요.”
다형의 말은 조금은 불편했던 J의 마음에 긍정적 확신을 가져다준다.
“그래.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요즘, 그런 아이는 보기 드물지. 기회를 봐서 칭찬하고 용기를 줘야겠어.”
다형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J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첫 날이 수학 시험이라 학생들은 아침부터 담임인 J에게 질문을 하려고 교실에 줄을 서있다.
‘평소에 좀 질문들 하지. 시험 당일 아침에 이게 뭔 일인지’
똑같은 문제를 세 번째 물어보는 아이를 보낸 후, J는 비어있는 성지의 자리를 발견한다.
“성지야. 왜 복도에서 서서 공부하니. 교실로 들어가렴.”
“교실이 조금 산만해서요. 선생님. 여기서 공부하다가 시험 시작 전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별표와 빨간 줄이 가득한 수학교과서를 들고 사정하는 성지에게 J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한다.
“알았다. 그럼 20분 후에는 들어가도록 해라.”
“예. 선생님”
참을성 강하고 의젓하지만 역시 공부에 목매는 여느 고등학생과 다르지 않은 성지의 모습에 내심 미소를 지으며 J는 8시 30분에 있는 교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2층 교무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주 선생님. 같이 가요.”
뒤 돌아보는 J의 눈에 복도 끝에서 경보하듯이 걸어오는 L이 보인다.
“조금 늦었는데 주선생님과 같이 들어가면 덜 민망하겠죠? 하하”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이선생님.”
L은 방금 지나온 복도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성지가 선생님 반인 모양이네요.”
“성지를 아세요? 선생님은 올 해 우리 반에 수업이 없는....”
순간 J은 L이 작년까지 1학년 담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지가 작년에도 시험 기간에 종종 복도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올해도 그런 모양이네요. 뭐 복도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야 가끔씩 있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선생님. 성지가 1학년 때 어땠나요?”
“그 녀석이야 아주 모범생이죠. 1년 동안 지각, 조퇴,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교실에서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다툰 적도 없었어요. 그런 학생들만 있으면 담임 일이 참 편할 텐데 말예요.”
“2학년 중간고사 성적이 전체 등수가 90등 정돈데 1학년 때 성적은 어땠나요?”
“음...비슷할 거예요. 90~100등 정도? 그래도 정말 열심히 한 녀석이예요. 2학년 때 좀 오르면 좋으련만”
J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L에게 말해준다.
“절제력이 대단한 친구 같아요. 혹시 이와 비슷한 일이 1학년 때도 있었나요?”
L은 너털웃음을 하며 말한다.
“잊고 있었는데 얘길 들으니 생각납니다. 작년 8월 말에 서울에 물폭탄이 떨어진 날이 있었잖아요? 평소 8시 이전에 교실에 들어오는 성지가 그날 8시 20분 거의 다돼서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어요. 출석부 지각 체크 직전에 말이죠. 나중에 우리 반 다른 아이에게 들었는데 승용차에 타고 거북이 속도로 가고 있는데 앞에 정차해 있던 버스 앞문으로 성지가 내리더니 학교로 뛰어 가더랍니다. 폭우로 교통이 안 좋으니까 중간에 내려서 두 정거장을 달려 온 거예요. 여자 애가 대단하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칭찬하고 학생생활기록부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에 기록해줬죠.”
“......”
회의 중 J의 머리 속에는 밤에 건물 뒤에서 훌쩍이다가 담임을 보고 놀라 자습실로 도망가는 한 학생의 모습과 지각하지 않기 위해 길 한복판에 서있는 버스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학교로 뛰어가는 또 다른 학생의 모습이 내내 겹쳐진다.
“주선생님. 회의 중에 생각난 거예요. 이건 좀 다른 일일 수도 있는데...”
회의가 끝나고 교실로 가려고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뒤에서 L이 말을 건다.
“작년 5월에 체육대회를 했잖아요. 성지가 배구 잘하는 거 아시죠?”
“아뇨. 몰랐습니다.”
“체육대회에서 우리 반이 배구 종목 학년 1등 했거든요. 성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죠.”
“음. 배구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배구가 아니라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8월에 2학기 학급회장으로 다수의 아이들이 성지를 추천한 거예요. 그런데 성지가 난색을 표하며 사양을 하지 뭡니까.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못 한다고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 추천한 아이들이 좀 당황했죠.”
“......”
“뭐 이 정도입니다. 학교 규정을 잘 지키고 또 교실에서 티내지 않고 생활한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성적이 좀 오르면 좋으련만...”
“회장을 사양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구요?”“예. 거의 무릎을 꿇고 사정까지 하면서요. 그러니 추천한 아이들이 오히려 미안해했죠.”
비오는 날 아침의 달리기의 사건도 그렇고 회장 사양건도 그렇고 절제력과 규정 지키기의 범주로 설명되기에는 어색한 무엇인가가 있다.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사정이 있다면 입을 다물 것이 분명하므로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대화를 해야 소통의 흐름을 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J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단순히 모범생이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치네요.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버스에서 내려서 비오는 길을 뛰다니...”
시험 후 있을 초청 강사 일정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다가 결국 성지 이야기로 마무리한 J는 은근히 다형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
“거기다 학급 회장을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까지 기를 쓰는 경우는 드물어. 어떻게 생각해?”
“일단 네 가지 사건 속에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을 거 같기는 해요.”
“내 생각도 그래.”
다형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제안을 한다.
“선생님. 제가 W여고에 강의 들으러 가는 3일 후에 만나서 각자 의견을 낸 다음, 한 사람이 퇴근 후에 저녁 사기. 어때요?”
“음. 좀 더 그럴듯한 의견을 낸 사람이 승자다. 이거지? 경찰과 교사의 대결이라...이거 불리한데...”
“그럴까요? 전 성지라는 학생을 본 적도 없는걸요. 어쨌든 약속하신 거예요.”
“그런데 오전에 나올 수 있어?”
“그날 동료와 비번을 바꾸었어요.”
“좋아. 나도 이 문제는 풀어야 할 거 같다. 그날 보자꾸나.”
J는 금쪽같은 휴일까지 써가며 자기 계발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천하는 다형의 적극성에 감탄하며 수화기를 놓는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은 금방 왔다. 명사와의 만남 관계로 1교시 영어 과목만 보기 때문에 곧 있을 여름 방학에 대한 기대로 교실은 아침부터 에너지의 파동이 끊임없이 일고 성지는 오늘도 복도에서 열심히 참고서를 뒤적이고 있다. 조례를 끝내고 걷은 학생들의 휴대폰을 가방을 담아 교무실 자기 자리에 놓은 J는 곧바로 1층의 상담실로 향한다.
“음...의지력이 대단한 학생 같네요. 그런데 좀 불안해 보이기도 하구요.”
“그 동안 상담 맡으신 학생 중에 유사한 케이스가 있나요?”
작년부터 학교 내에 전문상담사가 상주하고 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다. J에게 성지의 일을 들은 H는 차분하게 J를 바라보며 말한다.
“겉으로 행동이 비슷해보여도 실제 원인은 다양해요. 말만 들어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학생의 경우 좀 특이하기는 하네요.”
“불안해 보인다는 것 무슨 뜻인가요? 하선생님”
“학생이 선생님을 보고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고 하셨죠? 절뚝거리다가 멀쩡하게 걷는다든지. 조용히 울다가 급하게 도망친다든지”
“예.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려요.”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쳇말로 오버한다고 할까요?”
“......”
“지금 본 것은 잊어달라는 메시지예요. 자세한 것은 학생을 만나봐야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뭔가가 있는 거 같아. 하지만 가만있는 학생을 상담실로 데려 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감사의 인사를 하며 일어서는 J의 귀에 옆방인 생활지도부에서 누군가가 크게 야단치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 있나봐요?”
“예. 아까 옆방에 잠깐 갔다 왔는데 3학년 학생 하나가 부정행위를 했대요. 커닝페이퍼를 가지고 있다 들켰는데 자기는 만들기만 했지 보지는 않았다고 버티는 것 같아요.”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군요.”
“그래서 일단 학부모 소환하고 조서를 작성해야하는데 기가 막힌 건 어머니도 학생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이의 철없는 잘못과 어른의 사심에 찬 잘못은 차원이 다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상담실을 나와 마침 울리는 시험 종료 종소리를 들으며 J는 휴대폰 가방을 들고 교실로 향한다.
“영어 답 부를께. 1번에 ④, 2번에 ①, …”
“잠깐 잠깐, 좀 천천히 불러줘.”
눈을 번득이며 학급 회장이 불러주는 답에 맞춰 채점을 하고 있는 다수의 아이들,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는 아이들, 엎드려 자는 아이들 속에서 휴대폰 가방을 정리하던 J는 찾아가지 않고 남아있는 휴대폰 하나와 4분단 중간 성지의 빈자리를 동시에 발견한다.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회장의 정답 부르기가 끝나면 들어올 요량인데 수학, 영어 등 단위수가 큰 과목 정답을 부를 때 주로 일어나는 일이다. 소심한 녀석이라고 혀를 차며 무심코 성지의 휴대폰을 쳐다보는 J의 눈에 액정 위에 예쁘게 쓰여진 글씨가 보인다. “예쓰 아이 캔!”
종례를 마치고 강당에 학생들을 보낸 후 J는 고민에 빠지지만 곧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다형의 의견에 기대를 가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학생을 도와줄 수 있다면야 누가 생각해내건 무슨 상관인가. 편안한 마음을 안고 빌린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 쪽으로 걸어가던 J의 눈에 생활지도부 문을 열고 나오는 학생과 학부모가 보인다. 학부모 인상이 쌀쌀맞지만 기가 많이 죽은 표정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보호자인 부모가 소환되는 건 당연한 거지’
교문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틀던 바로 그 순간, J의 머리 속에 며칠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 성지의 네 가지 행동들을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번개처럼 떠오른다. J는 책을 반납하자마자 L에게 전화를 건다.
“선생님 말씀을 들을 걸 그랬어요. 이건 순 자기자랑에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
“학생들 반응은 어땠어?”
“좀 듣다가 나와 버려서 잘 모르겠어요. 고2때까지 반에서 중간이었다가 고3때 열심히 해서 의대에 갔다고 하니 용기를 얻은 아이도 있겠죠 뭐. 전 도서관 뒤쪽 오솔길 산책이 더 좋았지만요.”
“너도나도 의대에 가겠다고 불꽃을 튀기는데 거기다 기름을 붓는구나.”
일정이 모두 끝나 조용한 학교의 도서관 옆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정다운 대화를 아니 저녁 식사가 걸린 승부를 시작한다.
“그나저나 선생님. 성지 학생 일 생각해 보셨어요?”
기다렸다는 듯 J는 미소를 지으며 다형을 쳐다본다.
“음. 내 나름대로 추리를 해봤는데 일단 얘기해 볼 테니 들어봐.”
“당근이죠.”
“네 가지 행동, 즉 다쳐도 조퇴 안하기, 시비가 붙어도 안 싸우기, 지각하지 않기, 학급회장 안하기 속에 숨어있는 공통분모를 찾자는 거잖아.”
“그렇죠.”
“일단 모범적 학교생활이라면 네 번째가 해당 사항이 없고 강한 참을성에는 세 번째, 네 번째가 관련성이 약해.”
“......”
“그런데 오늘 3학년 학생 하나가 부정행위로 생활지도부로 잡혀와 그 어머니가 학교로 소환되는 걸 우연히 보고 힌트를 얻었지.”
다형은 앞으로 전개될 논리를 예상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J를 쳐다본다.
“다형아. 학생이 다쳐서 조퇴하면, 싸우면, 지각하면, 회장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이 가게 되죠.”
“바로 그거야. 담임이 학부모에게 연락을 하게 되지. 조퇴했다고, 지각했다고, 회장이 되었으니 학부모 총회에 참석하라고, 싸워서 조서를 써야 되니 학교로 나와 달라고,”
“요컨대 성지는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못하게 하려고 한 거구요.”
“음. 그게 내가 생각한 공통분모야. 그래서 내 가설을 확인하려고 성지의 1학년 때 담임에게 연락해 물어봤어.”
“뭐라고 하던가요?”
“조용히 자기할 일 열심히 하는 착한 학생이라 굳이 전화할 일이 없었다고 하더군.”
“성지의 의도대로 됐군요.”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이유겠지?”
“저도 거기서 막혔어요.”
“음. 그렇다면 거기가 우리의 승부처가 되겠군.”
“선생님. 은근히 승부 근성 있으시네요.”
놀리는 듯 J를 쳐다보던 다형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혹시 성지 부모님이...”
“아냐. 생활기록부 상으로 두 분 다 멀쩡해. 아버지는 해군 장성이고 어머니는 대학 교수야.”
“아버지와 떨어져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혹시 어머님이 아프다거나 뭔가 신상에 곤란한 문제가 생긴 것 아닐까?”
“......”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먼저 물어보는 정공법도 가능한 방법일 수 있지”
다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건 아닐 거 같아요. 선생님. 어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지각하지 않으려 빗속을 뛰어가는 학생이 있을까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요.”
“음 그것도 그렇군.”
“학생이 연결을 막는 것은 집 쪽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학생 본인 쪽에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성지 학교 생활에서 달리 특이한 사항은 없나요?”
“음. 시험 스트레스가 좀 크다는 것 말고는 달리 없어.”
“어느 정돈데요?”
“아침에 집중에 안 된다고 복도에서 공부하는 것, 답 부를 때 긴장돼서 복도에 나가있다는 것 정도야.”
“성적은 좋아요?”
“중상위권이라 말할 수 있는데 애매한 등수지. 열심히 하는 거에 비해서 성적이 제자리야.”
“......”
“이제 주관식 채점하러 들어가 봐야겠다. 이따가 보자구.”
“예 선생님. 나중에 뵈어요.”
학생들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써놓은 주관식 답을 채점하다가 혈압이 올라 성지 생각도 잊은 채, 뜨거워진 머리를 흔들며 남교사휴게실로 가는 J의 뒤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여어. 주선생님. 오랜만예요.”
올 초에 3층에 있는 고3 교무실로 올라간 C가 호탕하게 인사를 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조선생님 오랜만이네요. 고3 담임하느라 고생 많으시죠? 내년 2월까지 가슴 졸이며 가야되니까 건강 잘 챙기셔야 됩니다.”
“건강이고 뭐고 고작 4개월 지났는데 수명이 몇 년은 단축된 거 같습니다.”
“추천서 때문이죠? 일단 7월만 지나가면 큰 고비는 넘기는 거예요.”
C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성적이 안 되는데도 지원하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니 대학 입시가 로또도 아니고...”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잘 달래보세요”
“쉽지 않아요. 엄마까지 와서 졸라대니...나 참.”
“고3에 있는 동안은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힘내세요. 조선생님.”
“말이라도 고마워요. 다 끝나고 소주 한잔 하자구요.”
“하하 좋죠.”
C와 헤어지고 남교사 휴게실 문을 여는 J의 머리 속에 고3 담임 시절, 말도 안 되는 상향 지원을 해놓고 합격자 발표가 나면 세상 떠나가듯이 울던 몇 몇 녀석들의 기억이 스쳐간다.
‘원서라는 게 희한해. 일단 써서 지원을 해놓으면 똑같이 지원자로 불리니 말야. 그러니 자연스레 기대 심리가 생기는 거지.’
학생과 학부모들 설득하고 싸우던 옛 기억에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나 휴게실을 박차고 나온 J는 교무실로 돌아와 수첩을 펴며 수화기를 든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관식 선생님. 백성지 어미되는 사람입니다.”
“바쁘실 텐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당연히 뵈어야죠. 그런데 우리 성지가 무슨 말썽을 일으킨 건 아니겠지요. 선생님? 아시겠지만 법 없이도 살 아이랍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성지어머님. 혹시 성지가 평소에 집에서 학습 부담을 많이 느끼나요?”
“호호호.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나 성지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항상 챙겨주고 격려하고 또 동기 부여를 해주는 쪽이죠. 그러다 보니 성적도 꾸준히 오른 것 같구요.”
“......”
“성지 꿈이 의사랍니다. 중학교 때부터 꿈이었죠. 집에 관련 원서들도 꽤 사두었어요. 휴일에 틈틈이 보고 있죠. 영어 공부도 되고 일석이조니까요. 아이 아버지 친구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거든요. 클리닉에 가서 실제 치료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그래요. 아 참 요즘은 유투브에 수술 동영상이 가끔 올라와 있어서 성지에게 보내주곤 하죠. 아이가 좋아해요.”
“......”
“아이가 힘들어 할 때면 무리하지 말고 잠깐 쉬라고 말해요. 그리고 격려해주죠. 넌 할 수 있다고. 엄만 널 믿는다고 말입니다.”
“아이 방에 개인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나요 성지어머님?”
“예 있어요. 하지만 절제력이 있는 아이라서 컴퓨터는 방해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성지가 의사 말고 다른 꿈을 이야기한 적은 없나요?”
“그건 아주 어릴 때죠. 초등학교 이후로는 의사입니다. 선생님, 전화상으로도 말씀드렸지만 이 성적대로 쭉 가면 의대 가능하겠죠?”
대답 대신 J는 말없이 에이포지 한 장을 내민다. 받아들고 유심히 살피던 여교수의 눈에 놀라움과 당혹감이 서린다.
“언어 4등급, 수학 3등급, 영어 2등급, 화학 4등급,...이게 뭐죠. 선생님?”
“성지의 중간고사 성적표입니다. 성지가 지난 5월에 부모님께 갖다 준 성적표는 가짜예요.”
“예?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아니예요. 그럴 리 없어요.”
“아마 자기 방에 있는 컴퓨터와 프린터를 썼을 겁니다.”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여교수 앞으로 J는 봉투 하나를 더 내민다.
“성지 1학년 때 성적표 네 장입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성적과 다를 거예요.”
“이럴 수가...세상에 이럴 수가...”
“......”
“공부하라는 그 흔한 잔소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안타깝지만 그게 이유일 가능성이 큽니다.”
“선생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군요.”
“자신을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끊임없이 격려해주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성적표 조작으로 나타난 겁니다.”
“격려와 동기 부여가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지어머님, 성지가 배구를 잘하는 걸 아세요?”
“......”
“있는 그대로의 성지를 보셔야 됩니다. 어머님이 원하는 성지 말고요. 어머님이 성지에게 한 것은 격려와 동기부여라기보다는...... 넌 할 수 있으니까 해야한다는 긍정의 폭력입니다.”
“긍정의...폭력이요?”
“그 성적표 때문에 성지는 넘어져서 다리가 찢어져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퇴를 할 수가 없었고 지각 안 하려고 비오는 날 버스에서 내려서 뛰어야 했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1학년 학생이 욕을 하고 덤비는 데도 웃음으로 넘겨야했고 심지어 친구들이 추대하는데도 회장을 포기해야 했죠.”
“다리가 찢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선생님, 알아듣게 말씀해 주세요.”
“진짜 왜곡되어 가고 있는 건 성적표가 아니라 성지의 내면이라는 이야깁니다.”
“......”
“조작한 성적을 진짜 자기 성적으로 믿는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어요. 열심히 노력하면 곧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요.”
“......”
“이대로 고3이 되면 성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
한 참을 조용히 울먹이던 여교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J를 바라보고 말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선생님?”
J는 따뜻한 눈으로 성지 어머니를 바라본다.
“성지 방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어요.”
약속대로 다형과 만난 J는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메뉴지만 힘들었던 대화 후인지라 허겁지겁 피자를 먹고 있다.
“성적에 대한 학생의 지나친 스트레스, 그리고 부모님과 담임의 인위적 차단,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지점에서 성적표 조작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결론 중 하나지. 난 엉뚱하게도 엉터리 추천서 덕분에 생각해냈지만 말야.”
“성지가 걱정 되요. 잘 해결되겠죠?”
“좀 전에 성지어머님과 함께 학교의 상담선생님을 만나고 왔는데 이제부터 도와주기로 하셨어. 성지와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가 노력해야지. 성지 본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자존감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성적표 조작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유사한 케이스들이 꽤 있을 텐데 걱정이에요.”
“주변에 온통 성공 신화야. 그러니 어른이고 아이고 정신이 병들 수밖에. 난 명사와의 만남 할 시간에 한강에서 같이 어울리며 바람 쐬는 게 학생들 정신 건강에 더 좋다고 생각해”
“그 의견에 한 표! 그나저나 긍정의 폭력이라니. 처음 듣는 용어예요. 어디 나오는 말인가요?”
“음......”
“선생님. 설마...”
“말이야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래? 피자나 먹자.”
“하여튼 선생님 순발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하하하”
그렇게 밤은 어두워간다.
-끝
첫댓글 헛 요즘 중간고사 대비 기간인데 소설같지 않네요. ㅠ 예전에 정말 성적조작하던 학생이 떠오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죠.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주선생이 J고 이선생이 L이라는 게 분명한데,, 왜 J, L 이런 식으로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마치 딴 사람 같아요.ㅠ...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거 같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27 15:5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27 16:05
학교 얘기를 자주 올리시는것 같아 선생님이실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더군요
여고수학선생님 이시죠?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추리해보세요~
1. 계간미스터리 2015 봄호를 보았다. 또는 2. 찍었다. 중 1에 걸겠습니다.
역시 정확하시네요 2015년 봄호였습니다. 어디서 본 이름이라 뒤져보니 맞더군요 안경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비타민 댓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미싱링크미스터리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괜찮은 작품이네요. 긍정폭력이란 것을 배웠네요. 추천!
재미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피가 튀지 않는 소설임에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처음 몇 문장만 보았습니다만... 당선작과 이어지는것 같네요^^ 당선작 재미있게 여러번 읽었습니다~^^ 필사도 하고 있구요...ㅎㅎㅎ 오늘은 아쉽지만 다음에 기대하고 읽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죽 읽히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학교 내의 일상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뽑아내셨네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