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쌓여가는 옛길 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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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접어드니 경치는 시 속의 그림이요(景入詩中畵)/ 냇물소리는 악보에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泉鳴譜外琴)/길은 멀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路長行不盡)/해는 멀리 서산마루에 걸려 있네(西日破遙岑).
낙엽이 길바닥을 뒹구는 늦가을의 정취와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움츠리게 하는 초겨울의 스산함이 공존하는 계절의 경계점에서 시공을 넘어 영남 선비들의 옛 과거(科擧)길인 문경새재 길을 더듬어 볼 요량으로 나선 여행길. 새재 초입 ‘선비의 상’옆에 새겨진 조선말 실학자 이수광의 ‘길을 가다가(途中)’란 시는 갈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한 길손의 심정을 들춰내고 있다. 청운의 뜻과 출사의 각오를 다지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은 추풍령·죽령·문경새재 중 한 곳을 거쳐야 했다. 이 중 문경새재는 열나흘 길의 가장 빠른 코스였다. 심지어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 기쁜 소식을 듣는다)’의 덕을 보고자 호남의 선비들조차 일부러 먼 이 길을 택해 둘러가기도 했다.
그 옛날 괴나리봇짐에 어렵사리 마련한 엽전 몇 꾸러미를 지고 새재를 넘던 선비의 심정이 되어 고갯길 첫 관문인 주흘관에서 제2관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 조령관에 이르는 6.5km 흙길을 따라 과거(過去)로의 여행을 떠나본다.
#좌 조령산 우 주흘산을 길동무 삼다
드넓은 잔디광장. 앞엔 웅장한 성곽을 두른 제1관문 주흘관이 버티고 섰고 뒤로는 기암괴석과 해발 1천m가 넘는 삐죽한 암봉의 조령산과 주흘산이 초겨울 찬바람을 내몰아 쉬고 있다. 웬만한 기세의 사람이 아니라면 두 산이 내뿜는 기운에 눌려 재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할 지경이다. 혹여 요행을 바란 시험 길이라면 여기서 발길을 돌리라는 무언의 압력 같다.
관문 안을 들어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과거(過去)를 찾아 나선 길에서 만난 미래의 ‘경북탄생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표지석. 경북인의 생활상·풍습·문화 등 표본 100품목 475종을 1996년 지하 6m에 묻어뒀다는 표시와 함께 400년 뒤인 2396년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제법 넓은 새재 흙길은 타박타박 걷기에 안정감이 있다. 주흘관을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왼편 조령산을 배경으로 ‘태조왕건’, ‘대조영’, ‘대왕세종’의 오픈 세트장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초가와 기와지붕의 수려한 곡선이 과거 속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길은 새재안 계곡의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계류와도 계속 이어진다. 비취빛이 은은한 맑은 계류는 관문 밖에서 일었던 상념을 한 순간에 걷어내는 탄성을 자아낸다. 고려와 조선 때 출장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복원된 조령원터는 본격적인 과거로의 여행 단초를 제공한다. 자연히 길은 계속 이어지고 발걸음 또한 멈출 수가 없다.
‘영남대로 옛길’이라는 팻말에 이끌려 들어간 작은 오솔길엔 평편한 무주암이 자리하고 있다. 누구나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운치 있는 명칭의 이 바위 돌에 올라서면 맞은편 조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든다. 옛날엔 이 곳에 무인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로 힘든 새재 길을 넘는 청량제가 되기도 했다.
해발 318m 지점에 이르자 조선시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했던 교귀정(交龜亭)이 보인다. 묵빛 선명한 교귀정 앞엔 뿌리는 북쪽을, 줄기는 쉬어가는 길손을 위해 남쪽으로 뻗은 소나무가 춤추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교귀정과 비취빛 계류의 용추정, 조락의 기운이 번져가는 조령산 절벽에 오히려 푸른빛을 더해가는 낙락장송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은 한 폭의 선경과도 같다. 큰 바위는 힘이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며 산 속의 물은 흰 무지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하늘과 땅이 서로 웃고 어루만지며 예와 오늘이 곁눈질하는 교귀정 일대는 최고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용추정이 흐르는 너럭바위는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궁예의 최후를 찍은 장소이다.
#굽이굽이 쌓여가는 옛길 정취
물이 마른 조곡폭포를 돌아들면 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이다. 조곡관 성곽에 오르면 조령과 주흘 두 산의 봉우리들이 에워싼 흙길은 더욱 고즈넉해진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절벽을 따라 낙엽도 수북하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아리랑,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난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10리를 넘게 걸은 덕에 힘이 들어 길가 안내판 버튼을 누르자 문경새재 아리랑이 계곡을 울러 퍼진다.
2관문을 20여분 걸으면 오른 편에 사자바위·부처바위 등 볼거리가 많은 부봉 6개 봉우리로 가는 등산로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부봉은 백두대간이 문경과 충북의 경계점인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어 한 가지는 주흘산을, 또 다른 한 가지는 제3관문과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을 이루는 새재의 지맥에 있는 봉우리들로 아기자기한 생김새의 바위를 많이 볼 수 있는 인기 등산로이기도 하다. 간간히 바위굴과 새재우 전설과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주변경관이 좋기로 소문난 색시폭포 가는 길이 있는 곳도 이곳 구간이다. 해발 475m에 있는 이진터는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의 농민 모병군이 잠시 진을 친 곳. 여기서부터 길은 약간 가팔라진다.
‘단풍 든 새재를 나귀타고 넘는데/세 해 지난 베옷에 몸종 하나 뿐/나는 새 바라보며 솔바람 맞노라니/내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 속 그 시인.’ 조선 중기 때 문신 정희량이 쓴 ‘새재에 올라’라는 시가 가슴 속에 고스란히 다가와 새겨질 즈음 잘 닦여진 길 대신 책 바위 가는 산길인 일명 ‘장원급제길’을 택했다. 쌓인 낙엽 때문에 미끄럽기 조차 한 산길을 오르면 중턱에 칠성단과 책바위가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부봉을 이루는 시루봉·향로봉·촛대봉·신선봉이 어우러져 있다. 마치 정화수를 올려놓고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면 소원이 이뤄지도록 신선이 기원하는 조화로운 형국이다. 그래서 인지 책 바위와 칠성단에는 많은 소원쪽지가 수없이 달려 있다.
책바위에서 다시 산길은 치고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마패봉 가는 길(0.9km), 왼쪽으로는 조령산 가는 길(5km)로 나뉘는 지점에 해발 650m의 제3관문인 조령관이 나타난다. 성곽 아래켠엔 조선 숙종34년(1708년) 조령산성을 구축할 당시 발견된 조령약수가 아직도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한 숨을 돌린 후 3관문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잘 닦인 큰길이 금의환향길이다. 급한 마음에 주마간산 격으로 걸어온 6.5km의 새재 과거 길이 꿈만 같다. 이 조령관을 지나면 길은 충북으로 이어진다. 한양 땅을 밟으려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산새는 바람 피해 숲을 찾아들고/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리네/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비치네.’
열나흘 과거길이였던 문경새재는 이렇듯 집 떠난 수많은 선비들의 고단함과 출세의 달콤함이 곳곳에 스며있다.
◇문경새재 가는 길=경부고속도로 김천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문경새재IC에서 내려 좌회전, 3번국도를 따라 5분정도 가다가 오른쪽 방향으로 빠지면 문경새재도립공원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10여분 달리면 문경새재 주흘관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먹을거리
문경새재도립공원 주차장 앞 ‘소문난식당(054-572-2255, 문경 문경읍 하초리 304-15번지)’은 청포묵과 도토리묵을 이용한 새재묵조밥으로 유명하다. 주인 장창복(73)씨가 40년 넘게 직접 재래식 방법으로 묵을 쑤고 있다. 우선 하루 이틀 물에 불린 녹두나 도토리를 갈아 삼베 천에 싼 후 물에 비벼 녹두와 도토리 액을 짜낸 후 다시 하루를 가만히 두면 녹말성분은 가라앉는다. 묵을 쑤는 재료는 다름 아닌 녹말이 충분히 빠진 윗물. 이를 다시 은근한 불에 2시간 이상 끓여 걸쭉해지면 틀에 부어 식히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묵은 탱글탱글한 탄력이 있고 씹으면 묵 특유의 담백한 맛이 난다. 새재묵조밥은 이 묵을 잘게 채 썬 후 깨소금과 찢은 김 등 고명을 얹어 조밥과 함께 비벼 먹던 문경 토속 음식.
12가지 토속적인 찬과 강된장으로 끓인 찌개 맛이 구수해 옛날 어머니 손맛을 느끼게 하는 새재묵조밥은 청포묵조밥과 도토리묵조밥 2종류가 제공되며 가격은 1인분에 8천원. 녹두전과 더덕구이가 추가되는 정식은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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