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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서도면 민통선 지역, 미지의 섬 말도에 가다
인천 강화군 서도면의 가장 끝 섬인 ‘말도(唜島)’는 북한과 초 접경지역에 위치한다.
민통선 지역으로 교통편은 행정선밖에 없고 그 배가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행정선은 월, 화, 목, 금요일 등 4일만 운행한다. 출입이 쉽지 않은 섬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출발 전부터 설렌다. 아차도, 볼음도, 주문도 다음 맨 끝에 있어 ‘끝점’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북녘 연백평야가 바로 눈앞에 마주한다.
▲ 말도 마을 전경
▲ 말도의 엉겅퀴는 도심의 엉겅퀴보다 키도 훨씬 크고, 꽃 색깔도 선명하고 예쁘다.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역이라 약간 긴장이 되고 정전상태의 우리나라 현실이 체감으로 느껴져 살갗에 소름이 돋는 떨림으로 다가온다. 김진복(55) 선장이 운행하는 행정선인 강화단군아라호를 타고 뱃멀미 없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말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마침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주민인 김정만(71) 씨를 만나 말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경기도 안산이 고향으로 활어 장사를 하러 들어왔다가 어로 작업을 할 수 없어 24년째 벼농사와 밭농사를 하며 아내와 살고 있다. 벼농사는 저수지와 지하수를 이용하고 있으며 쌀은 전량 정부에서 수매한다. 말도에서는 3가구가 벼농사를 하고 있으며, 그 규모도 상당히 넓다. 밭농사는 판로가 마땅하지 않아서 이웃과 나누어 먹고 산다고 아쉬워한다. 섬에서 살며 교통편이 가장 불편하고 좋은 점은 공기가 맑다고 전한다.
▲ 말도 주민 김정만씨는 경기도 안산이 고향으로 활어 장사를 하러 들어왔다가 어로 작업을 할 수 없어 24년째 벼농사와 밭농사를 하며 아내와 살고 있다.
▲ 말도 주민 김정만 씨 부인인 윤남란 씨.충남 홍성이 고향인데 15살에 인천으로 올라와 주안 5,6공단에서 일했고, 17살에 연애결혼을 해 남매를 낳고 정육점도 운영했다.
마을에 들어서니 윤남란(69) 씨가 허리만큼 자란 시금치 밭의 풀을 매고 있다. 허리가 아파 붕대를 하고 앉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자세로 일을 한다. 좀전에 만난 김정만씨가 남편으로 섬이 좁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데 15살에 인천으로 올라와 주안 5,6공단에서 일했고, 17살에 연애결혼을 해 남매를 낳고 정육점도 운영했다고 자신의 삶을 밝힌다.
말도에 들어와 겪은 가슴 아픈 일은 말로 다 못 한다. 몸이 아플 때 바로 병원에 갈 수 없어 배를 불러야 하는 게 제일 불편하다.
▲ 말도의 최고령인 김근동 옹. 그는 군대를 간 것 빼고는 말도를 떠난 적이 없으며 1950년대 전 만해도 80가구가 사는 섬으로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김근동(83) 할아버지가 말도의 잘나가던 시절 이야기를 해준다. 군대(강원도 원통)에 간 세월 빼고는 말도를 떠난 적이 없다는 그는 영흥도에 사는 아가씨와 중매로 만나 슬하에 팔 남매를 두었다. 말도는 6.25 때도 피란을 따로 가지 않았고, 전쟁의 포화도 없었다. 교동에서 좌익이 배를 타고 들어오면 슬픈 노래를 부르는 암호를 정해 태극기를 얼른 내려 감추었다. 80가구가 살았을 때는 젊은이들이 많아 좌익들이 왔다가도 얼씬 못하고 도망갔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당시엔 민어, 숭어, 농어, 가오리, 꽃게 등이 쉽게 잡혀 섬에 돈이 잘 돌았다. 당시는 교통도 괜찮아 기생집이 15곳이 있었고 사람도 북적이며 고기도 잘 잡히는 섬이었다. 말도의 황금기였다.
기생집에서 켜 놓은 전등이 섬을 환하게 밝혀
일제 때나 6.25 전쟁 당시 말도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섬이었다. 밤이 되면 술집 전등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지금의 한적한 섬의 모습과는 상상이 안되는 옛 이야기다. 6.25 이전 까지만 해도 고기가 잘 잡히는 풍요로운 섬이었나 전쟁과 분단으로 섬이 쪼그라든 것이다. 현재는 15가구 20명 정도가 산다.
▲ 1965년 강화군 어민들이 집단으로 납북된 사건이 발생하자 남북은 더 긴장상태에 놓였다. 정부에서는 말도에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두집의 지붕을 하나로 연결한 집’을 지어 주민들을 살게 했다. '두 집의 지붕을 하나로 연결한 집'은 현재 6채가 남아있다.
섬은 최전방에 위치해 아픈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65년 강화군 어민들이 집단으로 납북된 사건이 발생하자 남북은 더 긴장상태에 놓였다. 정부에서는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두집의 지붕을 하나로 연결한 집’을 지어 주민들을 살게 했다. 현재는 많이 없어졌고 6채만 남아 있다. 한 가옥에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이 살림할 수 있게 만든 구조였다. 남아있는 집 구조를 들여다보니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느낌이 든다. 섬은 북한과 초접경 지역에 있다보니 실향민들이 망향제를 지내로 자주 들어왔다. 지금은 많이 뜸해졌다고 한다.
섬은 보통 물 사정이 좋지 않은데 말도는 물이 풍부하고 지하수의 물맛이 특별하다. 주민들은 수돗물을 그대로 마신다. 또 지하수와 저수지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니 다행이다. 마을 이장을 했다는 홍근기(61) 씨의 소개로 지금은 폐교인 말도 분교 터에 가니 칠판도 뜯겨있고 교실 마룻바닥은 썩어가는지 시큼하다. 운동장에는 각종 폐자재가 가즉 쌓여있어 세월의 무상함만을 느끼게 한다.
▲ 쌍바위는 말도의 명소다. 쌍바위의 왼쪽 바위는 여자처럼 수줍어하는 모양이고 오른쪽 바위는 어느 쪽으로 보아도 남자 얼굴 형태라고 한다.
“이 섬에 가진 것은 인심밖에 없어요. 내가 손해 본 듯 살아야 편하지요.”
라고 말하는 홍근기 씨가 쌍바위 쪽으로 안내한다. 쌍바위는 이 섬의 명소다.
쌍바위의 왼쪽 바위는 여자처럼 수줍어하는 모양이고 오른쪽 바위는 어느 쪽으로 보아도 남자 얼굴 형태라고 설명한다. 예전엔 주민들의 운송수단으로 볼음도와 말도를 매일 운항하던 평화호가 다녔다. 옛 선착장에 가보니 시멘트 바닥이 깨져 철근이 나와 있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옛 말도에서는 고려청자를 구웠던 가마터가 남아있다. 산 중턱에 있었다는 가마터인 ‘요골’은 흔적없이 풀만 무성했다. 기단은 있지만 가마터의 흔적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땅이라도 한 번 파 보면 사금파리 몇 조각 정도는 나오려나?
▲ 말도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해수욕장.
말도 전망대에 가니 낭떠러지 아래로 바다와 선착장, 해수욕장이 저멀리 보인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특히 석양이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라니 하룻밤 묵으며 일몰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일렁인다. 남북이 통일되면 말도는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섬으로 인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통이 편리하면 살기에도 좋을 것이다. 어느 섬에나 아이들은 없고 60대가 막내라는 소리에 서글프다. 그분들마저 돌아가시면 혹시나 무인도가 되는 것은 아닐지?
‘대한민국(남조선)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단추를 누르시면 안전한 지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북한과 초 접경지역에 있는 말도에 북한군이 귀순할때 사용할 수 있도록 부름종이 설치되어 있다.
▲ 말도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
귀순하려는 북한 주민이나 북한군에게는 단비 같은 안내판 글귀가 보무도 당당하게 서 있다. 문득 유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와 면회도 안 되는 말도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의 장병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평화 통일이 하루빨리 와서 말도의 교통 환경이 편하게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노래해 본다.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돌아오는 배 안에서 멀어져 가는, 남겨진 말도가 두고 온 가족처럼 애잔하다.
글· 사진 현성자 i-View 객원기자
말도에서 만난 사람들 ①
낙도에 사는 주민들 도울 때 가장 보람
강화단군아라호 김진복 선장
강화 말도로 가기 위해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단군아라호’에 탑승했다. 행정선인 이 배는 김진복 선장(55)이 키를 잡고 있다. 30년 넘게 행정선을 운행하고 있는 김선장의 주된 업무는 도서지역 섬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이다. 특히 풍랑주의보가 발생하거나 야간에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닥터헬기도 뜨기 어렵기에 행정선이 바로 출동해 환자들을 수송한다.
▲ 강화군청 소속 단군아라호를 운행하고 있는 김진복 선장과 직원들. 왼쪽부터 하태영 통신장, 차전재 기관장, 김정호 항해사, 김진복 선장.
“척박한 환경에 살고 있는 도서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이 크지요. 야간에 위험을 무릎 쓰고 병원으로 수송해 드린 주민들이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실 때 일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단군아라호 행정선은 4명이 한 조를 이뤄 일한다. 이들은 배로 출근해서 배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다. 선장, 항해사. 기관장, 통신장이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배의 안전과 신속한 업무를 처리한다. 단군아라호에는 김정호(29)항해사, 차전재(29)기관사, 하태영(59)통신장 등과 함께 안전한 배 운항과 주민들의 편리한 섬 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말도에서 만난 사람들 ②
주민들의 손발이 되는 행정선 운행 더 늘려야
홍근기 전 말도 이장
말도에서 6년간 이장일을 보았다는 홍근기(61) 전 이장. 97년 처음 방문했을때 훼손되지 않은 섬이 너무 아름다워 반했고 2013년 귀농·귀어교육을 받은 뒤 아예 정착했다. 말도는 희귀·약용식물이 많고, 보존해야 할 나무들도 많은 귀한 섬이라고 전한다.
▲ 홍근기 전 말도 이장
옛날 말도는 상업과 물류의 요충지이자 중국 사신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첫 경로였다. 말도를 거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기에 사신들은 말도~석모도~강화도를 거쳐 서울로 향했다. 또 서울의 마포나루, 제물포로 올라가는 물류의 경유지였기에 상업이 발달한 섬이다.
말도 요골에서는 북한과 거리가 6.5㎞에 불과하다. 바다너머로 황해도 연백이 희미하게 보인다. 민통선 지역이다 보니 주민들의 삶에 불편한 점이 많다, 저녁 8시 이후엔 해안가 출입이 제한된다.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이 가까이 없는 것도 섬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아픈사람이 생기면 행정선을 타고 석모도에서 앰블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응급상황인 경우는 주문도까지 간 뒤 닥터헬기를 타고 인천 길병원으로 옮겨진다.
“현재 행정선이 월·화·목·금요일 4일만 들어오는데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배가 들어와 주민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배가 자주 들어오면 섬에 더 활기를 불어넣을 것 같고, 막혀있던 어업도 재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 말도 들어가려면
말도에 들어가려면 하루 전 강화군 서도면사무소로 입도요청을 해야 한다. 행정선의 정원은 12명이다. 행정선은 보름도에서 출발한다. 강화 선수선착장에서 보름도 가는 배를 탄 뒤 보름도에서 행정선으로 갈아탄다. 말도까지는 40여분 걸린다. 행정선은 월, 화, 목, 금요일 4일만 운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