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단상들 케네스강 (글무늬 문학사랑회) 매년 6월이 되면 나는 그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떠올린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5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쪽을 향하여 일제히 밀고 내려왔다. 나는 어릴 때 작은형과 함께 ‘가거라 삼팔선’ 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남인수가 1947년에 불러 크게 히트한 이 노래를 우리 작은 형은 2절까지 잘도 불렀으며 나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였으므로 우리는 남침이라 부른다.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북한이 침범하였으니 북침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는 일화가 있어 우리를 아연케 한다. 내가 열살 되었을 때 끝없이 밀려 내려오던 피난민들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하얀 무명옷을 입은 아낙네들이 머리에 큰 짐을 이고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끝없이 내려오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전쟁 둥이 혹은 사변 둥이라 부른다. 어느덧 그들이 70대 중반이 되었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것을 내전 (Civil War) 이라고 부르는데 미국의 남북전쟁도 모택동과 장개석의 국공 내전도 그리고 월남전도 모두 Civil War이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국을 위시한 16개 나라가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하였고 그 외에 의약품 등으로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도왔다. 이 전쟁은 3년 하고도 한 달을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되었다. 그 휴전 조인을 하던 날을 기준으로 당초의 38선에서 휴전선 비무장지대 (DMZ) DeMilitarized Zone 으로 남북을 갈라놓았다. 휴전선은 동서로 240 킬로미터이며 남북으로 각 2 킬로미터 총 4 킬로미터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의 정 중앙을 가르는 선을 군사분계선 (MDL) Military Demarcation Line 이라 부른다. 나는 70년대 초 젊은 시절 국제관광공사 (현 한국관광공사) 가주관하는 판문점 투어를 3년간 담당하며 거의 매주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찾는 방문객들을 인솔하여 판문점 내 비무장지대 까지 군사분계선으로 여행하였다. 완전 무장한 유엔군과 대치하고 있는 북한군들을 지근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군사분계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치고 서울 유엔군 사령부에 각서를 제출하였는데, 만일 행동을 잘못하여 북한군과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본인이 책임을 지며, 목숨을 잃는 일이 있어도 전적으로 그것은 개인 책임이라는 것을 각서로 서명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에어컨이 장착된 스웨덴 제 스카니아 바비스 (Scania Vabis) 대형 버스는 서울장안의 화제였다. 이 커다란 버스가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에 도착하면 북한경비병들이 버스에 쓰인 글자를 크게 읽으며 “뭐? 국제관광공사? 종 간나 쉐끼들” 하며 우리를 조롱하였으나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그 시절 여러 초소들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 (The Bridge of No Return) 등 갖가지 풍물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다리는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을 청년들이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태극기 걸어놓고 ‘천세 만세 부르세’ 를 합창하며 군에 들어갈 때 동네 어머니들이 통곡하며 청년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건장하고 준수했던 그 청년들 가운데서 갓 결혼한 두 청년은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고 미혼이었던 한 청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에서 위령제가 거행되었는데 어른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두 미망인들은 영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깨를 가늘게 떨며 오열하던 모습이 추억 속에 남아있다. 어린 나도 함께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얀 소복을 하고 있는 두 여인들은 비바람에 젖은 가련한 코스모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