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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신앙의 모범 성모 마리아
교회의 모든 성인들 가운데 가장 공경 받는 분은 단연코 성모님입니다. 전례력 안에 성모님의 대축일과 축일, 기념일만 도합 열아홉 번 있으니, 다른 성인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면서 그 어떤 성인도 누리지 못한 공경을 성모님께 드립니다.
성경에는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한 이들의 기록이 있긴 합니다만, 교회가 믿을 교리로 승천을 선포한 성인은 오직 성모님뿐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당시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성모 승천이 현대에 새롭게 만들어낸 교리는 아닙니다. 예로부터 신앙인들은 성모님의 승천을 믿었습니다. 4~5세기경 저술된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이나, 8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의 작품 등이 그런 믿음을 증언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호칭들
이렇게 마리아가 지극한 공경을 받으시는 분이니, 그분의 생애와 덕을 기리는 세례명들도 많고 영명 축일도 많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명으로 삼은 것은, 그분을 그만큼 큰 모범으로 여겨왔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성모님의 다양한 이름들을 알아볼까요?
먼저 성모님을 꽃에 견주어 부르는 이름들을 보면, 빼어난 자태와 향기를 자랑하는 장미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로즈마리’(축일 5월 31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로사’나 ‘마리로사’도 같은 뜻입니다. 또 순결하고 고귀한 이미지의 백합에 빗대어 ‘릴리안’(12월 8일)이라고도 부릅니다.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지요. 원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님을 표현하는데 백합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바다의 별’, ‘스텔라’(8월 15일)도 성모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두 이름은 성모님의 이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성모님은 유태인이시니, 당시 유태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미리암’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미리암은 ‘별’이라는 뜻이지요. 이 ‘미리암’을 뜻에 따라 라틴어로 옮기면 ‘스텔라’가 되고, 소리에 따라 번역하면 ‘마리아’가 됩니다. 라틴어 단어 ‘마리아’의 뜻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를 함께 접했던 옛 신앙인들은 성모님의 이름에서 바다와 별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며 그분을 바다의 별(스텔라 마리스)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극성 같은 별을 길잡이로 삼아 용감하게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던 옛사람들에게, ‘바다의 별’ 마리아를 바라보며 신앙의 길을 찾고 용기와 희망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밖에 묵주의 성모 마리아를 일컫는 ‘로사리아’(10월 7일), 하늘의 여왕이시라는 뜻의 ‘첼리나’ 혹은 ‘레지나’(8월 22일)도 그분의 애칭입니다. 성모 탄생을 기념한 세례명 ‘나탈리아’(9월 8일), 성모님께 전해진 예수님 탄생 예고를 뜻하는 ‘안눈치아따’(3월 25일),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기념하는 ‘임마꼴라따’(12월 8일), 성모님의 고통을 뜻하는 ‘돌로로사’(9월 15일), 가르멜 산의 동정 성모님을 일컫는 ‘가르멜라’(7월 16일)도 모두 성모 마리아님께 기원을 둔 이름들입니다.
마리아의 모범
신앙의 선조들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성모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따르려 했다면,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성모님의 모범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봅니다.
우선 성모님은 대화하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의 순명은 결코 말 없는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루카복음서에 실린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루카 1,26-38)을 볼까요?
대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그저 ‘예’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당돌하리만치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밝힙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며, 엘리사벳의 잉태를 예로 들면서 마리아의 불안과 의구심을 달래 줍니다. 그제야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며 믿음의 순종을 실천하지요.
우리 신앙은 아무 생각 없는 받아들임과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대천사도 어린 시골 처녀 마리아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고, 마리아 또한 대천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밝혔습니다. 신앙의 순명은 이렇듯 대화를 전제합니다.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대화하고 인내로 기다리는 시간은 참다운 순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대화 없는 순종은 굴종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성모님은 경청하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고 목동들이 찾아와 천사들의 말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무릇 대화로도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와 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충분히 대화를 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과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 마리아는 자기 잣대로 쉽게 판단하는 대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반발하고 튕겨내는 세태 속에, 설령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한 걸음 물러나서 마음을 다잡는 마리아의 모습은 경청을 통해서 영성의 깊이를 더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빙빙 돌려가며 대화와 경청의 미덕을 말씀드리는 까닭은, 지금 전 세계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시노드적인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시노드, 그러니까 ‘함께 가는 길’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요 삶의 방식입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난 3년간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통해 성령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시노드의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대화와 경청을 강조하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2차 회기가 마무리되는 해입니다.
시노달리타스, 그러니까 시노드 정신이 우리 안에 온전히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일상에서부터 대화하고 경청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통해서 신앙이 결코 억압과 굴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영성의 샘] 기도 덕분입니다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이 지은 해동잡록에는 장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장님이 수십 명의 사람들과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누군가 금강산 유점사의 기둥과 지붕 형태를 물으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님이 불현듯 “불전의 기왓골이 120이다.”하고 답합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장님이 “처음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왓골에서 떨어진 물이 땅을 파서 오목하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더듬어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라고 대답하지요.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힘든 일을 거뜬히 해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시각 장애인들이 놀라운 청력이나 촉각을 가지거나, 다리가 없는 대신 팔 힘이 어마어마하게 센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장애인들에게 알맞은 일거리를 찾아주도록 법을 정하고 점복(占卜), 독경(讀經), 악공(樂工) 같은 일은 장애인들만 독점적으로 하게 했답니다. 장애나 질병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대신, 오히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인정해 주고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지요. 비슷한 경우를 복음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벳짜다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
요한복음에는 벳짜다 못가에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5,1-18) 서른여덟 해를 앓아누운 환자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드리는 말씀을 들어보면 몸이 아파서 서러운 데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의 비통한 심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 연못에만 들어가면 나을 것 같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뻔히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5) 이 얼마나 절실하고 가슴 아픈 호소입니까.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서 네 들것을 들고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보고 동정하는 대신,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비록 아픈 처지라서 남들 하는 일은 못해도 당신 또한 제 발로 일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장애인은 벌떡 일어나서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갑자기 없던 근육이 생겨나거나 부족했던 뼈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건강해졌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벌떡 일어난 그에게 예수님이 육신의 건강을 잘 돌보라는 말씀 대신,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당신도 당신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선언이고,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보지 말고 돌보면서 살라는 당부일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
마르코 복음(12,41-44)과 루카 복음(21,1-4)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 궤에 넣은 많은 돈보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넣은 작은 동전 두 닢이 더 많다고 하십니다. 액수로야 보잘것없지만, 작은 이의 기도를 크게 받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 돈은 가장 큰돈임이 분명합니다.
루카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바리사이는 자타공인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누가 봐도 건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답게 자기 행적을 뽐내는 기도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 뵙기가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기둥 뒤에 숨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하느님께 아룁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예수님은 떳떳하지 못한 일로 재산을 불려서 빈축을 사던 세리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성전 기둥 뒤에서 처량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한 불쌍한 영혼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작고 약한 이들의 기도
이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부족함이 먼저 보였던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보시고 새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구성원 모두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던 예가 교회 역사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가령 초기 교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과부들’이 그렇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고아와 과부’는 의지할 곳 없는 약한 이들을 일컫는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을 결코 도와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초기 교회에서 맹활약했던 ‘과부’들의 역할을 전해줍니다. 과부들은 세례식 때 성직자들을 도왔고,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며 병자 방문이나 나그네를 돌보는 일을 책임졌으며,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의 옥바라지를 도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부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일은 그들의 기도와 간구였습니다. 기도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성전에 나오기조차 부끄러워 자신을 숨긴 사람들, 세상살이에 시달리다가 어느덧 기도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을 대신해 기도하는 이 과부들과 함께 교회는 모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보시나이다
성당에서 드러나게 봉사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는 많은 분들의 헌신과 노력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조금만 눈에 띄는 일을 해도 ‘왜 나대느냐’는 고까운 시선을 받기도 하는 요즘이라, 남 앞에 나서서 봉사하는 것 자체가 큰 희생이지요.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시는 분들도 고마운 분들입니다. 있을 땐 몰라도 없으면 표가 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잊는 또 다른 분들도 계십니다.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는 분들 말씀입니다. 연만해서, 질병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기도 밖에’라며 어깨를 움츠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아니 보시나이다.”(최문순 신부 역 시편 50[51],19)라는 성경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그 겸손한 기도들을 즐겨 받아주십니다. 우리 마음과 입에서 ‘기도 덕분입니다’라는 말이 좀 더 자주 울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좀 더 알아봐 주고 키워주면 좋겠습니다.
[영성의 샘] 네 마음을 내게 다오!
교회는 부활과 성탄이라는 두 기둥을 중심으로 전례력에 따라 구원의 여정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달에는 특별한 신심을 통해 이를 더욱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교회는 ‘예수 성심 성월’로 제정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성심)’을 닮으라고 권고합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묵상하고, 기도와 희생 그리고 보속을 통해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군단에 속한 우리는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라고 호소하시는 예수님께 기쁨으로 응답해야겠습니다.
‘예수 성심’은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고 발로된 것입니다. ‘예수 성심 신심’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우리의 사랑으로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갖가지 덕행을 본받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며, 보속과 희생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저의 마음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한마음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성 보나벤투라는 “주님의 마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새기고, 기억하여 삶 안에서 실천하여야 합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획기적 사건은 프랑스 방문회 수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1647-1690)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성심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1673년 12월 27일(사도 성 요한 축일)에 처음 발현하시어 당신의 심장을 보이시며 “내 거룩한 마음(심장)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사랑은 그 불타는 사랑의 불꽃을 더 이상 내 마음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너의 수고로 이 불꽃은 널리 퍼져야 한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 마음에 상처를 더하는가. 내 옆구리의 상처를 보아라. 사랑하기에 상처받은 마음, 내 사랑의 귀중한 표를 보아라.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보아라. 네 마음을 내게 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75년 6월 16일에서 20일 사이(성체 8부 축일 기간)에 나타나셔서는 성체 축일 8부 첫 금요일을 성심을 공경하는 특별 축일로 지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교황 클레멘스 13세는 1765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예수 성심에 대한 ‘공적 공경’을 허락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6년 예수 성심 축일을 ‘보편교회’로 확대하였습니다. 예수 성심 신심에 대해 교황 비오 11세는 ‘모든 신심의 종합이요, 더욱 완전한 생활 규범’이라고 말씀하셨고, 교황 비오 12세는 ‘그리스도인 신심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요, 모든 신자들이 질 의무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학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예수 성심과 성체 신비의 관계를 더욱 깊이 천명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들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새기고, 기억하여 삶 안에서 실천해야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구유와 십자가와 감실’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되새기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각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결심을 하면서 ‘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함께 올려드립시다!
지극히 어지신 구세주 예수님,
주님 앞에 꿇어 주님의 성심께 저희를 봉헌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희를 보살펴 주소서.
저희는 온전히 성심께 의지하고 바라오니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다스리소서.
예수님, 저희가 하는 일에 강복하시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게 하소서.
온 세상 어디서나 모든 이가 입을 모아
예수 성심을 찬미하며 사랑과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영성의 샘] 요즘 행복하신가요?
5월은 성모님의 달입니다. 부활 시기를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성모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과연 복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을 의미할까요? ‘복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Εὐλογημένη(에우로게메네)는 좋은+말씀(의미)이란 뜻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나는 행복한가?”가 아닙니다. “나는 행복한가?”가 아니라 “내 삶은 의미 있는가?”입니다.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의 질문을 함으로써 나는 달성할 수 없는 낭만적 이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신에게 인간의 조건에서 나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삶은 고통, 질병, 외로움, 아픔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기쁨은 신자 생활에서 중요합니다.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즉 하느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또한 하나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노래는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6-48)
의미는 어떤 가치가 실현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험가치-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의미(기쁨) 체험입니다.
창조가치-무엇인가를 최초로 새롭게 창조할 때 느끼는 의미와 기쁨입니다.
관점가치-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것에 절망하지 않고 태도나 관점을 바꾸어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과 의미입니다. 즉 관점이 변했을 때 발생 되는 의미로 이것을 신앙의 세계에서는 ‘회개’라고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행동과 조화를 이룰 때 의미가 발생 됩니다.
근육, 민첩성, 아름다움, 광채, 은혜는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주된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주 느끼셔야 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열정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자신을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선함을 오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아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모 마리아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그것을 느끼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분초사회’입니다. 분초를 다투며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밀어붙이는 성과주의 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쇼핑하는 인간이야말로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습니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 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 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 죽은 자들은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 정치적 모습이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26>
오늘날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유혹하고 모든 것을 소비하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5월은 성모님의 달,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아름다운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성의 샘] 양심 성찰과 부활의 기쁨
마음을 금지하라!
1982년 김현준, 민해경 듀엣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오자마자 학생들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아 가요 프로그램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부모 뜻대로만 인생을 살 수는 없다는 가사가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돌연 방송과 음반시장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아이들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 당국이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 나올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법과 제도로 묶어 놓을 수 있을까요? 노래 한 곡 못 듣게 한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얌전한 모범생이 될 리 없을뿐더러, 국가가 국민들을 불신하며 마음속까지 통제하겠다는 태도는 영 마뜩잖습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려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이것저것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적지 않지요. ‘헬리콥터 부모’ 같은 신조어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인간을 믿으시는 하느님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창세 1,26-27)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양을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를 닮은 자녀라면 무릇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 기질, 습관 같은 것들도 닮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품격과 존엄성, 관심과 생각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아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존엄과 자유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여기서 하느님 말씀의 방점은 단연코 모든 나무에서 따 먹어도 된다는 허락에 찍혀 있습니다. 최소한의 선만 지키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신뢰와 사랑의 말씀이지요. 이 말씀이 통제와 금지의 말씀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맡겨 주시거나(창세 2,15), 협력자를 만들어 주실 리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인간이 손대지 말아야 할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불신하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잘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너희를 못 믿을 존재로 여기지 않겠다. 너희들이 내 말을 거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거야’하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열매를 따 먹고 난 후에 하느님께서 곧장 추방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회를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죄를 짓고 숨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자녀가 사고를 저질렀을 때 근심 어린 모습으로 어쩌다 그랬느냐고 묻는 자상한 부모님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용서하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거절하고 서로를, 또 피조물을 탓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다가오시는데, 사람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도망가는 형국입니다.
고해성사는 화해와 치유의 성사
올해 3월은 회개와 보속의 사순시기와 부활의 기쁨이 이어지는 달입니다.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로 절정에 달하는 신비를 더 잘 묵상하도록 교회는 판공성사를 받게 합니다. 문제는 이 성사가 부담스러워서 신앙을 멀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다가오실 때, 자기 죄의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화해의 기회를 차 던져 버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지요.
고해성사를 피하게 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사목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양심 성찰에서부터 걸려 넘어지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성찰을 하자면 많은 분들이 먼저 자신의 죄와 잘못부터 살핍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성찰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보다 자신에게 묻은 티끌과 흠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강박관념과 세심증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성사를 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용서하시는 하느님,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시 일어나서 존엄과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심 성찰의 첫 단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족한 면이 있어도 또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나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던 많은 형제자매들,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감사, 그렇게 감사할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잘못을 성찰하는 일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혼자 사는 세상인 것처럼 착각했구나.’, ‘내 옆에 있어 준 형제자매들에게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채권자나 된 듯 행세했구나.’ 같은 깨달음이 따릅니다. 고백과 보속은 그런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겠지요.
고해의 기쁨, 부활의 기쁨
고해성사는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 고백함으로써 심리적 후련함을 느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 정산하듯이 한 번씩 털어 보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존엄하고 자유롭게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일이고, 우리가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기쁘게 길을 가도록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일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리스도교 정신이 충만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던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지금껏 절망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내일은 온다’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내일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하루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다면, 부활을 통해 선사 받는 새 생명의 기쁨도 더 벅차게 와 닿을 것입니다.
[영성의 샘] 부활의 증인인 교회와 성체성사
1. 의심 많은 토마스
독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에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조가 그린 ‘성 토마스의 불신’이 걸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토마스 사도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의 손을 직접 잡고 당신 옆구리 상처를 만지도록 이끄시고, 베드로와 요한 복음사가가 그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카라바조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던 제자에게 주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친히 보여주시는 장면을 그리면서, 믿음의 토대를 확실하게 보고 싶은 뭇사람들의 속내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한편으로 긴가민가하는 신앙인들의 의구심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카라바조가 묘사한 것처럼,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 표현 중에 의심 많은 사람을 ‘의심꾼 토마스’(Doubting Thomas)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매사 꼬치꼬치 따지고 증거를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모습에서 어떤 이들은 토마스 사도를 합리적인 인물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인 토마스 사도도 예수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니, 하느님이 무슨 증거라도 보여주거나 확실히 자신을 설득할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믿음과 거리를 두겠다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을 우습게 여기거나, 신앙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어리숙해서 그렇다고 낮춰 보기도 합니다. 신앙은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하겠지만, 자신은 주관이 뚜렷하고 이성적이라 전혀 관심이 없다는 식입니다.
2. 불신의 이유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대단히 합리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맞는다면 서구 지성사를 쥐락펴락했던 위대한 지성들이 죄다 무신론자여야 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토마스는 주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분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만져보라고 했을 때 실제로 그분 몸에 손을 댔다는 언급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는 말씀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가 믿지 못했던 이유, 또 믿음에 이르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모여 있었습니다. 행여나 스승처럼 잡혀가서 처참한 형벌의 희생자가 될까봐 떨고 있었습니다. 따르던 스승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새로운 삶을 꿈꾸던 지난날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절망감이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만 해도 희망에 벅차서 그들의 생업마저 버리고 신나게 따라나섰건만, 이제는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 있습니다.
그 절망과 두려움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전형적인 오합지졸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막막함과 절망감을 함께 모이는 것으로 달래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요. 수난 이전의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바로 그 약속대로(마태 18,20) 예수께서는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 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과정에서 예수님을 배반했고 흔들리기도 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던 나약한 제자들이지만, 그런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서로 용서하며 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반면에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살길을 찾아서 밖으로 다닌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현실적이라 재빨리 방향을 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뭐라 증언하든, 예수님이 직접 자신을 설득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교만이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런 토마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합류한 다음이었지요. 자기가 불신했던 형제들, 고통스런 현실을 함께 나눌 수 없었던 형제들을 찾아가서 마음을 함께 나눈 다음에 비로소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3. 부활의 증인이요 신앙의 양육자인 교회
우리는 신앙을 자기 힘으로 획득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책 몇 권 읽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면벽 수행이나 탁월한 덕행을 쌓음으로써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이치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전해 준 신앙을 교회 안에서, 곧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힙니다. 나약하고 흔들리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을 기르고 양육하는 어머니이고 신앙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부활의 증인이요 신앙의 양육자로서의 교회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징의 하나입니다.
지난 2022년 발표하신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부활하신 분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간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빵을 떼어 주실 때, 빵을 떼는 그 몸짓이 그들의 눈을 열어 줍니다. 그 몸짓이 십자가의 공포로 눈이 멀어 버린 그들을 치유하여, 부활하신 분을 ‘보고’ 그 부활을 믿게 해주었습니다. … 오순절 뒤에 우리가 어떻게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나자렛 사람 예수에 대하여 알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분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짓을 더욱더 생생하게 보려고 그분의 제자들을 찾아내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기리는 공동체를 만나는 것 말고는 참으로 그분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교황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7, 8항 참고)
어제 하루만 해도 세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암과 싸우는 환자 가족, 암으로 가족을 하느님 품에 보내드린 분, 또 다른 아픈 사연, 그런 연락을 받고 그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 약속을 듣는 분들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마음을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앙을 생각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배우고 터득해 갑니다. 전례력으로 부활 축제를 계속 지내는 사월 봄날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새겨보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영성의 샘] 온전한 봉헌
본당에 오랜만에 부임하여 사목 생활을 하며 좀 더 깊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안전하고도 티 없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레지오 훈화를 준비하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다.”(‘레지오 교본’ 제3장)라는 대목을 접하며 ‘왜 성모님의 군단에게 꼭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의 ‘깊은 겸손’, ‘온전한 순명’, ‘천사 같은 부드러움’, ‘끊임없는 기도’ 등의 성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머물렀다.
그때 문득 나의 마음속에서는 단순한 봉헌이 아니라 ‘온전한 봉헌’이라는 마리아의 삶이 그려졌다. 사실 교회 안에서 봉헌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흠숭’이다. 그분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믿음 말이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은 봉헌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최상의 이끄심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며 감사를 드린다.
첫째로, 성모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었다. 늙은 요아킴과 안나는 가장 예쁜 나이의 귀여운 딸을 봉헌해야 했다. 교회는 바로 이날을 마리아가 주님께 봉헌된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봉헌되도록 맡겨졌다.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전통은 자녀들을 인간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구원 계획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인간인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지만 그 이후에는 주님의 손길이 거두어 주신다.
둘째로, 성모 마리아 자신의 봉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성모님의 자기 봉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어디일까? 그 대목은 단연코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카 1,26-33)’ 장면이다. 인간적으로 보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앞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삶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을 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순종의 봉헌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릴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당신 심장도 이미 꿰찔리시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봉헌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아들을 온전히 자신과 함께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셋째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에서 아름다운 모습의 본질이 나온다. 화가들이 그리는 마리아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젊고 아름답고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18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화가 사르넬리의 작품으로 몬테까시노 분도 수도원에 소장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보통 그렇게 표현한다. 다만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모습, 아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깊이 품고 묵묵히 따르는 모습,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성모님의 모습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해 신성한 것이 돼
이처럼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우리를 예수님께 가장 잘 봉헌하게 하고, 친밀하게 일치시키는 신심은 바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신심이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봉헌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께도 봉헌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온전히 삶을 봉헌하는 데에 있다.
저 자신도 사제 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상본과 함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성구로 삼아 항상 봉헌의 삶을 살고자 약속했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지만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더 몸부림친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욱더 마리아처럼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지 깊이 되돌아보며 신앙의 철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의 봉헌 생활이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도 성찰한다.
그렇다. 우리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하여 신성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군단이 ‘마리아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근거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83) 희망의 별이신 성모님
흔들리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
희망찬 연중 시기를 맞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아직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불안한 국내외 정세, 특히 비상계엄 선포 이후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지금, 성탄 전후로 보인 마리아의 모습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준다.
예수님 탄생 전 마리아는 순수하고 발랄하며 도전을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과 인사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라 곰곰이 그 뜻을 헤아린다.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반문할 정도로 용기 있고 자유로운 마리아였지만, 천사가 전해준 다음의 말에 ‘예’하는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천사의 방문 후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다고 주님의 어머니를 칭송한다.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에는 그녀가 믿었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난다. 그분은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는 분, 미천한 이에게 큰일을 하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분, 당신 권능으로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 분, 세세대대로 당신 자비를 기억하는 분이시다.
이어지는 성탄 이야기를 통해 비친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여인,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놀랍고 큰일을 이루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일어난 일들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하러 갔다 해산날이 되어 아들을 낳고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인다.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천사의 안내를 받고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와 아기에 관해 들은 말을 알려주었을 때, 모두 놀라워하였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율법에 따라 제물을 바친다. 의롭고 독실한 이로 알려진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그가 아기에 대해 하는 말에 아기 부모는 놀라워한다. 시메온은 아드님으로 인해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나 예언자도 그 자리에 와서 이 장면을 목격하고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리아는 여러 위기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곰곰이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시며 하느님의 크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비상계엄 선포 후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마리아가 고백한 하느님은 교만에 빠진 권력자들을 당신 권능으로 물리치시며, 군사적 폭력이 아닌 자비와 정의로 평화를 실현하는 분이시다. 주위가 온통 혼란스럽고 시끄럽지만,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둔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을 이루실 것을 믿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 시대가 바라는 것은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를 따라 굳건히 희망을 증언하는 우리 신앙인이 아닐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76)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무한대의 하느님 사랑
수많은 대중가요가 사랑을 노래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부르고 또 불러도 결코 질리지도 고갈되지도 않는 것이 사랑이다. 그처럼 사랑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노랫말에는 주로 이별·상처·슬픔·괴로움 등이 담겨있다. 어째서 우리 사랑은 그런 것일까? 어쩌면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을 관통하기 때문은 아닐지. 인간이란 연약한 존재이기에, 사랑이 인간의 연약함을 관통하다 보니 그토록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는 것은 아닐지.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한 실패와 상처와 아픔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성장하고 영글고 익을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실패한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랑은 연약함을 관통하기에, 우리는 시련의 순간들을 겪고 이겨내며 계속해서 무르익고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워했던 것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신자들의 사랑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순수한 사랑, 보답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랑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먹고 살아왔다. 그 사랑이 우리를 먹여주었고, 양육시켜주었다.
물론 그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기에, 순수함이 바래지고, 여러 이유로 시련을 겪는다. 서운함과 배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고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약함을 지닌 채 사랑해 왔다는 것을 결국은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차원의 사랑을 바란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나의 편이 되어주는, 나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고, 한없는 위로로 나와 끝까지 함께하는 사랑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아왔음을 깨닫는다. 특히 삶에 큰 위기나 시련이 닥칠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허탈함과 우울감에 휩싸일 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곁에 계시며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발견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작은 아들은 돼지를 치면서 자기 곁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지도,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다. 누군가 관심을 갖고 먹을 것을 줄 때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배고픔이 아닌 바로 사랑의 배고픔이다. 작은 아들은 그러한 사랑을 간절히 바랐고, 그제야 아버지 집에서 받았던 사랑, 품팔이꾼조차 먹을 것이 남아도는 ‘흘러넘치는’ 사랑을 떠올렸다. 그 사랑이 자기를 이제껏 살게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조건을 달지 않으신다. 마치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요 기쁨인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저 있는 자체로 당신 마음에 들기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소중히 보살펴주는 사랑, 바로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돌아와 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아들을 받아준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신다. 추궁하거나 따지지 않으신다.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제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간절한 열망의 대상인 바로 그 사랑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75)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사랑의 논리, 무상의 논리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 말씀은 교회 내에서 봉사하는 분들뿐 아니라 유용성(有用性)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우리 사회에 많은 생각 거리를 준다.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답이 있어야 움직이고, 보답이 없으면 서운해하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기쁠 때는 보답을 받았을 때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했을 때가 아닐까.
부모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보고 기뻐한다. 보답을 기대하며 아이에게 사랑을 쏟지 않는다. 아이의 웃는 모습 하나로 아이를 키우느라 마음 졸이던 순간, 애쓰던 마음, 고통스러운 기나긴 밤들, 그 모든 노고와 힘겨움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거저 줄 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줄 때 얻어지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사제 양성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신학생들이 신학교 양성과정을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는 순간이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기도드릴 때, 제의를 입고 제단에 올라 미사를 집전할 때. 그저 성장해준 학생들에 고마워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상성(無償性)·보답을 바라지 않고 거저 베풀어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이자 덕목이 아닐까 한다.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경제라는 잣대로 판단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사람조차도 경제 논리로 판단한다. 내가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고 주었으면 받아야 한다. 이자까지 쳐서 더 받아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삶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것은 경제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 무상의 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은 마음을 담은 작은 배려, 작은 관심, 작은 말 한마디일 것이다. 그것은 돈이 들지 않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고 살아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건네는 사랑이며 베풂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연결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힘이 빠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지며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 조금씩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 의욕이 사라지며 삶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유용성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만큼 값을 쳐주신다. 수고한 삶을 축복해주시고, 허물로 얼룩진 삶은 씻어주신다. 어쩌면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됨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쓸모없는 존재를 필요로 하신다. 그들 안에서 더 큰 힘으로 활동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한다. 쓸모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늘 하느님께 열려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 베풀 줄 안다. 하느님께서 쓸모없는 존재를 사랑하시는 이유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이것이 오늘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눈떠야 할 가치가 아닐까. 우리가 쓸모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느님 눈에 기쁨이 되며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영성심리 칼럼] 멈추어 서다
얼마 전 서울 근교 성지를 순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지 미사에 함께하는데, 성지 담당 신부님께서 한국 교회 초창기 교리서였던 《요리 강령》의 내용을 중심으로 십계명의 제3계명을 주제로 강론해 주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이지요. 지금은 ‘주일’이라는 이름만 남았지만, 예전에는 주일을 다양하게 불렀다는 것, 주일미사 참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침·저녁기도를 빼먹으면 밥도 먹지 못했던 당시 신앙인의 모습을 구성지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구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자랐지만, 예전 어르신들이 받았던 만큼 엄격한 신앙 교육은 아니었습니다. 성지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한국 교회 신자들께서 정말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옅어지는 듯한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박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오륙십여 년 전의 옛 어르신들께서 어떻게 그렇게 사셨을까 궁금했습니다.
삶이 풍족하지 않아서였을까요? 결핍,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아서, 나 혼자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어서 더 하느님을 찾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뭐가 또 있을까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삶의 단순함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를 사셨던 분들도 바빴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때와 다르게 오늘날 우리 삶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복잡다단한 삶입니다. 단순히 바빠서 하느님 찾을 시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의 생각과 관심, 의식을 사로잡는 대상이 너무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모습 역시 ‘인간’이어서 겪게 되는 약함이자 한계입니다. 원죄 이후의 우리는 모두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을 띠고 있어서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 나에게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 지금의 본성에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쉼 없이 생각하고 재고 준비하는 우리 의식에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틈이 없습니다.
답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있다 싶습니다. 전문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까지는 못 되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가쁜 호흡을 멈추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생각(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저 밑바닥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는 마음(무의식)으로 내려가 잠시 멈출 때, 비로소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신앙이, 단순한 신념이나 가치관이 아닌 삶 자체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삶의 형태가 복잡다단한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걸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안에서 잠시 멈추어 설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참으로 원한다면요.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60) 나약함으로 바라보는 우리 삶
나약함을 안고 완덕을 향해 조금씩
하느님 자녀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시편 저자의 다음 말씀에도 같은 경험이 배어 있다.
“젊은이가 무엇으로 제 길을 깨끗이 보존하겠습니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시편 119,9)
나약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말씀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요, 삶의 전반적 기획인 신앙이 인간의 나약함을 관통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나약함은 부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사정이 그렇다면, 나약함 없는 완전무결한 신앙이 아닌 나약함을 안고 계속해서 완덕을 향해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 아닐까.
그런데 실은 신앙만이 아닌 우리 삶 전체가 나약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러하다. 우리는 배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던가.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얼마나 나약한가. 그런데 그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강한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의 기쁨」 113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빛과 그림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저는 상대방의 사랑의 진가를 알려면 그 사랑이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이라거나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고 현세적이라고 하여도 그 사랑은 참된 것입니다. (⋯) 사랑은 불완전함을 지니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에 담긴 ‘한계’, ‘완벽하지 않음’, ‘불완전함’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부부만이 아니라 수도자나 사제도 마찬가지다. 각자 신앙을 살면서 자신의 한계,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경험한다.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우리를 성화시켜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걷는 신자들의 기도와 응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나약해도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이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나약함을 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시고, 바로 그 나약함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늘 새로운 시작을 알리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걷자고 제안하신다.
우리의 나약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 삶은 전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하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했던가.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나약하고 한계 지어진 우리 존재 자체가 선하고 아름다우며, 하느님의 눈에 고귀한 존재라고 말이다.
우리는 약하다. 상처 입기 쉬운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약해도 된다. 그런 존재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고 치유하시며 함께 걸으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새롭게 창조하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랑, 상처 입을 것을 무릅쓰는 사랑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랑이시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와 함께 늘 새롭게 시작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내맡기며, 용기를 내 앞으로 발을 내디디면 된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