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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무엘상 15:24-35절
제목: 당신은 하나님을 무서워합니까, 두려워합니까?
서론>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무서워하다”와 “두려워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이 있을까요? 우리는 같은 뜻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다”에는 “무서워하다”에 없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버지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면 체벌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 공경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사울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무서워할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할까요? 무서워도, 두려워도 안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듣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합니다. 아멘 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매맞을 것이 두려워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무서워하는 척, 두려워하는 척했습니다. 사람은 속아 넘어가 줄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런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드러난 사울 왕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는지를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척하며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까?
첫째로,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순종한 척하는 것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24-29절). 앞선 단락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 곧 하나님의 말씀을 행했다고 사무엘 선지자를 속이려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면서, 말씀을 따라 순종한 척한 것입니다.
왜 이런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24절 말씀에 보시면, 사울이 뭐라고 사무엘에게 변명합니까?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고 사무엘에게 거짓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 척했다는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사울은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에게 떨어졌을 때 “아멘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해 놓고 막상 현장에 가서 아말렉 사람과 그 소유물을 탈취해 보니 이 아까운 것을 다 없이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에 “노멘”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 마음이 표현된 말씀이 앞 단락, 9절 말씀입니다. 우리 말씀을 찾으셔서 다시 보겠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와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사울 왕과 그 백성들만 그럴까요?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을까요? 사울 왕과 그 백성이 그러했듯이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데 있어서, 내 생각에 가치 없고 하찮은 것에만 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을 따라 순종해도 내게 값으로 이득이 안 되는 것, 손해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쉽게 “아멘”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도해라, 봉사하라,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미워하지 말라, 사랑하라, 서로 잘 섬기라, 겸손하라. 이런 말씀들에는 기쁘게 순종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값으로 따졌을 때 이득이 되고, 손해가 나고, 불이익이 따르는 것에는 순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장사하는 사람에게 떨어졌을 때, 저울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술 좋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술에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소득이 있으면서도 소득의 십일조 안 드리는 사람에게 십일조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리대금업 하는 사람에게 너의 교인 중에 네게 꾸러 오는 자에게 이자 받지 말라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에게 너무 부자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몸만 돌보고 남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자기 집안을 망치고 자기 앞길을 망친 원수에게 보복하려는 사람에게 원수갚지 말고 그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에는 마음이 즐겁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 말씀을 다 따르겠는데, 이 말씀은 죽어도 못 따르겠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집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사울처럼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았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았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가치 없고 하찮은 것에는 쉽게 “아멘” 하면서, 마음이 즐겁지 않은 말씀에는 “노멘”하고 살았으면서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사울처럼 하나님을 속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게, 이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본문 29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아멘.
이 말씀은 사울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고 고쳐서 변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따라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서 예배드린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30-33).
본문 25, 30절을 보시면 여러분을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두 번이나 계속해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같은 말로 청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자기와 함께 돌아가서 자기가 여호와께 경배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이 말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 때문에 회개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사람 눈치 보면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이스라엘 왕인데 하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왕의 체면을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 겸손하게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모습과 아말렉 왕 아각이 겹치고 있습니다. 본문 32절 말씀을 보시면, 아각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여인에 대해 무자비하게 칼로 죽인 죄에 대해 뉘우치거나 잘못을 돌아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이 자신을 끌어오라고 했을 때 이제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나 싶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두 번째 청원을 기록한 본문 30절은 자기가 범죄했을지라도, 이왕 이렇게 된 것, 자기가 다스리는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자기를 높여줄 것을 청원합니다. 그러려면, 사무엘이 자기와 함께 돌아가서 여호와께 경배드리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를 놓아두고, 회개 없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7편 12절은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늘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에게 이렇게 분노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계시는 데 회개 없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공경해서가 아니라 왕이라는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서 예배드리는 척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서 예배 드리는 사람 마음에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살지도 않았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살았으면서도 참된 회개 없이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울 왕은 왕이라는 직분을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경배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교회의 중직, 곧 장로와 권사가 되고 싶어서 안수집사가 되고 싶어서, 기관장이 되고 싶어서, 그래서 억지로 앉아서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만 교회 중직이 될 수 있으니, 가고 싶지도 않은데, 별 가봐야 은혜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들지만, 마지못해서 직분 받으려고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목사님 자녀라서,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님 자녀라서, 노회장, 총회장 교회라서, 사람 눈치 살펴 가며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는 껍데기이고 내용은 없는 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사울 왕을 폐위시키고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보다 나은 자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본문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사람 눈치 때문에 사람 눈치 봐가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왕의 체면 따위는 벗어 던지고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 적의 화살받이로 죽게 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할 때 그는 왕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금식하며 통회하고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의 모습이 좋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직분도, 사회적 신분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부터 주일학교 아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눈치 봐가면서 예배드릴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다윗처럼 기뻐하며 예배드려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사는 것은 실패와 패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34-35절).
여러분, 사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엔 하나님을 두려워했는데, 그의 마음이 변화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일까요? 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가 왕이 된 후입니다.
앞 단락 본문 17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그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 삼아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 지파 베냐민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힘이 약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 중에서도 기스 집안은 그렇게 왕이 나올 만큼 명문가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있고, 자기가 섬길 사람이 있고, 자기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마음이 가난하니 자기는 부족하고, 힘이 없고, 왕이 되려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있다고 인정할 때, 자기는 미약하다고 인정할 때, 그래서 위로 쳐다보고 사니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는 그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고, 다 자기 발아래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는 다스리는 존재이지,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를 쳐다보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보다 높으신 분이 계시고, 자기를 다스리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위에 계시고, 높이 계시고, 자기는 왕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해진 것입니다. 사울이 결국 왕위에서 폐위당하고 그의 인생이 실패와 패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에 자신을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사울을 온 이스라엘 왕 삼아 주신 것처럼, 각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목사와 사모로,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로, 서리 집사로, 교사로, 구역장으로, 교단 같으면, 총회장으로, 노회에서는 노회장으로 직분을 각각 받았습니다.
사울 왕도 왕이 되기 전에 왕 직을 감당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왕으로 제비 뽑혔을 때 짐승의 짐보따리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왕 감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스스로 작게 여길 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목사라고,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사모라고, 이러한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나 같은 교인이 무슨 장로감이라고, 권사감, 안수 집사감이라고, 내가 교회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서리 집사를 주시나, 교사를 주시고 구역장을 맡겨주시나, 교구장을 주시나 하며 자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럴만한 자격도 없는데,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을 총회장으로, 노회장으로 써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하고 감격해합니다.
그러다가 직분에 임명된 후에는 사람이 달라지는데, 새 마음 좋은 마음 더 겸손해져야 하는데, 남보다 좋은 자리에 있다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이전에는 위로만 쳐다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아래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전도사나 강도사는 목사 될 날만 기다리고, 목사님들만 쳐다보고 살다가 목사가 되고 보니 선배도, 어른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가 되기 전에는 장로만 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장로가 된 후부터는 교인들에게 장로가 말하는데, 감히 토를 단다고, 장로가 시키는데, 듣지 않는다고 교회에서 큰 소리를 냅니다. 교인들을 아래 사람 대하듯이 합니다. 권사도, 안수집사도, 기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교사 때에는 부장 교사가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기도하더니, 부장 교사가 된 이후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면 되는데, 부장이 시키는 대로 하면 할 것이지, 라며 교사를 꾸짖습니다. 감히 부장 말을 거역해, 이런 언행을 우리에게 거룩한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이 보신다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그 말씀이 본문 35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우리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여러분을 목사와 장로, 교회 중직자로, 교사로, 집사로, 기관장으로 삼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직분을 받은 후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누가 슬퍼하실까요? 누가 후회하실까요? 목사는 기름 부어 주신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교회의 장로와 안수집사는 그를 기름 부어 세운 담임목사님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를 권사로, 서리 집사로, 또는 교사로, 기관장으로 세운 담임목사님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를 통해서 그에게 거룩한 직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직분을 주신 것을 후회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올라갈수록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보다 위에 계시고 높이 계시고 나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래를 보고 산다면,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사람들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한다면,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후회하실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길이 바로 실패와 패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