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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이이- |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
[ 현대어 풀이 ] |
[1] 고산 아홉 굽이의 경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 띠풀을 베고 집터를 마련하여 살아 가니 벗님들이 모두 오신다. / 아! 무이산(주희의 <무이구곡담>의 배경이 되는 산)을 상 상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배우리라.
[2] 일곡은 어디인가? 바위 머리 위에 해가 비치는구나 / 잡초가 우거진 들판에 안개 가 걷히니 원근의 풍경이 그림이로다. / 소나무 숲 사이로 술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오 는 모습을 바라보노라.
[3] 이곡은 어디인가? 화암(꽃바위)에 봄이 저물었도다. / 푸른 물결 위에 꽃을 띄워 들판으로 보내노라. / 사람들이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모르니 알게 하면 어떻겠는가?
[4] 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인 듯 펼쳐져 있는 절벽에 나뭇잎들이 우거져 있다. / 푸른 물 위로 산새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며 노래를 부를 때에, / 키가 작고 가로로 퍼 진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니 여름 풍경이 따로 없구나.
[5] 네 번째 계곡은 어디인가? 소나무가 선 절벽 너머로 해가 지는구나. / 물 위에 비 친 바위 그림자는 온갖 빛으로 잠기었도다. / 숲속의 샘이 깊을수록 좋으니 흥을 이기 지 못하겠노라.
[6] 오곡은 어디인가?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절벽이 보기가 좋구나. / 물가에 지어 놓 은 정사가 맑고 깨끗한 것이 그지없다. / 이러한 배경에서 학문을 연구하려니와 시를 읊으며 풍류도 즐기리라.
[7] 육곡은 어디인가?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에 물이 넓게 많이 고여 있다. / 나와 물고기 중 누가 더욱 즐기고 있는가? / 황혼녘에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노라.
[8] 칠곡은 어디인가? 단풍이 물든 바위에 가을 빛이 깨끗하구나. / 맑은 서리가 엷게 드리우니 절벽(단풍에 덮인 바위)이 마치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 시원한 바위에 혼자 앉아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 잊었노라.
[9] 팔곡은 어디인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듯 물소리가 흥겹게 들리는 여울목에 달이 밝다. / 훌륭한 거문고로 몇 곡을 연주하며 노니 / 운치 있는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 니 혼자서 즐거워 하노라.
[10] 구곡은 어디인가? 기암괴석이 뒤섞여 아롱지게 아름다운 곳에 한해가 저물었도 다. /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 유인(즐기며 떠도는 사 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 창작 배경 ] |
율곡 이이가 43세때(선조 11년) 해주 석담(石潭)에서 은거하면서 고산구곡을 경영하여 은병정사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을 때, 주자(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를 모방해서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17세기에 와서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주자주의 지 식인들에게 계승되어 한역되기도 하고, '고산구곡'이라는 자연을 소재로 한 많은 한시 가 창작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 작품이 당대는 물론 17세기의 조선 문단에서 지식인 의 시 창작의 전범으로 중요시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 이해와 감상 ] |
이 작품은 자연을 벗하며 주자학을 연찬(硏鑽)하겠다는 학구적 열의가 강하게 나타난 노래다. 표현에 있어서는 묘사 혹은 수사가 배제되고 감정 표현이 절제되어 있기 때문 에, 비서정적이거나 무기교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이 작품은 화자의 충만한 정감과 정신적 높이를 객관적 서술과 무기교의 담담함 속에 은밀히 응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서사 :고산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줄 사람들이 모르고 즐기지 않더니, 이제 작자 가 정사를 짓고 집터를 마련하니까 많은 제자들이 학문에 뜻을 두고 모여든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주자학을 공부하겠다는 작자의 결의가 종장에서 직설적으로 나타 나고 있다.
[2]관암 : 관암이라는 바위 근처에 아침 해가 솟아 오르면서 뿌연 안개가 걷히는 들판 과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 먼 산의 경치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낳고 있다. 이 모든 풍 경을 감상하며 작자는 맛좋은 술을 준비해 놓고 자신과 함께 풍류를 나눌 친구들을 기 다리고 있다.
[3]화암 : 화암의 늦봄 경치를 노래했다. 저물어가는 봄 속에 피어난 꽃밭과 그 아름 다움이 느껴진다. 중장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연상케하는 구 절로, 계곡의 절경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가 나타난다.
[4]취병 : 소나무 가지에 맑은 바람이 부는 취병의 여름같지 않은 시원한 정경을 노래 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작자의 섬세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5]송애 : 맑은 물 위에 비친 해질녘의 산 그림자를 노래하고 있다. 중장은 노을이 진 하늘빛을 배경으로 절벽에 선 소나무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맑은 물을 물들이고 있 다는 표현이다. 자연 정경에 대한 풍부한 시각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6]은병 : 산이 깊어 으슥한 모양의 바위들이 병풍을 드리운 것처럼 계곡을 이루었고, 그 아래 물가에 서 있는 정자 하나는 한적함을 만들어준다. 여기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 자들을 가르치고 시와 풍류를 즐기리라는 작자의 유학자다운 면모가 나타나 있다.
[7]조협 : 맑은 물이 고인 계곡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며 자연의 경치를 읊은 부분이 다. 깨끗한 물에서 물고기와 함께 장난을 하는 작자의 모습에서 '물아일체'와 '물심일 여'의 경지를 느끼게 해 준다.
[8]풍암 : 높은 산의 가을 정취를 감상하며 읊은 노래로, 중장에서는 특색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이 한층 고조되어있다.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서 계곡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는 작자의 경이감을 느낄 수 있다.
[9]금탄 : 아름다운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 물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며 홀로 즐 거워하는 풍류가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부분 이다.
[10]문산 :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겨울에 아름다운 기암괴석들이 비록 눈 속에 파묻 혀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볼 것 없다고 하는 세인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
[ 정리 ] |
◆ 성격 : 연시조(10수), 평시조. 교훈적이고 도학적이고 유교적인 시조
◆ 주제 : 강학(講學)의 즐거움과 고산의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
[1] : 고산구곡가를 짓게 된 동기
[2] : 관암(갓바위)에서의 아침 풍경
[3] : 화암에서의 늦봄 아침의 절경
[4] : 취병의 여름 풍경에 대한 감탄
[5] : 송애에서의 황혼녘의 절경
[6] : 맑은 수변정사에서의 영월음풍
[7] : 조협에서의 풍류
[8] : 풍암의 가을 경치에 대한 감탄
[9] : 금탄에서의 아름다운 물소리
[10] : 문산의 눈덮인 경치
◆ 연대 : 선조 10년(1577년), 지은이 42세때
◆ 표현
① 고 산의 아홉 구비 골짜기(구곡)에 맞게 이홉 수의 시조를 배치하고 맨 처음에 이
시조를 지은 동기를 제시하고 있어 모두 열 개의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임.
② 각 수에 제재 역할을 하는 장소와 자연 경치를 제시하여 실제 지형과 맞추고 있으
며, 묘사된 자연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음.
③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여 자연 경치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학문 수양의 즐거움도
나타내고 있음.
◆ 문학사적 의의 : 이이가 42세에 고산의 구곡 중 오곡에 은거하며 집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느낀 감상을 표현한 작품. 모두 열 개의 시조로 이루어진 연시조로, 주자의 < 무이도가>를 본떠 써 내려갔다는 것을 서사에 암시하고 있음. 자여에 대한 예찬과 더 불어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중의적으로 표현함.
◆ 작품의 정신적 경지 <고산구곡가>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은 조화(調和)와 자족(自足)의 경지에 이바지하 고 있다. 고통과 불화와 절망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은이는 즐거운 정감을 교감할 수 있는 매개물들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유인(遊人) 은 오지 않이하고 볼 것 업다 하더라.'에서조차 책망의 태도라기보다 포용하려는 태도 가 함축되어 있어, 그것은 한마디로 달인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경지는 '도산십이곡'과 그 지향점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관념적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도산십이곡'에 비하여, '고산구곡가'는 함축성과 형상성이 뛰어난 언어 예술로서 의 가치면에서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
또 다른 해설
고산구곡가 http://www.seelotus.com/frame_g.htm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니(그때야) 벗님네 (모두) 찾아오는구나.
아, 주자가 읊은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일곡은 어디인가? 갓머리처럼 우뚝 솟은 바위(관암)에 아침해가 비쳤도다.
잡초 무성한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먼 곳 가까운 곳 가릴 것 없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숲속에 맛좋은 술이 담긴 술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
이곡은 어디인가? 화암의 늦봄 경치로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노라.
사람들이 경치 좋은 이곳을 모르니, (꽃을 띄워 보내) 알게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인 취병에 녹음이 짙어졌도다.
푸른 숲 속에서 산새들은 높이락 낮추락 노래를 부르는 때에
키가 작고 가로퍼진 소나무가 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니 여름같지 않게 시원스럽기 그지없구나.
사곡은 어디인가? 소나무가 선 물가의 낭떠러지인 송애에 해가 진다.
깊은 물 한가운데에 비친 바위 그림자는 온갖 빛과 함께 잠겨있구나.
숲속의 샘물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오곡은 어디인가 으슥한 절벽같은 은병이 보기도 좋구나.
물가에 지어놓은 정사는 맑고 깨끗하기가 더할 나위 없구나.
이 중에서 글도 가르치고 연구하려니와 시를 짓고 읊으면서 풍류도 즐기리라.
육곡은 어디인가?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에 물이 많이 고여 있구나.
나와 고기와 어느 쪽이 더 즐기는가?
해가 저물거든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리라.
칠곡은 어디인가?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구나.
맑은 서리가 엷게 내리니 단풍에 둘러싸인 바위가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집(속세)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도다.
팔곡은 어디인가? 악기를 연주하며 흐르는 시냇가에 달이 밝구나.
좋은 거문고로 몇 곡조를 연주했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 듣고 즐기노라.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인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혀 버렸구나.
놀러 다니는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요점 정리
작자 : 이이((李珥)
연대 : 선조 10년(1577), 지은이 42세 때
종류 : 총 10수의 평시조로 된 연시조
성격 : 교훈적, 유교적, 자연예찬적
구성 :
서사 |
주자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결의 |
서사 |
창작 동기 |
1곡 |
관암의 아침 경치 |
하루와 사계절의 전반부 |
아침, 저녁, 봄, 여름 |
2곡 |
화암의 늦은 봄의 경치 | ||
3곡 |
취병의 여름 경치 | ||
4곡 |
송애의 황혼녘의 경치 | ||
5곡 |
수변정사에서의 강학과 영월음풍의 즐거움 | ||
6곡 |
조협의 야경 |
대칭축 |
시간성이 나타나지 않음 |
7곡 |
단풍으로 덮인 풍암에서의 자연 도취 |
하루와 사계절의 후반부 |
황혼, 달밤, 가을, 겨울 |
8곡 |
물소리 흥겨운 여울목 | ||
9곡 |
문산의 아름다움과 세속의 경박함에 대한 나무람 |
제재 : 석담(石潭) 수양산(首陽山)의 풍광(風光)으로 高山九曲潭(고산구곡담), 冠巖(관암), 花巖(화
암), 翠屛(취병), 松崖(송애), 隱屛(은병), 釣峽(조협), 楓巖(풍암), 琴灘(금탄), 文山(문산)
내용 : 고산(高山)의 아홉 굽이 경치를 읊은 것으로, 서시(序詩)에 이어 관암(冠巖), 화암(花巖), 취
병(翠屛), 송암(松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風巖), 금탄(琴灘), 문산(文山)의 구곡을 노래하
였는데, 그것은 지명이자 그에 대한 경관도 아울러 나타내어 중의적(重義的)인 수법이 되게 하였
다.
주제 : 강학(講學)의 즐거움과 고산(高山)의 아름다운 경치 예찬, 학문의 즐거움과 자연의 아름다
움 예찬
의의 :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가 지은 작품으로 쌍벽을 이룬다.
기타 : 주자(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떠 창조적으로 수용해서 우리나라의 시형식인
시조의 형태로 만들었다.
의의 :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가 지은 작품으로 쌍벽을 이룬다.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서사)
고산의 아홉 굽이 도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니 벗님네 (모두) 찾아오는구나.
아,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제재 : 고산구곡담(高山九曲潭).
핵심어 : 학주자(學朱子).
주제 : 고산구곡가를 짓게 된 동기(學朱子) - 학문 수양에 대한 다짐
해설 : "고산구곡가"의 서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자연을 벗하며 주자학을 연찬(硏鑽)하겠다는 학
구적 열의가 강하게 나타난 노래이다. 초장 고산구곡담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말은 중의적 표현이
기도 하다. 즉 학문의 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고산구곡가에 나오는 지명들은 아름다운 경
치나 혹은 학문의 길, 양쪽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산(高山)에 있는 석담(石潭)의 승경을
노래하고자 한 고산구곡가는, 그 서시에서는 성리학의 대가로서의 학문 수양이 그 첫째의 의지임
을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벗님네는 풍류객으로서의 찾아오는 벗들이 아니라,
학문에 뜻을 품고 모여드는 후학(後學)들을 이르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한, '武夷(무
이)를 想像(상상)?고'는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떴
음을 의미한다.
고산 : 황해도 해주에 있는 산의 이름
구곡담 : 아홉 번을 굽이 도는 계곡으로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무이산에 있는 구곡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구곡가'를 본받아, 고산의 구곡담을 가려낸 것.
몰으든이 : 모르더니
주모복거 : 풀을 베어내고 집지어 살 곳을 정함, 터를 닦아 집을 지음.
어즙어 : 아!, 감탄사
무이 :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주자가 여기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았음.
학주자 : 주자학을 배움
(제1곡)
첫 번째로 경치가 좋은 계곡은 어디인가? 관암에 해가 비친다.
잡초가 우거진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원근의 경치가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사이에 술통을 놓고 벗이 찾아온 것처럼 바라보노라.
제재 : 관암(冠巖).
핵심어 : 글림이로다.
주제 : 관암(冠巖)의 아름다운 아침 경치
해설 : 관암(冠巖)의 늦봄 경치를 묘사하고 이를 즐기는 심회를 읊었다. 관암의 아침 해가 솟은 후
의 절경, 계절은 봄이라 산골짜기를 휘감았던 안개마저 걷힌 원근(遠近)의 경치는 아름다운 한 폭
의 산수도를 펼쳐 놓은 듯하리라. 이 중에 찾아오는 후학을 맞이하는 지은이의 풍류스러운 운치는
'송간(松間)의 녹준(綠樽)'이리라.
일곡 : 첫 번 째 굽이
어드매고 : 어디인가? 어드매(대명사)+고(의문조사)
관암 : 바위 봉우리의 이름. 갓바위. 갓같이 우뚝 솟은 데서 붙인 이름
평무 : 잡초가 무성한 벌판
글림이로다 : 그림과 같이 아름답도다. 도다>로다는 ㄷ의 유음화
녹준 : 좋은 술동이
(제2곡)
두 번째로 경치가 좋은 계곡은 어디인가, 꽃핀 바위에 봄이 늦었구나
푸른 물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 밖으로 보내노라
사람들이 이 경치 좋은 곳을 모르니, 알게 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제재 : 화암(花巖).
핵심어 : 알게 한들 엇더리.
주제 : 화암(花巖)의 늦봄 경치를 알리고 싶은 마음
해설 : 화암(花巖)의 늦봄 승경(勝景)을 묘사하고 이를 혼자 즐기기에 아까워 널리 알리고 싶은 심
정을 읊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게 하는 노래이다.
꽃으로 수놓은 듯 바위를 감싸고 있는 늦봄의 경치, 계곡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 산석 유수(山石流
水)의 절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아름다운 곳을 어찌 나 혼자만의 것으로 즐기기만 할 것인
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찾아오게 하면 어떠리.
화암 : 바위 이름. 꽃바위
춘만커다 : 봄이 저물었도다.
벽파 : 푸른 물결
승지 : 명승지의 준말.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 학문하는 즐거운 곳
(제3곡)
세 번째로 경치가 좋은 계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 같은 절벽에 녹음이 짙게 퍼졌다
푸른 나무 사이로 봄새는 아래 위에서 지저귀는데
키 작고 가로로 퍼진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니 여름 풍경이 아니구나
제재 : 취병(翠屛).
핵심어 : 여름 景이 업세라.
주제 : 취병(翠屛)의 시원한 여름 경치
해설 : 소나무 가지에 맑은 바람이 부는 취병(翠屛)의 여름 같지 않은 시원한 정경을 읊었다. 맑은
물에 산새의 지저귐은 그대로 한정(閑情)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녹음은 짙어가며 솔바람은 마음까
지 씻어 내릴 듯하니, 그 무더운 여름철이건만 이 곳만은 여름의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선경이다.
취병 : 푸른 빛 병풍같이 나무와 풀로 덮인 절벽
퍼졋다 : 우거졌다
녹수 : 맑은 시냇물
하상기음 : 소리를 낮추었다 높였다 함
반송 : 키가 작고 가지가 가로로(옆으로) 퍼진 소나무
녀름 경 : 여름 기분. 여름의 흥
(제4곡)
네 번째로 경치가 좋은 계곡은 어디인가, 소나무 절벽 위로 해가 넘어가는 구나
깊은 물 가운데의 바위 그림자에는 온갖 빛이 잠겨 있구나
세상을 벗어난 선비가 숨어 사는 곳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겨워 하노라.
제재 : 송애(松崖).
핵심어 : 흥을 겨워.
주제 : 송애(松崖)의 저물 무렵 못에 비친 아름다운 음영(陰影)
해설 : 맑은 물에 산 그림자가 잠기는 송애(松崖)의 저녁 경치를 읊었다. 해 저물 무렵 못에 비친 암
영(暗影)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깊은 숲 속에 흐르는 샘물은 바로 명경지수(明鏡止水)이리라.
이를 보며 지은이는 '인자 요산 지자 요수(仁者樂山 知者樂山)'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송애 : 소나무가 선 물가의 낭떠러지
넘거다 : 넘었다. '거다'는 현재 완료 서술형
담심암영 : 못처럼 물이 고인 가운데 비친 바위 그림자
임천 : 숲속의 샘
깁도록 : 깊을 수록
(제5곡)
다섯 번째로 경치 좋은 계곡은 어디인가, 굽이 지고 눈에 띄지 않는 병 같은 절벽이 보기도 좋구나
물가에 세워진 배우고 가르침을 위한 집은 맑고 깨끗하기 한이 없구나.
여기서 글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시도 지어 읊으면서 흥겹게 지내리라.
제재 : 은병(隱屛).
핵심어 : 강학(講學), 영월 음풍(詠月吟風).
주제 : 수변정사(水邊精舍)에서의 강학(講學)과 영월음풍(詠月吟風)
해설 : 물가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講學)하는 풍류 어린 정경을 읊었다. 지은이가 거처하고 있
는 물가의 정사(精舍)의 주변과 생활이 나타나고 있다. 물소리만이 들리는 정사(精舍)의 분위기는
유학자로서의 학구적 열의를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시심(詩心)에 겨워 시를 읊조리는 풍류의 멋도
함께 할 것이다.
은병 : 으슥한 병풍처럼 되어 있는 낭떠러지(절벽)
죠희(좋의) : 좋도다
수변정사 : 물가에 세워진 정사. 정사의 본디 뜻은 불교 절이었으나, 도사가 거처하는 곳, 학문을
닦는 곳 등의 뜻으로 쓰였다.
소쇄 : 맑고 깨끗함. 속세를 떠난 듯함
강학 :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함
영월음풍 : 자연을 시로 읊은 시를 짓고 읊으며 즐겁게 노는 것
(제6곡)
여섯 번째로 경치가 좋은 계곡이 어디인가, 낚시질하기 좋은 좁은 골짜기에는 물이 많이 고여 있
다.
이 골짜기에 나와서 고기와 내가 누가 더욱 즐길 수 있으랴.
해가 저물거든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가리라.
제재 : 조협(釣峽).
핵심어 : 대월귀(帶月歸).
주제 : 조협(釣峽)의 야경(夜景)과 낚시와 대월귀
해설 : 조협(釣峽)에서의 낚시질을 그리되, 고기와 더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모습이 드러났
다. 풍류객으로서의 낚시질은 처음부터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고기잡이가 아니라, 강심(江心)을 바
라보며 그 속의 고기들과 즐기는 가운데 청한(淸閑)을 낚고 사색(思索)을 낚는 것이다. 종장의 '대
월귀(帶月歸)를 하노라'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시조에서 보인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와 같은 심경을 읊은 것이라 하겠다.
조협 :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
넙다 : 넓다. 넙다> 넓다에 ㄹ첨가
뉘야 : 누가
즑인는고 : 즐기는고 - 자연에서의 흥겨움이 드러남
대월귀 : 달을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감. 즉,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옴.
(7곡)
칠곡은 어디인가?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구나.
맑은 서리가 엷게 내리니 단풍에 둘러싸인 바위가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집(속세)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도다.
제재 : 풍암(楓巖)
핵심어 : 혼자 앉아 집을 잊고 있노라
주제 : 풍암에서의 자연 도취로 집을 망각
해설 :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 빠져 무아(無我)지경에 빠져 있다. 그 무아지경은 집안 혹은 속세의
일조차 잊게 하는 황홀경( 惚境) 그 자체이다. 단풍 우거진 가을산을 바라보는 시인은 인간사를
망각하고 있다. 경치가 그 정도면 선계(仙界)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풍암 :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
청상 : 맑은 서리
금수 : 수놓은 비단 - 절벽의 아름다움
한암 : 차가운 바위
집을 닛고 잇노라 : 속세의 일을 잊고 지냄
(8곡)
팔곡은 어디인가? 악기를 연주하며 흐르는 시냇가에 달이 밝구나.
좋은 거문고로 몇 곡조를 연주했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 듣고 즐기노라.
제재 : 달, 옥진금휘
핵심어 : 혼자 듣고 즐기노라.
주제 : 자연의 소리에 빠져 즐기고 있음
해설 :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위적인 소리가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이다. 그
자연의 소리를 옛사람들의 거문고로 알고 그러기에 이런 깊은 음악을 아는 이 없어서 혼자서 자연
의 소리에 도취되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금탄 : 악기를 연주하며 노는 시냇가
옥진금휘 : 아주 좋은 거문고
수삼곡 : 여러 곡조
고조 : 옛곡조
알이 : 알 사람이
즑여 : 즐겨
(9곡)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인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혀 버렸구나.
놀러 다니는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제재 : 세모
핵심어 : 문산에 세모커다
주제 : 아름다움을 모르는 세인에 대한 안타까움
해설 : '고산구곡가'의 열 번째의 수로 기암 괴석이 뒤섞인 흰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이
경치를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묘미를 깨닫지 못하는
세인을 안타까워한다. 초장의 문산은 중의적 표현으로 지명일 수도 있고, 또는 학문의 세계를 의미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장 '奇巖怪石(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어라.'는 중의적 표현으로
문산의 아름다운 자연이 눈 속에 묻혀,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암괴석은
문산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동시에 학문 세계의 깊고, 오묘한 즐거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여
기서 유인은 학문에 힘쓰지 않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사람을 말하며, 학문의 깊고 오묘함을 모르
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세모커다 : 한 해가 저물도다.
기암괴석 : 아름다운 경치,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괴상하게 생긴 돌.
유인 : 놀러다니는 사람. 세상 사람
이해와 감상
1연은 고산구곡가의 서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주자학을 연찬하겠다는 학구적 열의를 노래한 것이다. 고산에 있는 석담 구곡을 사람들이 몰랐는데, 내가 풀을 베고 집터를 닦아 정사를 지어 놓으니 그제야 많 제자들이 모여든다. 옛날 주자가 무이산에서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았듯이 나도 여기서 주자의 학문을 배우겠다는 것이다. 중장의 '벗님네 다 오신다'의 '벗님네'는 학문에 뜻을 두고 모여둔 '후학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무이를 상상하고'는 무이산에서 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한다는 것으로 이 작품이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본떠 지은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주자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결의
2연은 고산구곡가의 둘 째 수로 관암의 아침 경치를 묘사하고 이를 즐기는 심회를 노래한 것이다. 관암에 아침 해가 돋고 아침 안개가 걷히니 온 들판에 울굿불굿 피어난 꽃동산이 한눈에 들어와 원근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정경을 이룬다(원근이 그림이로다). 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맛있는 술을 마련하고 벗이 오기를 기다리는 지은이의 풍류와 운치가 잘 나타나 있다.
- 관암의 아침 경치
3연은 '고산구곡가'의 셋째 수로 화암의 늦봄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고, 이 아름다운 승지를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을 노래한 부분이다. 화암의 늦봄은 온갖 꽃이 만발하고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 그야말로 선경과 같은 절경을 이룬다.
이 아름다운 곳을 어찌 나 혼자서만 즐길 수 있겠는가? 벽파에 꽃을 띄워 야외에 보내어서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는 내용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 화암의 늦봄의 아름다운 경치
4연은 '고산구곡가'의 넷째 수로 소나무 가지에 맑은 바람이 부는 취병의 시원한 정경을 읊은 부분이다. 푸른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에 녹음이 우거졌다, 우거진 녹음 속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물 소리를 들으며 여름을 시원하게 보낸다는 것이다. '반송이 수청풍한이 녀름 경이 업세'라는 여름도 여름 같지 않은 시원한 선경임을 자랑한 것이다.
- 반송에 맑은 바람이 부는 절벽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여름을 보내는 한가로운 정경
5연은 '고산구곡가'의 다섯째 수로 맑은 물에 산 그림자가 잠기는 송애의 저녁 경치를 읊었다. '담심암영은 온갖 빗치 잠겻셰라'의 '온갖 빛'은 무엇일까? 우거진 푸른 소나무, 만산을 수놓은 단풍, 첩첩이 겹쳐진 바위, 넘어가는 저녁 햇빛, 푸르른 하늘···'이런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어 어려있는 모습일 것이다. 임천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자연에 묻혀 사는 은사의 흥취를 노래하고 있다.
- 소나무가 늘어선 낭떠러지의 저녁 풍경을 묘사
6연은 '고산구곡가'의 여섯째 수로 작자가 거처하는 석담정사의 주변과 거기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바위가 병풍같이 늘어선 은병의 아름다운 경치를 뒤로 하고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조촐한 모옥인 석담정사-여기서 강학도하고 영월음풍도 하는 유학자다운 풍류 생활의 운치를 읊은 것이다.
- 물가에서 정사를 짓고 학문을 가르치면서 음풍영월하는 생활을 그림
7연은 '고산구곡가'의 일곱째 수로 도협에서 낚시질을 하며 유유자적으로 하는 생활의 운치를 읊은 것이다. 조협깊은 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유유히 강심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모습은 고기 잡는 어옹의 모습이 아니라 고기와 더불어 장난치며 즐기는 물심일여의 무심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작자는 '나와 고기와 뉘야 더욱 즑이는고'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황혼에 달빛을 받으며 정사로 돌아오는 종장에서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유유자적하는 풍모가 한 폭의 그림자처럼 그려졌다.
- 저녁에 낚시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면서 돌아오는 유유자적한 모습
8연은 '고산구곡가'의 여덟 번 째 수로 가을빛이 무르익은 풍암의 경치와 찬 바위에 혼자 앉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자연에 몰입하는 생활을 보여준다.
-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자연에 몰입하는 생활을 보여준다.
9연은 '고산구곡가'의 아홉 번째 수로 가야금 소리 같은 물소리로 흐르는 계곡의 달밤을 노래하고 있다. 썩 좋은 거문고로 타는 노래와 같이 극 곡조를 듣고 있으면 옛 노래를 듣고 있는 듯하다는 작자의 풍류와 운치가 잘 나타나 있다.
- 금탄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맞추어 노래 부르며 혼자 즐기는 멋을 자랑
10연은 '고산구곡가'의 열 번째의 수로 기암 괴석이 뒤섞인 흰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이 경치를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묘미를 깨닫지 못하는 세인을 안타까워 한다.
- 아름다운 경치의 묘미를 깨닫지 못하는 세인들을 안타까워함
심화 자료
이이 (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 배경〕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임신년(1572)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흔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 서경덕(徐敬德)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달은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하여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서경덕·이황·이이의 이기론적 차이〕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樞紐)요 근저(根沙)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특히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소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二)이면서 일(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通)하고 기는 국(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이는 승(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이성리설의 현실적 의미〕
이이는 이른바 의(義)와 이(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 時務七條策〉에서 “도(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이며, 사(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利)와 해(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權)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義)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是)와 이(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 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합의(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어서, 시(是)와 이(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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