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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9일 주일 [(녹) 연중 제28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 없음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깨끗해진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선물을 건네자 엘리사는 거절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다(복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는 것 자체가 은총이란 말이 있습니다. 숨 쉬는 순간부터 내 삶의 한순간도 거저 얻어진 것은 없습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 기적 같은 인생에 감사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분노로 탄식하는 순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족보다는 불만에 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
<불평불만, 이제 그만!>
언젠가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한 가지를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내 남자(혹은 여자) 친구, 이럴 때 제일 싫다.’였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상위권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중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들에게 야단치고 유세부리는 남자(여자)친구.’ 저 역시 대중식당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을 마치 몸종 다루듯 다룹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을 제대로 괴롭힙니다. 다른 데서 못 푼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불러대고, 이것 왜 짜냐? 저것은 왜 식었냐, 갖은 불평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다짐을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키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절대로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불평불만’이란 것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이란 것,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그게 슬슬 습관이 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불평불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이 불평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출애굽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기쁨의 행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번 천 번도 더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몇몇 ‘개념 없는’ 사람들 처신하는 것 좀 보십시오. 즉시 불평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빼내왔느냐?”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집트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에, 술에 산해진미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만나를 먹어야 되나?”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시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진노하십니다.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 바로 불평불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들의 모습도 한번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새 삶을 부여하신 예수님, 생명을 도로 찾아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참 수도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한번 크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정현종, 방문객 참조).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굳이 받지 않아도 될 고통 피해가는 법
‘더 임파서블’이란 영화는 사상자 30만 명을 기록한 인류 최대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이 가족은 휴가차 태국에 머물게 됩니다. 사춘기의 아이는 뭐가 불만인지 모르지만 부모에게 짜증만 냅니다. 그냥 보통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쓰나미 속에서 서로 죽은 줄 알고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온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치기도 했고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생겼지만 이젠 이전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재난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현실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 삶이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차를 몰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짜증아 날라치면 하정우 주연의 ‘터널’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지금의 것들을 빼앗겨보아야만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가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전에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좀처럼 그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훨씬 비옥하고 살기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노력하면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광야와 다를 바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떠돌던 때를 생각한다면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주님은 엄청난 옥토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큰 집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지붕도 없는 길거리에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약속이 그리 크게 기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했습니다. 간신히 광야에서 천막을 얼기설기 지어서 이슬만 피하며 산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튼튼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맹수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얼마나 기쁜 약속이었는지 모릅니다.
또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약속하신 것은 이제 그들의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이라면 그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던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농사지어 거둔 곡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소출을 낼 때 그 소출을 바로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치고 먹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바로 그런 의미로 남겨놓으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 너희가 이렇게 너희 하느님에게 예물을 가져오기 전에는 빵도 볶은 곡식도 풋이삭도 먹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레위 23,9.14)
그리고 첫 소출을 주님께 봉헌하는 감사제를 “영원한 규칙”으로 세우심으로써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감사의 크기와 관계의 깊이는 비례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이고 친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당신께 감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감사하기에 이미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우리에게 바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감사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점차 자신들이 누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민족들이 더 자신들보다 큰 부를 누리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소출을 바치는 것이 적어지고 그렇게 성전은 가난해졌습니다. 성전의 사제와 레위지파 사람들도 이젠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 농사를 지으러 나가 성전의 감사의 제사가 사라지고 변질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보내시어 감사가 사라져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들을 다시 이전의 나그네 생활로 되돌리시어 지금까지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였고 돌아와서는 다시 충실하게 제물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또 주님은 그들을 이방인들 손에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조: 유기성 목사 유투브 설교 ‘감사는 구원받을 자가 누릴 복입니다’ 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병에 걸렸었습니다. 바로 지옥에 갈 영혼의 나병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새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고 생명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교무금도 너무 많이 내는 것 같고 헌금을 봉헌하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때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당신은 생명을 주시고 계신데 당신이 주신 돈의 아주 일부를 바치면서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다시 이전의 고통의 상태로 돌려보내어 지금의 이 구원받은 삶이 참으로 감사해야 할 삶임을 깨우쳐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고통이 감사를 다시 되찾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90%나 되는 것입니다. 왜 자신들을 그런 병에 걸리게 했었느냐고 원망까지 합니다. 또는 이젠 그동안 아파서 못 누렸던 것을 더 누리기 위한 생각만 갖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을 굳이 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이 없더라도 당연히 바쳐야 하는 감사를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끝기도를 바치면서 속으로라도 감사한 일들을 돌아보며 찬미를 드려도 됩니다. 물론 더 완전하게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는 고통을 주시며 단련을 계속 하시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매일 어떤 상황이든지 감사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굳이 고통을 더 주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십니다. 주님도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큰 고통을 피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구원받은 첫 날 느꼈던 그 감사를 매일 똑같이 느끼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느끼기 위해 조금씩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도 좋습니다. 단식이나 양팔기도 등을 하면서 그런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더욱 찬미할 수 있습니다. 불만족으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행복을 다시 회복시키는 방법은 감사를 되찾는 길 뿐입니다.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내일도 감사한 일만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The cleansing of ten le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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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9일(일) 음9/9 聖 아브라함과 사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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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환대>, 템페라, 14세기, 베나키 박물관, 아테네, 그리스
성화해설 구약의 성조인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세 천사에게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시중을 들며 환대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천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즉 성부·성자·성령을 표현한 것이다. 천사의 붉은색 옷과 바닥의 녹색, 그리고 배경의 황금색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생명·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2008년 5월 18일 삼위일체 대축일 서울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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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창세 22,1-19)
100세에 부인 사라로부터 아들 이사악을 낳아 하느님의 명에 따라 아들을 제단에 바치려 했으며
이사악을 통해 히브리 민족, 우리 주님의 조상이 되었고 86세에 종 하갈로부터 낳았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셈족의 조상이 된 님
하느님은 이사악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과 함께 200년간 이민족의 종살이 할 것을 동시에 계시하셨으니 영원의 계획은 철저한 믿음과 기다림의 인내를 함께 요구하심이어라.
성조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시여 님들을 기억하는 저희들에게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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