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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인식으로 본 현대시의 양상과 그 의미
- 새로운 인간의식, 새로운 사물의식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스피어즈는 현대의 특성을 '단절'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단절'이란 어떤 대상과도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모든 사물들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설 맺고 있던 관계를 상실하고 하나의 원자적 개체가 되어 존재함을 말한다. 일종의 불연속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소외라고 불러왔다.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특성이 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피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현대인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단절의 공간이라면, 그 공간을 시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형상화하는가로부터 우리는 시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다.
II. 새로운 인간의식, 새로운 사물의식
시는 대체로 세상 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시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시인은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시창작은 세상을 읽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창작은 대체로 세상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시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시인은 사회 현상이나 자연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래 발길로 차며
- 김광균의 <추일서정> 일부
이 시는 도시 문명에 의한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시다. '급행차'와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지붕'과 '꾸부러진 철책'에 대한 표현은 모더니즘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표방하는 도시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라는 개념은 산업화 이후의 도시화된 인간의 삶 양식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상업화, 도시화 이후의 인간의 삶을 집약하는 말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 소외의 현상이다.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분업화로 인한 일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이것을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리는 것을 '담배연기'로, '공장의 지붕'을 '흰 이빨을 드러내인'으로, 꾸부러진 철책'을 '바람에 나부끼고'로 각각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시적 자아와 거리감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어, 이 거리감 자체가 현상적 세계로부터 자아의 소외 현상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 김종길의 <성탄제> 일부
이 시는 옛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시인이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다. 즉 이 시의 주제는 현재 도시의 삶 속에서 옛날의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를 시인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붉은 산수유 열매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편리한 삶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결여된 오늘의 현실을 과거의 농촌 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따뜻한 사랑이 있었던 것과 대비시켜 넌지시 비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시는 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엘리베이트 거울 앞에서 주름진 얼굴과 희긋희긋하게 돋아난 흰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애써 달려온 삶이 어느 날 공허하게 느껴지는 그 범상인의 감정은 보지 않아도 될 거울을 보게 되는 도시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직장일로 지치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바라본 거울,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젊은 날 땀흘려 맹렬하게 살던 노력들이 한갓 쓸쓸함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현대 사회의 특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되는 그 스산한 삶의 과정을 진경옥은 놓치지 않고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쉬지 않고 흐를 것이다 / 11월의 달력이 또 찢겨 나가고 / 그득하던 들판도 비어 / 흙빛이 될 것이다. / 낡은 겉옷을 걸치고 / 주머니에 넣어보는 걸끄러운 손 안에 부스스 마른 잎이 몇 장 그나마 으스러질 것이다.
- 진경옥의 <겨울 생각> 일부
한 계절이 아니면 한 해, 그것도 아니면 어느 시간적 단위를 끊어서 그것을 보내는 것은 비애다. 그리고 우수다. 그 비애와 우수의 이미지를 겨울에서 끌어오고 있다. 겨울은 어둡고, 겨울은 불안하고, 겨울은 절망적 이미지를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심상, 으른바 원형적 심상이다. 이 원형적 심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11월'과 '흙빛'과 '마른잎'의 이미지가 바로 시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관과 독자의 세계관에서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의미망이다. 그는 현대적 심상을 시화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적 인간의 특성 중에 큰 하나가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의 감정은 불안과 공포와도 오버랩된다. 싸르트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을 표상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로움의 구체화로서 방랑을 들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있듯이 방랑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다. 미로를 가고 잇는 인간의 모습이 때로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데서 그의 세계 인식은 현대적 특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경옥은 방황하는 자아, 방황하는 동시대인의 삶을 '수묵화'라든지 '운무'와 같은 낱말을 구사하면서 적절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낮불을 켜고 / 수묵 속을 달린다 / 길은 간 곳이 없고 / 폭우와 운무 / 길 없는 길을 가며 / 수묵화로 젖는다 / 이정표도 다 지운 장대비 속을 / 하늘에나 걸리듯 / 아슬한 질주 /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간다
- 진경옥의 <내륙행, 길 없는 길> 일부
'낮불'은 시인의 공포의식과 접합되어 길 찾기의 방안으로서 제시된 단어다. 어두운 낮의 불이 필요하다는 정신적 갈구는 현대인의 방황의식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겹겹의 산 속에서 폭우와 운무 속을 헤매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잇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방향 상실이 수묵화로 침잠하면서 어두운 백주에 '낮불'을 켜드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도, 또 생각하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산 속에서의 방황은 단순한 체험으로서 시의 재료에 머물지 않고 시로서 승화되는 것이다. 현대적 삶이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득한 질주'이거나 또는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가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산 속의 방황이 삶의 모습임이 <내륙행, 운무 속으로>란 시에 잘 나타난다. 겹겹 산중, 끝없는 안개, 거기다가 밤은 깊어지는데 길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행로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심리 또한 살아있는 사람의 심리다. 그러나 가고자 한다고 해서 어디나 함부로 갈 수도 없는 현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강은 흘러서>란 시에서는 이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현대로 오면서 단절이 우리들의 삶의 특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요구한다. 그것은 19세기적 인간관을 벗어나 소위 20세기적 인간관을 형성한다. 19세기 인간관이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인간은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다. 다윈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 사이에는 어떤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적 삶의 투쟁 원리가 그대로 인간적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삶의 하부구조가 삶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논리나 역사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 결론은 동물적 삶과 인간적 삶의 동일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전복된다.
이제까지 한결같이 수용되던 소위 자연과 연속된 존재로서의 인간,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온 인간이라는 개념을 벗어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정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식, 모든 사물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으로 불연속성, 곧 단절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송유미는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란 시집에서 인간의 순결함을 보증할 현실이 없다는 인식에서 자기만의 위안의 세계를 찾고 있다.
강물이 저렇게도 유유히 흐르는 건
붙잡고 끙끙대며 앓은 일 없기 때문
살면서 흘려보내지 못한 것들 몇이랴
나무는 빈 몸으로 나무 木 필사하고
바람은 얽힌 매듭 풀리어 방목하니
일체를 내려놓아야 가벼운 걸 어쩌랴
강물이 저렇게도 편안히 흐르는 건
쟁이고 쌓아둘 것 맘속에 없기 때문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
- 최재선의 <강물을 보며> 전문
현대인은 '집착'으로 대변되는 ‘욕심’ 때문에 ‘단절’과 ‘소외’라는 현대성의 공범자들이다. 특히 유희적 인간은, 대다수 도구적 이성에 매몰되어 물질적 욕망의 주체로서 어떻게든 성공을 향해 노를 젓는다. 이런 모습들이 최재선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는 유쾌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의 성공이 아닌 너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비움의 철학을 향유할 때 비로소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갈 수 있음을 설파한다. 물론 여기서도 언어놀이는 계속된다. ‘나무는 빈 몸으로 나무 木 필사하고’에서 ‘나무 木 필사’는 ‘빈 몸’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경험적으로, 그 필사되는 한자는 신체적으로 선명하게 독자의 시선을 독점한다.
그는 비워냄과 성찰의 소중함을, 모성과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대학 교수로서, 글쓰기지도에 매진하면서 어느덧 중년의 계절을 맞고, 강물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공허와 우울한 그늘을 보게 되지만, 자주 찾아가는 강가에서 시조를 만나면서 생의 방향성을 확보한다. 채움과 쌓음에 종지부를 찍고 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한 다음, ‘비움’에 대한 찬가를 쓴다. “강물이 저렇게도 편안히 흐르는 건/ 쟁이고 쌓아둘 것 맘속에 없기 때문/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에서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는 작가의 말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지만, 공간 인식은 단절과 소외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겠다.
사는 게 낭떠러지 끝자락 같아 뵐 때
담쟁이 무성한 벽 퍼렇게 읽어보라
단 하나 평탄한 곳에 대충 살고 있는지
한숨이 움칫움칫 줄지어 나올 때에
수직을 고삐 쥐고 오르는 집념 보라
단 하나 게으름 피며 절망하고 있는지
- 최재선의 <담쟁이> 전문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 시인은 ‘담쟁이 무성한 벽 퍼렇게 읽어보라’고 한다. ‘무성한’이란 형용사와 ‘퍼렇게’라는 부사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웅크리고 있다. 최 교수는 수직과 수평을 교차시키면서 수직의 벽을 통해 안이함과 대충으로 상징되는 게으름을 질타하고 있다. ‘단 하나’는 절실함을 그려내는 어구다. <담쟁이>는 몰려드는 내면의 물음들을 접하고,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한숨이 움칫움칫 줄지어 나올 때’가 절창인 이 작품은 자기발견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불현듯 나더러 스무 살로 돌려준다면
덥석 받아 안을까 푸른 봄 다 준다면
그 봄 다 어쩔 것인가 누가 다시 돌려준다면
밤하늘 북두칠성 북극성에 소처럼 매여
오금을 못 편 채로 풀잎이나 뜯을 때에
명줄에 꿰인 가난이 죄지은 듯 죄인 듯
- 한분옥의 <슬픔 한 벌> 전문
시를 쓴다는 것은 시적 대상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와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를 탐문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학자나 심리학자가 하는 탐문과 시인의 탐문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감정에 속하는 ‘슬픔’을 보이게 하기 위해 ‘한 벌’이라는 계량명사를 빌려왔다. 이때 한분옥 시인은 시적 대상인 ‘슬픔’을 가시화한 기표 안에 기의를 감추고자 우회적 양상의 언술 양식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이를테면 ‘불현듯 나더러 스무 살로 돌려준다면’이란 가정법을 내세운다. 단순하게 전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덥석 받아 안을까’ ‘그 봄 다 어쩔 것인가’하면서 두려움을 내비친다. 처음에 세웠던 가정법 조건절을 1연의 종장에서 다시 내건다. 그만큼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이다. 돌려주는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여기서 ‘스무 살’은 ‘푸른 봄’으로 전치되는데, 봄은 한 번씩 순환하듯 오기 때문에 이런 전제는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부분 또한 한옥분 시의 멋이고 맛이다.
둘째 연은 첫 번째 연의 전제에 대한 귀결절인데, 시인은 그 푸른 봄을 그냥 덥석 받아드리지 못할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데, 여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명줄에 꿰인 가난이 죄지은 듯 죄인 듯’에서 망설이는 연유를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가난’이다. 지금이 무슨 시대인가. 자본주의시대가 아닌가. 돈이 없으면 연애도 못하고, 사랑도 오래 지키지 못한다고 여긴다. ‘밤하늘 북두칠성 북극성에 소처럼 매여’에서 북극성의 소는 ‘야간 통행금지’를 의미하고, 이는 가부장제 하의 우리 사회 보수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오금을 못 편 채로 풀잎이나 뜯을 때’는 우리 사회에 항존하는 여성과 남성의 이중적 잣대와 운명적인 가난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지만 아직도 일부 가정 또는 시적 화자의 의식에 남아 있는 여성의 비주체성에 대한 자학적 비판일 수가 있겠다. 진실한 마음만으로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많은 건, 슬픈 현실이다. ‘슬픔 한 벌’은 외관으로 보일 것 같지만 입으면 슬픔이란 관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횡포에 좌절하는 시인의 슬픈 현실을 ‘한 벌’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누가 있어
갈 길을 일러주나
나 홀로
저문 곳에 와 보니
알 길이 없네
그 먼 길 아득하여도
꿈을 찾아 가겠네
- 한신디아의<꿈길> 전문
위의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저 새는 누가 있어 갈 길을 일러주나’와 ‘나 홀로 저문 곳에 와 보니 알 길이 없네’ 사이에 놓인 대조적 상황이다. 1연에서 볼 수 있듯이 새는 동물로서 인식 능력도 없고, 인간처럼 내비게이션도, 지도도 미래를 보는 안목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갈 길을 알아서 잘 가는데, 인간은 홀로 어두운 곳에 서면 갈 길을 잃어버린다는 역설적인 상황 인식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새와 비교대조해서 잘 전해주고 있다. ‘독불장군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바로 ‘나 홀로’라는 어구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문 곳’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저문 곳’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먼 길 아득하여도 꿈을 찾아가겠’다고 하는 데서 이 시가 주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생은 아름다운 것만도 슬픈 것만도 아니고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이다. 생은 황홀한 것만도 저주스러운 것만도 아니고 황홀하기도 하고 저주스럽기도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랜 관습과 문화 교육 등의 영향으로 인간중심주의 속에서 성장해왔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세계관으로 뭐든 다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어서 동식물 같은 타자를 우습게 봐온 터다. 그리하여 화자는 관습과 상식에서 선택되어 온 아름다움과 우월성보다 비교를 통해 알게 된 인간의 한계를 끌어안는다. 가야 할 길이 아득하고 멀어도 꿈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생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화자가 ‘꿈을 찾아가겠네’라고 노래하는 것이 그 여실한 모습이다. 힘든 길을 통과한 뒤의 생명과 빛의 세계, 눈물과 고통을 통과한 뒤의 웃음과 환희의 세계는 이상적인 꿈의 세계이다. 인간은 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이 시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꿈을 가져야 함을 말해준다.
단단한 줄기로 선 나무로 살고파서
바닥을 뚫고 뚫어 뿌리를 뻗어갔네
이렇게 살아가 보면 나아질 날 있겠지
내 것이 될 수 없는 기막힌 부러움이
구겨진 마음 되어 길가에 몸져눕고
그래도 보잘 것 없어 진물 되어 흘렀네
한때는 안아주고 어르던 잡풀에게
마르고 비틀어진 풀냄새 역겹다며
풀잎을 나뭇잎이라 속여 가며 살았네
나에겐 겨울바람 이겨낼 기력 없어
찬바람 설 불어도 꽃눈물 떨어지네
이렇게 단잠이 들면 다시 설 수 없겠지
나무의 잎을 닮은, 나무의 뿌리 같은
가슴에 멍이 들어 풀죽은 어느 길가
한 그루 끝 간 데 없이 숨어 맺는 풀나무
- 한신디아의 <초수> 전문
‘초수’의 사전적 의미는 ‘풀과 나무’를 가리키나, 시인은 위 시에서 ‘초수’라고 쓰고 ‘풀나무’라고 읽고 있다. 다시 말해 풀과 나무 두 가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은 되기 싫어 나무 행세를 하고 있는 풀나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외국인으로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으로 귀화까지 했는데도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풀나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떻든 ‘풀나무’는 상징으로서 다의적 속성을 갖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작품의 화자는 초수를 ‘나무의 잎을 닮은, 나무의 뿌리 같은/숨어 맺는 풀나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를 닮은’ ‘~와 같은’ 것은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자기로 명명 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아웃사이더 또는 타자는 주체 중심의 이분법이 대세인 현대 모더니즘 사회에서 상처받고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슴에 멍이 들어’라고 단언한다.
초수는 그와 같은 인식으로 ‘마르고 비틀어진 풀냄새 역겹다며 풀잎을 나뭇잎이라 속여 가며 살았’다고 반성하고, ‘내 것이 될 수 없는 기막힌 부러움’ 때문에 상처받아 ‘구겨진 마음 되어 길가에 몸져눕고’ 그래도 ‘보잘 것 없어 진물 되어 흘렀’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대목은 시적 대상의 자기반성인데, 화자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에 두면서도 초수 자체에 책임 일부를 두기도 한다. 자신에게는 ‘겨울바람 이겨낼 기력 없어 찬바람 설 불어도 꽃눈물 떨어’진다고 슬퍼한다. 위의 작품에서도 출신이나 배경 때문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류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풀나무에 비유해서 잘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그 모순적 현실의 고발을 통해 삶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일상적인 지각이나 상식을 뛰어넘어 생을 영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생을 영위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본질을 보여주는 현대시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 서정춘의 <죽편竹編 1 –여행> 전문
‘칸칸이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너무 닮았다. 대나무 마디마디가 기차의 칸칸이고, 대나무의 칸칸은 텅 비어 있고 어둡다, 시인은 어둠을 ‘밤이 깊은’으로 보수했다. 푸른 기차는 대나무를 비유한 것이다. 기차의 수평과 대나무의 수직을 교직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수직과 수평에 담았다. 인생의 종착역을 ‘대꽃이 피는 마을’로 표현한 대목도 기가 막힌다. 대나무가 꽃을 피워내기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 또한 성공적으로 살아내기 힘들다는 의미가 아닐까. 첫 행에서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 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쉼표와 하이픈이란 문장부호를 절묘하게 이용하는 전략도 성공적이다. 첫 행의 ‘멀다’를 마지막에 가서 ‘백 년’으로 구체화한 마무리도 좋다. 한마디로 압축미의 극치를 보여준 시다. 그는 혼자 여관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등등 온갖 상념으로 일곱 시간을 뒤척이다,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단절의 시구가 번개같이 떠올라 그걸 여관방 벽에 썼다고 한다.
원래 초고에는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고 한다. 25행의 시는 객관화가 안 된 그야말로 주관적 정서로 쓰인 시였을 것이다. 시인은 순간 떠오른 직정을 객관화하기 위해 4년 동안을 다듬었고, 80번 이상이나 고쳤다고 한다. 정서의 객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1941년 전남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해서 독학으로 시의 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신문배달을 하다 우연히 집어든 영랑과 소월의 시집을 밤새 필사하며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까지 한시와 선시를 탐독하며 앞선 이들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고두현 시인의 인생여정과 많이 닮았다. 그도 초중은 집이 없어 절간에서 보냈고, 대학은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어 나왔다. 남해의 풍광을 묘사한 <남해시첩>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신문배달이란 ‘궁’의 상황이 신춘문예를 관통하고 명시를 낳는 데 기여하는 것을 보면, 단절과 소외의 이격에서 오는 ‘시궁이후공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가슴에 묻은 아가의 얼굴이 북두칠성이 되어 반짝인다 / 그 어느 것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은 잠이 들었다 / 잠이 들었거든 깨어나 나의 괴로움이 되지 말고 / 이미 세상의 그 어디에도 나의 길은 무너져버렸다면 / 갑산으로 가는 길조차 폭설에 덮였으리라
- 송유미의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일부
이처럼 순결함은 자아와 세계를 단절시킨다. 세상의 것들, 인간을 포함한 사회 제도 온갖 인공적인 것들은 자아의 순결함에 대한 충분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길은 무너지고 가야 할 길은 폭설로 가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존재의 내면은 고갈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잃은 자아의 고립주의는 가중된다.
여기는 지상의 천국 / 숨쉬는 존재는 당연히 없다 / 여기서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 계산되고 있다 정보를 교환하는 신과 인간 // 유한(1)과 무한(0)이 만들어내는 / 무가치한 존재의 더미 / 전세계의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듯이 / 묘지가 자리 넓혀 지구를 뒤덮고 있다 / 비석도 없는, 생몰년대도 모르는 / 주검들, 주검의 산, 산맥
- 이승하의 <이 거대한 세기말 병동에서 9>
시인은 현대를 특히 세기말을 '거대한 병동', 즉 환자들이 사는 곳으로 파악한다. 그 환자들인 인간 존재의 모습을 매우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숨쉬는 존재가 없다. 주검들의 산맥 같은 구절들이 이것을 잘 말해 준다.
숨차하는 만년필아 / 앙상한 뼈가 드러나는 말라빠진 종이야 / 내 목구멍에서 몰아치는 탄식 때문에 /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 채호기의 <수련> 첫 연
채호기는 '수련'을 통해 세기말의 불길한 징후를 읽는다. 우울한 어조로 현대적 특성인 단절과 불안, 소외를 함축하고 있다. '숨차하는 만연필', '말라빠진 종이' 등의 시적 수사는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세계 안에 놓인 대상을 비틀어 보는 시인의 시각에서 비롯한다. ‘숨차하고’ ‘말라빠진’이라는 관형어가 결코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 인식의 소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들은 대부분 오늘의 세계에 대해 많이 실망하고 부정하고 절망하는 것 같다.
III. 로그아웃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을 직접적인 시의 대상으로 삼되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미적으로 응시하는 현대 시인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시를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가슴에 문을 닫고 나와 나, 나와 식물, 나와 동물 사이에 벽을 높이는 단절의 공간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시인은 가슴과 눈을 열어 세상이 보내는 발신음을 듣고자 세계 속에서 언제나 내포적 자아를 취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형상으로 다가오는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사물의 속살을 환히 볼 수 있는 시안을 가졌기에 시인이 창조해낸 생산물은 결코 예사로울 수가 없다.
현대 시인 역시 시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의 시들은 사물이 주는 상황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단절과 소외의 상황을 화해의 구도로 응축되는 ‘공존’의 미학으로 승화시켜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식, 새로운 사물의식은 현대시가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양상이다. 시는 20세기에 오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그때까지의 결정론적 태도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현대의 특성인 단절의식은 결국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연결되고, 결정론적 태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의의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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