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344~412)
쿠차 왕국[6] 출신의 승려. 생몰연대는 344년~413년[7]
생전에 30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불경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발자취를 남겼다. 4대 역경가[8]의 한 사람으로써, 현장이 천축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갖고 와서 번역한 불경이 퍼진 뒤에도 쿠마라지바의 불경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며[9] 오늘날까지 한역불경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음이 반 이상이었다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싶으면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야말로 현대의 전문 번역가 못지 않은 수고를 들인 셈.[14]
쿠마라지바는 죽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를 화장하고 나서 보니 그의 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15]
쿠마라지바, 현장 번역이 있는데, 오늘 현장의 번역이 중국입장에서 했으니 벌써 260년 후에 나온 것이니 더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훨씬 쿠마라지바가 아름다운 번역이에요. 현장은 훨씬 인도식 스타일이에요. 인도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에요. (현장의 번역 : 직역 스타일 쿠마라지바의 번역 : 의역 스타일) 직역이고 음사도 너무 심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의 흐름을 봐도, 현장의 번역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 쿠마라지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해당 강의록 전문이 뒷부분의 깨알 같은 역사 왜곡 및 자기 번역서 홍보
또한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이 중요한 점은 그의 불경 번역으로 불교계의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격의불교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중국, 한국 등에서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16]와 습합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17] 이러한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남긴 사람이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18]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십성의 한 사람인 혜공이 쿠마라지바의 제자였던 후진의 승려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을 보고 "이거 전생에 내가 지은 거야"라고 대답했었다고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서도 쿠마라지바는 언급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쿠마라지바가 불경 번역에 대해 남긴 말[19]을 인용해 한글로 창작된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중국식 칠언고시로 번역하려 하는 것을 두고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며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20]가 소위 배우신 분들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급하거나 저속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표현의 참신함과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한국어)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