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클릭! (문예바다 2026. 봄호)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나병춘 (시인)
난은 하늘에 사는 새였거니
해오라비 갈매기 방울새 제비였거니
어쩌다 지상으로 추락했는가
하늘을 날다 지쳤는가
지상이 그리 그리웠는가
어찌 땅으로 내려왔는가
나무에 내려앉기도 하고
바위에 걸치기도 하고
땅으로 떨어지기도 했느니
날개는 꽃이 되고
발은 뿌리가 되고
몸은 잎이 되었느니
새들이 하늘에 쓴 시
땅에 내려
꽃이 되었다
난꽃은 새들이 쓴 시가 아닌가
새들이 추는 푸른 춤이 아닌가
새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난蘭의 기원」,전문
한평생 난초를 사랑한 시인은 새들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라 상상을 하고 새들이 추는 춤과 새들의 노래에 온 정성을 쏟는다. “새들이 하늘에 쓴 시/땅에 내려/꽃이 되었다” 언젠가 시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안마당에 있는 화초며 나무들과 더불어 서재에서 풍기고 있는 난초 향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득 전축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도 몰래 숲속인 듯 빠져들었다. 시인의 시 속에는, 시시때때로 새소리 난초 향기가 은은히 풍기곤 한다. 그의 서재 당호는 세란헌洗蘭軒이다. ‘난을 씻는 집’!
“난꽃은 새들이 쓴 시가 아닌가/새들이 추는 푸른 춤이 아닌가/새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얼마나 난이나 새들을 아끼고 사랑하였으면 세란헌! 이런 당호를 지었겠는가. 詩도 삶도 난과 산새를 닮아 그런지 고요하고 담담한 중도 중용의 멋과 향기가 은연중에 풍긴다. 내 고향 장성 산골까지 춘란을 찾아 헤매었다는 선생님의 옛 추억담을 듣다 보면 청년 시절의 홍해리 시인, 형형한 눈빛이 금세 떠오른다. 또 다른 ‘꽃’이란 시 한 편을 살펴보자.
좋아한다 눈짓 한번 준 적 없는데
나 혼자 반해서 난리를 치다니
사랑한다 한마디 말도 없는데
나 혼자만 미쳐서 안달하다니
가까이서 보라고?
멀리서 바라보라고?
적당한 거리를 두라고?
한겨울 밤이 깊어 막막해지면
이제 별꽃이나 따자, 이별꽃
마음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할까, 아니네!
-「꽃」, 전문
이 짧은 시 속에도 수많은 비밀이 들어있다. 한 번, 한 마디, 혼자만, 한겨울, 이별꽃 등 ‘한’이라는 말, 혼자라는 말, 이별이라는 말... ‘하나’는 아무래도 쓸쓸, 고독이 뭉텅뭉텅 쏟아지는 말이다. 한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한가. 홀로 외로이 견디는 노시인에겐 한이 서린 단어들이다. 하나는 하나로서 완벽이면서 또 다른 하나를 그리워하는 한에 먹힌 말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미쳐서 안달하댜니”, 홀로 넋두리하듯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그러다 가까이 멀리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상대를 가늠해 보다가, 그냥 막막한 밤하늘 별꽃을 바라다보며 종국에는 “이제는 별꽃이나 따자”며 ‘이별꽃’이라 명명하는 짝사랑이라니. 늘 시를 찾아 헤매는 삶의 허탈함을 ‘꿈속에서 쓴 시’로 고백하기도 한다.
언뜻 생각이 떠올라
끼적여 놓았다
잠시 후
또 한 줄을 썼다
또 한 생각이 나
또 썼다
그럴듯한 시가 되었다
잠 깨어 머리맡 백지를 보니
쓴 위에 또 쓰고
그 위에 또 쓴
누구도 읽을 수 없는
한 줄뿐
-「꿈속에서 쓴 시」, 전문
우리네 인생을 한 편의 시에 녹여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일장춘몽’이라는 말, 한바탕 꿈을 꾸면서 온갖 욕망의 ‘탐진치貪瞋痴’에 꼼짝달싹 못하는 장삼이사의 삶이 똑 이 시와 닮아있는지 모르겠다. 욕망에 욕망을 더한 바벨탑의 삶, 오늘날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AI 첨단 기기 또한 디지털 정보사회의 축복이자 저주가 될지도 모른다. 몇 줄 질문을 던지면 전문가들 못지않게 답을 금세 구해내는 그 신통방통한 재주, 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놀라운 일인가. “쓴 위에 또 쓰고/그 위에 또 쓴/누구도 읽을 수 없는/한 줄뿐” 그렇다. 만해 선사의 ‘알 수 없어요’처럼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항구를 찾아가는, 누구도 읽을 수 없고 해독할 수도 없는 그 아이러니. 우리네 인생은 한낱 꿈속의 한 줄 낙서인지도 모를레라.
세상은, 얘야
천야만야 낭떠러지란다
그냥
뛰어내리거라
그래야 산다 난다
저 하늘이 땅이 되어
네 발 아래 펼쳐지고
네가 걷고 달릴 수 있으려니
얘야
허공에 집 한 채 징거매거라
-「허공 한 채」, 전문
백척간두 진일보! 이것은 진실한 도道나 깨달음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새들의 서사이기도 하다. 아직도 아이들 어릴 적 안 잊히는 추억 하나, 제비꽃 필 무렵이면 으레 우리집 처마 아래는 강남갔던 제비들 찾아들어 둥지를 틀곤 하였다. 새끼 대여섯 마리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어미가 새끼들 하나하나 한나절 만에 이소를 시키곤 하였다. 제일 실한 녀석이 과감히 날아서 처마 밑 전깃줄에 가까스로 내려앉는다. 그다음에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맨 마지막 꼬맹이는 발,발,발, 떨면서 차마 날아오르지 못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에미의 초조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참 후에야 드디어 날갯짓, 마침내 다섯이서 지지골 지지골 지껄이며 엄니 오길 마냥 기다린다. 엄니가 나타나 먹이를 주고 또 주고, 이번엔 하나 하나 사랑채에서 바깥마당 전깃줄로 힘차게 날아간다. 햐, 고녀석들의 스릴 넘치는 용기에 숨죽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았다. 이소한 다음 날에는 단 한 마리도 제비 둥지를 얼씬거리는 걸 보지 못하였다. 그 상큼한 이별의 모습, 아직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허공 한 채’, 세란헌은 은은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암자를 떠올리게 한다. 처마 끝에 풍경만 달아놓으면 여지없이 깊은 산사의 적막이 느껴지리라. 오랫동안 묵묵히 우이동을 지키며 북한산의 정기를 오롯이 지켜나가는 선비의 길, 때로는 외롭고 고독하고 험난한 시인의 길이지만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늘 무심한 듯 무색 무취의 샘물을 닮은, 웅숭깊은 시인의 별빛 언어들, “눈썹 끝/네 그림자/꿈에 어리어//잠 깨어/잡으려니/날이 밝았네”(「그리움」, 전문)을 만나게 되리라. 달콤 쌉스레한 맛처럼? 문득 그리운 그 지난날의 추억들...
세상에 가장 단 것은 죄의 맛이다
죄 짓는 재미
얼마나 달면
날이 날마다
신문 방송마다 그리 요란할까
모자 눌러 쓰고 고개 푹 숙인
뻔뻔한 얼굴들이 줄을 잇는다
-「단맛」, 부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은 ‘죄의 맛’이 아닐까? 시인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따금 뉴스를 볼 때마다 줄을 잇고 나오는 수많은 주인공들, 온갖 호사를 누리며 출세하던 이들이 낯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모자 눌러 쓰고 고개 푹 숙인” 저런 짠한 모습들일까. 지독한 죄의 맛에 빠지면 뭇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부끄럽지 않는가 보다. 사바 세상을 풍자하는 멋들어진 시 한 편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단칠정이나 예의염치를 기본으로 하는 동양정신이 점차 증발해버리는 듯한 요즘 세태이다. AI 첨단정보화 시대가 될수록 어쩌면 전통적인 아날로그의 동양정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테어도어 아도르노’는 예술의 힘을 ‘쓸모없음’에서 비롯된 저항이라 보았다. 예술은 인간을 위로하기 보다 불편하게 만들고, 안심시키기 보다 잠들어 있던 양심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장자의 무위無爲 사상에서도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은연중에 깨우쳐주지 않던가.
나무와 숲이 우거진 오솔길 걷다 보면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평화로운 메시지들이 절로 다가오곤 한다. 숲속 어디선가에서 새소리 바람 소리와 더불어 은은히 울려퍼지는 봄꽃들의 그윽한 속삭임, 노루꽃 생강나무꽃 피는 새봄이 오면 소풍길에 이러한 ‘스스로 그러함’의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빠져보는 것도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데 좋은 방책이 되리라. ‘억지로의 삶’에서 ‘저절로의 삶’으로의 전환, 요번 봄날에는 자신에게 다짐하여도 좋으리라.
아직
쓰여지지 않았으므로
언제
쓰여질지도 모르므로
누구도
쓰지 못할 것이므로
끝끝내
쓰여지지 않을 것이므로
-「가장 좋은 시는 없다」, 전문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란 말이 있다. 시를 읽다 보면 그림처럼 자연스레 다가오는 시가 있다. 좋은 그림을 보다 보면 저절로 빨려들어 그곳에서 아름다운 시구를 연상하게 된다. 좋은 시란 무엇일까? 시인은 단 한 편의 시를 찾아서 기나긴 밤을 새우며 지하막장에서 다이아몬드를 캐는 광부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시는 어쩌면 척박한 밭에 뿌려진 아주 귀한 언어의 씨알임이 분명해 보인다. 척박하고 메마른 이 땅에도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자 하는 시인 예술가들의 간절한 바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마당이 있는 시 그늘이 있는 시 웃는 시
설레는 시 즐거운 시 눈물 나는 시
달빛이 비치는 시 별이 빛나는 시
바람소리 들리는 시 꽃이 있는 시
새가 노래하는 시 물이 흐르는 시
하늘이 보이는 시 어둠이 있는 시
향기가 있는 시 맛이 있는 시
아픔과 여운이 있는 시 깊이가 있는 시
(중략)
-「시는 누가 쓰는가」 부분
가장 ‘좋은 시’에 대한 응답인지도 모른다. 새 봄날에는 나도 자연과 닮은, 설레고 즐겁고 눈물 나는 달빛이 비치고 별이 빛나는, 바람소리 꽃이 있고 새가 노래하는 시,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우이동의 세란헌에도 시방 맑은 향기의 춘란들이 어린왕자의 눈빛처럼 말똥말똥 눈뜨고 있으리라. 촉 끝에서 피어오르는 난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빙그레 미소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난잎을 씻고/내 마음을 닦노니”(‘세란헌.2’, 부분), 오로지 ‘좋은 詩’와의 씨름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는 겸허한 시인, 홍해리는 가장 ‘좋은 시’ 한 편을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채 마지막 순간에서야 ‘가릉빈가’ 묘음조妙音鳥처럼 한바탕 울고 갈지도 모른다.
피어나면서
지는
찰나의 꽃
한 생이
짧아서
아름답다.
-「불꽃」, 전문
-끝-
첫댓글 재미없는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下正 시인님!
고맙습니다!
멋진 시편들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엊그제 봄비가 촉촉이 내리더니 온 산야가 연둣빛으로 물드는 요즘입니다.
제 몸도 마음도 연두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요즘입니다.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 하정 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