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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젖은 슬픔의 거름을 본다
송유미 시집 『점자편지』의 시 세계
정훈
송유미의 시를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 아마 ‘슬픔’이 아닐까. 시인은 슬픔이 잣는 물컹한 정서에 오랫동안 젖어 있는 듯 보인다. 시가 세계를 관찰하면서 생긴 감정의 실타래를 언어로 뽑는 예술이라면, 송유미 만큼 끝이 없을 정도로 슬픔의 결을 뽑아내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슬픔은 시인의 실존을 가득 채운 물질이요 웅덩이다. 그는 슬픔이 자아내는 모든 공간에 서 있었던 듯 주저앉거나 흘러가는 존재다. 아니면 슬픔이 시인을 사로잡아 버려 마침내 슬픔이 인도하는 길목마다 비병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는, 오랫동안 곰삭아 진득해진 세계의 표면을 한참 맴돌다 백지를 새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정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펼치는 우울한 연극을 과연 언제까지 보여줄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그 슬픔의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마치 회랑 이곳 저곳을 매만지며 궁금해하는 눈동자처럼 진지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슬픔은 아직 시인을 완전히 적시지는 않은 것이다.
슬픔의 세계, 이 축축한 시공간에서 시를 쓰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송유미는 시를 쓴다기보다 오히려 시를 ‘살아내는’ 시인이다. 이 말은 시인과 시가 나란히 병렬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인과 시가 한 몸이 된 형국이란 뜻이다. 그만큼 시인에게 시는 바로 생활이며, 삶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시는 시인을 일찍이 사로잡아 버렸다. 그런데 시인은 시에 사로잡힌 몸이지만 거기서 벗어날 마음이 전혀 없다. 차라리 시에 목이 조를지언정 세계가 던지는 일상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가 목숨인 시인, 시인은 현실에서든 과거의 기억에서든, 아니면 아직 다가오지 못한 세계의 비의에서건 시가 묻고 던지는 그물에 언제라도 사로잡힐 의향이 있다. 존재나 세계는 시인을 향해 끊임없이 시를 만들어내는 공장이요 원천이다. 시인은 마치 쉽게 던지는 말투처럼 시를 짓곤 한다. 그 어투에는 슬픔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물기어린 메마름이 있다. 그러니까 메마름을 쥐어짜면 슬픔이 가득 머금은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시집 『점자편지』(싪천문학사, 2023)에는 그런 메마른 세계 속에서도 슬픔을 만들어내면서, 그 슬픔의 진원에 자리 잡은 비극적인 표정이 드러난다. 시인은 손으로 그 얼굴을 쓰다듬는다. 가만히 쓰다듬는 얼굴, 한없이 맑고 평온한 얼굴에서 주름지고 굴곡진 생의 한 면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늘 그림자처럼 이끌고 다니는 세계일 것이다. 행복이나 만족 뒤편에 그늘진 세계, 이 세계를 시인은 끄집어낸다. 마땅히 시의 언어로 재창조될 것이 틀림없을 그 세계를 들여다보자.
돼지 곱창처럼 꼬인 회랑 끝에 매달린
새 둥지 같이, 숲속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방
수없이 열쇠를 잃어버려도 좋은 방
나는 오래도록 이런 잠만 자는 방을 원했다
마법에 걸린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세대 가구… 하나같이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출근해서, 생쥐 가족들이 달세도 주지 않고
살아도 아무도 쫓아내지 않는 방,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기래끽반飢來喫飯
수래합인睡來合眼의 백설 공주가 연탄불을 갈아 주던 방,
나는 오래도록 잠만 자는 방을 꿈꾸었다
「잠만 자는 房이 있습니까」 부분
“나는 오래도록 이런 잠만 자는 방을 원했다”는 한 문장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역사가 들어있을까. ‘이런’에 포함된 내용 속에는 “새 둥지 같이, 숲속처럼 조용하고 어두”우며, “수없이 열쇠를 잃어버려도 좋”은 방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시에서 표현하지 못한 수사가 더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방, 몇날 며칠을 잠만 자도 깨우는 이 없는 방, 수런거리는 길목마다 가끔 우유팩이나 비닐이 바람에 쫓겨 구석진 곳에서 바르르 떠는 광경이 창 너머로 보이는 방, 한 아이가 힘없이 걸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발길에서 풍기는 스산한 공기가 방문을 통해 스며드는 방, 종일 비가 내려도 아무도 우산을 내밀지 않는 방들일 것이다. 잠만 자는 방에는 온갖 버려진 것들이 숨 쉬는 입술들이 깔려 있다. 시인은 그 입술들에서 나오는 한탄과 비애의 역사를 보듬는다. 하지만 더러 시인도 지쳤으므로, 낮게 웅성거리는 것들과 한 몸이 되어 나란히 눕고만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방으로 가득 몰려오는 것들의 심사와 눈동자에 어린 슬픔의 무늬를 보자. “하나같이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출근”하는 모습에서 생의 결락이나 그늘을 발견할 수 있다. 비단 ‘없는 사람’의 일상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저들을, 아니 우리들을 가두면서 활짝 밀어내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존재의미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물음은 시적 소재와 형상화를 통해서만 얼비치게 되는 희미한 의문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시적인 장치를 통해 감각되는 이미지와 의미에 시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잠만 자는 房이 있습니까」는 감각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다시 존재를 향한 슬픈 눈길을 보내는 시적 메시지라 할 것이다.
아고 아고 너그 막내 삼촌 너무 가엽고 불쌍타
식솔들을 밥 먹여 살리려고 그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달려가서 남들처럼 돈도 못 벌고
월남 꽃 여자랑 결혼식도 못 올리고
총각 귀신 되어서도 아지 ㄱ집에 못 오노 아고 아고…
흐르는 강은 같은 강에 천만 번 같은 달을 띄우지만
꽃들은 생존을 위해 부단히 흘러갈 뿐이다
배가 너무 커서 머리는 따라갈 수 없는
생각만 거미줄 풀어, 나비를 짜고 다시 푼다
「거미줄 풀어 나비를 짜다」 부분
한탄과 울음이 뒤섞인 생명의 강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만 거미줄 풀어, 나비를 짜고 다시” 푸는 일일 것이다. 「거미줄 풀어 나비를 짜다」는 언뜻 시상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사실과 체험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은 화자의 심정을 어떤 방식으로 헤아릴 수 잇을까. ‘시간이 흐른다’는 말로써 삶의 진실 하나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 는 말조차 무색하게 생명의 강은 줄기차게 흐른다. 생명은 시간을 갉아먹고, 또한 시간은 존재와 생명의 심장을 갉아먹는다. 시간과 생명이 주고받는 길항의 무늬는 반짝이기고 하고 틀어져서 어긋난 물결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알 수 없는 존재다. 한 사람의 삶이 일반의 내용과 형식에서 벗어나 지독한 덫에 걸렸을 때 나오는 울음을 보자. 삼촌의 일생을 떠올리며 한탄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이나 존재의 극심한 결락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슬픔의 이면에는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의 영역이 자리 잡는다. 궁리를 거듭해도 자꾸만 미끄러져 가는 존재의 형식, 그 종잡을 수 없는 세계의 뜻이 내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한 없는 슬픔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묻고 싶어 한다. 지난 생명이 지금 이곳의 생명에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해독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하지만 묘연해지기만 하는 존재의 양식은 또 다시 시간이 끌고 온 배에 타 강물 위에 띄우기 마련이다.
송유미는 인간과 생명의 형식에서 빠져나오는 물기어린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는 시간이 남기는 풍경을 잊지 않고 염두에 두었다가 시로써 표현하는 데 능숙한 시인이다. 시간은 존재의 표면을 낡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진실한 세계마저 거두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그리움의 저편으로 노을처럼 사그라들 때 시인은 그 잔영이 남기는 이미지와 메아리를 기록한다. 아니, 가슴에 심어둔다. 그리움은 슬픔이기도 하다. 다시 붙들어맬 수 없기에 그렇다.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그리운 세계나 대상에 대한 갈망이다. 불가능한 여행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리운 세계가 남긴 흔적을 더듬으려 한다. 고향과 지나가버린 존재에 대한 향수는 시로써 오롯이 남는다.
오래된 그리움 한 모금 동전과 교환하자
내 심장에서 군용열차기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아, 생각나, 그 풍년 빵집 옆 역전 다방
모나리자 얼굴마담은 농약 마시고 죽은
사촌누이를 참 닮았었지
온종일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처럼
양철 챙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찻잔 씻는 물소리가
넝쿨처럼 푸른 물탱크까지 기어 올라갔지
그 숲속 둥지 같은 2층에서 내려다보면
나는 이방인 거리에 버려진 트렁크 같았지
먼바다 수평선이 짙은 아이라인을 그리는 오후 무렵이면
다투어 손님 찾는 다이얼식 전화벨 소리
마른 냇갈의 물고기처럼 파닥거렸지
밑 빠진 독같이 모두 떠나고
역전 다방 불빛만 남아 쓸쓸할 때
푸시시 형광등 나간 수족관 속으로 들어가서
새우잠 청하던 얼굴마담은 우리 누이가
죽었을 때처럼 그렇게 조용했지
정말 나는 착한 외눈박이 물고기 눈으로
모나리자 누이, 참 많이 울렸지
- 「역전 다방」
“오래된 그리움 한 모금 동전과 교환하자/ 내 심장에서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따”는 구절로 시작하는 「역전 다방」은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역전 다방의 얼굴마담과 사촌누이를 비교해서 그리움의 농도와 밀도를 증폭시킨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각별하고 특별해서, 어떤 계기가 찾아오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리고는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그림들이 재구성되어 선명하게 조립된다. 이미지의 힘이다. 기억 속에서 대상은 이미지화해서 현재 화자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리고는 그리움이라는 세계 속으로 수렴되고, 그 그리움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념들이 존재에 대한 성찰로 닿게 만든다. 위 시 다방의 풍경은 그 시절을 보냈던 이들에게는 낯익은 그림들로 남아 있다. 한 시대의 문화는 사람들의 습관과 행동, 그리고 표정이나 말투까지도 규정하는 듯하다. 시대나 역사나 정치적인 색채를 삭제하면 지난 모든 풍경들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함께 숨 쉬며 살아갔던 이웃들은 지금은 단지 기억 속에만 놓여 있는 정물처럼 가만히 붙박여 있다. 우리는 이들을 호출할 수 없다. 다만 상상이나 상념을 통해서 불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안타깝고 쓸쓸하다.
감당하기 벅착 오줌 싼 이불 같은 나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넘기는 노인의 손은 의족이다
두 손이 자유로운 나는 입맛에 맞는 일이 통 없고
폐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희망찬 아침은 손닿는 곳마다 있다
가끔 나는 노인 뒤에 숨어서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결국 노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인이 되어도 노인인 줄 모를 것이다
「노인이 되어도 나는 노인인 줄 모를 것이다」 부분
「노인이 되어도 나는 노인인 줄 모를 것이다」의 한 대목이다. ‘노인’이라 명명되는 낱말에는 무수한 의미들이 들어 있다. 단지 늙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기호는 아닐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을 청년들보다 많이 거친 사람이나 늙어서 죽을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은 사람만을 가리키지도 않는 의미를 배태하는 말이 노인이다. 비록 한자어이긴 하지만 ‘늙은이’라는 우리 말이 자아내는 어감과도 다르다. “기다리는 것이/ 결국 노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인이 되어도 노인인 줄 모를 것이다”란 구절을 보자. 기다림이 시간을 불러오고, 그 시간은 육체적인 늙음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그러니 기다림과 육체적인 늙음은 상통한다. 시인은 기다림이 결국 늙는 일이라는 사실임을 뼈저리게 통탄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늙음이 기다림이나 그리움의 필연적인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시인이 말한 진실의 한 자락이 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이나 육체적인 늙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고 고귀한 인간의 태도다. 기다림은 시간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인간의 미덕이요 덕목이다. 모든 그리운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화석에서 차차 날아올라 자신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리운 것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자신에게 몰려오는 그림을 상상한다. 이는 환영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환영이나 환상일 수만은 없다. 시인이 지금 이곳에서 생각하는 것들이다. 노인의 완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진행형이긴 하지만 언제나 늘 현재를 지나고 있으며, 그 현재 또한 그리움의 날개 저편에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의 수원(水原)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점자편지』는 시각장애인들을 비롯하여 그늘진 세계 속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도요 찬가다. 쉽게 말해 이 세계 속에서 슬픔을 가득 안고 지나는 모든 것들에게 바치는 연가다. 그들은 시인이 그렁그렁하게 응시하는 눈매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지극한 사랑의 눈길이 이들에게 닿아 있다. 단지 그리움이라는 말 한마디로는 추스를 수 없는 감정과 마음이 시편 곳곳에 남아 있다. 한 슬픔이 지나가면 또 다른 슬픔이 다가온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움을 낳게 한다. 그리움은 슬픔이 되어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슬픔의 거름이다. 슬픔이 슬픔을 먹고 흘러가면 추억 속에서 흘러간 슬픔의 풍경들이 찍혀있음을 보게 된다. 시인은 이를 기록한다. “불보다 뜨거운 머릿속에는 왜 이리 많은 내가 있는지요 내 생각을 빠져나온 내가 비 오는 양철 지붕 위에 올라 비를 부릅니다”(「목울대가 까맣게 타버린 詩의 꽃」)처럼, 그리움의 방울들이 손짓하는 세계 속으로 수많은 자아들이 사방팔방 마음과 육신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이들과 함께 노닌다. 시인은 존재들이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송유미의 시편은 그런 반응과 표현이 여러 갈래, 여러 형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달려가고 싶지만 결코 달려가서 안을 수 없는 세계를 시인은 호출한다. 불러내어 가만히 매만지면서 젖어 오는 슬픔의 수액들에는, 줄을 지어 슬픔을 건넸던 이들의 손이 영상처럼 찍혀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채 언어로 나타냈다.
*문학평론가.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과 시집 『새들반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