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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부활절 특강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눅7:1-17
요절/눅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Happy easter!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은 부활절 감사예배로 드립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백부장의 죽어가던 종을 낫게 해주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또 과부의 독자인 죽은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죽음의 세력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사건을 통해 주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이 어떠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생명 그 자체이시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엔 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의 고급 군대장교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던 이 백부장은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보내 예수님이 오셔서 그 종을 살려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가 직접 예수님께 나오지 않은 것은 백부장이 무슨 대단한 지위라서 권세를 부리느라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유대문화를 잘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인 자기는 유대인인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의 일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유대인 장로라면 누구보다도 이방인과의 관계를 꺼려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의 일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큼은 꼭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백부장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사랑이 많고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시대 기록에는 항해할 때 배가 위험하면 물건 대신 종으로 부리던 노예들을 바다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종을 그는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내다 버리지 않고 어찌하든 살리려고 했습니다. 또 그는 이방인으로서 동족도 아닌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사재를 털어 회당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비록 영화 속의 묘사이지만 로마 병사들의 포악함이 얼마나 치를 떨 정도인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이방인을 누구보다 꺼려해야 할 유대인 장로들이 그를 돕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존경하며 그의 유대인에 대한 사랑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전쟁에 참여했다가 이스라엘에 남아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의 군대에 직장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방 땅에서 군대에 근무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고귀한 인격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종일지라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대 백성들을 귀하게 여겨 그들을 잘 대우하고 섬겼습니다. 이런 그는 이방인 하면 치를 떠는 유대인들까지도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6,7절을 보십시오. 그의 사람됨 이상으로 더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함께 가실 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여기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자기는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 잘 알았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시오, 총사령관인 예수님 앞에서는 마치 4성장군 앞에 선 이등병과 같은 자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도, 그렇다고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슨 병이든 잘 고치는 용한 의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 분의 말씀이라면 어떤 것도 복종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부탁드릴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말을 들은 예수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9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 ‘이만한 믿음(such great faith)’은 ‘이렇게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큰 믿음으로 여기신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필요 없이 공간을 초월해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복종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8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를 보면 그는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생활을 하면서 위계질서를 이해하고 복종하고 또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위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지위나 권위 또한 쓸 줄 알았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권세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소문으로 들은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세상 만물의 최고 지위를 가지신 권세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심지어는 사람을 죽게 하는 질병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이면 복종할 대상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에게 ‘물러가라’ 말씀만 하시면 병이 물러가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보내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져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종을 구원해주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만큼 주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우주 만물의 주관자시오, 영계와 피조 세계의 총사령관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사’하며 모든 문제를 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양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도 ‘말씀만 하사’하며 믿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구하고 그 말씀을 받고 붙들게 됩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은혜를 불러 옵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로 삼아 주님께서 능력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백부장처럼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은 11-17절에 나오는 사건에서 더욱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나인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인이란 지명은 ‘즐거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과는 반대로 오히려 어디선가 슬픈 곡소리가 들려옵니다. 성문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자였고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과부인 어머니에게 있어 독자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독자, 외아들은 한마디로 그녀의 삶의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과부는 외아들 장가도 보내고 며느리도 얻고 손자도 보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근데 모든 꿈과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일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잔인하게도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사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은 과부네 가족이 어떤 삶을 살아왔건 간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갔습니다. 생명을 잃고 차갑게 누운 독자의 시신은 어머니를 향해 웃지도 울지도 않고 냉정했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며 소리쳐 봐도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선 과부의 악착같던 삶도 아무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또 죽음은 소리소문 없이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독자의 죽음은 과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것까지 철저히 부서져버린 자신의 인생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과부는 그 모든 슬픔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례 행렬이 성문 입구에서 예수님의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죽음의 권세가 마주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과부를 짠하게 여기면서도 ‘어쩌다 죽었대?’ 죽음의 원인과 장례 과정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부를 가장 먼저 보셨습니다. 시골 마을의 성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과부의 슬픔과 고통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자기 자식이 죽은 것처럼 아파하고 그 슬픔에 깊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이 과부가 무슨 관계이기에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전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너무나 과부의 슬픔과 고통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절반 분담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의 슬픔에 함께 동참하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13)!” 이 말은 단순히 위로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더 이상 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가장 큰 슬픔을 묘사할 때 독자 잃은 과부의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는 인간 최대의 슬픔을 독자 잃은 과부를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것도 독자를 잃은 과부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과부의 독자를 살릴 수 있는 분만이 가능합니다. 누구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주관자이자, 말씀의 권세자인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나인성 과부처럼 울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와 고독, 실패의식, 절망감 등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왜 하필 나에게입니까?” 한스럽게 울부짖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름 이해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울고 싶은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우리를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뿐입니다. 오래전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면서 울었습니다. 찬송하며 울고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닥친 아픈 현실들로 많이 아파하고 울었던 사람이 교회에 와서 또 울었습니다. 같은 눈물이었지만 그 내용은 달랐습니다. 세상에서는 슬프고 아파서 울었지만 교회에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6:21b)”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절대로 눈물로 끝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현실 문제 속에서, 많은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도우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울고 있지만은 않습니까? “울지 말라!” 우리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승리의 주님으로 인해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 죽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멈추어 섰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두 가지 절대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병환자, 또 하나는 시체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 가운데 하나는 이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규칙을 깨뜨리고 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도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은 자의 시체의 관을 만지신 것입니다. 율법에 시신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청년의 관은 오늘날 들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관에 손을 대셨다는 해석은 죽은 청년의 시신을 만진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부정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속성이 생명이기에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죽은 시신은 부정한 것으로 관념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신이 부정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죽은 청년의 시신을 만지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율법을 몰라서였을까요? 죽은 시신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죽은 시신이 정하게 되려면 살아나면 됩니다. 생명이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죽은 청년을 살아나도록 할 수 있기에 율법을 초월하여 청년의 시신을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신을 향한 터치는 예수님 자신이 그 죽은 청년을 살려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울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의지 표현입니다. 과부가 울지 않으려면 청년이 살아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청년을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루만짐으로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얻고 일어서게 됩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살아납니다. 이 예수님의 손길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소망이요, 구원입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것은 옆에 있는 사람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반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벽을 뚫고 죽은 청년의 귀에 들려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앉아서 말도 함으로 그가 살아났음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모든 병과 귀신들이 떠나갔는데 이제는 죽음까지도 굴복하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 권세를 이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것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의 능력과 권위로 피조물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죽은 청년을 살리고 일으키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것은 모든 슬픔과 고통의 근원인 청년의 죽음 문제를 대면하시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고 죽은 자도 일어나게 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장차 우리가 부활하고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또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장차 누리게 될 부활과 새 생명을 지금에도 경험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죽어있는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어있는 시신에 대고 ‘청년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어 관속에 누워있는 자에게도 “청년아”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관속에 누워 있는 청년은 죽은 사람, 아무 기대할 것도 없는 끝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청년’으로 부르십니다. 본문의 ‘청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네아니스코스’인데 ‘새롭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꿈, 새로운 생각, 새로운 출발’의 시간이 ‘청년기’입니다. 살아 에너지가 넘쳐 새로운 내일을 꿈꾸고 움직이며 행동하는 사람이 진짜 ‘청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관속에 누워 새로움도 없고 무기력하고 연약한 존재로 보지 않으십니다. 청년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청년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생명력이 있고 새로움이 있고 청년의 기백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청년아’ 이렇게 부르신 데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청년’입니다. 청년은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창세기적인 본연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처음부터 청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청년이 청년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하셨습니다. 청년은 환경과 조건을 탓하며 죽은 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청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죽어서 누워있습니다. 생명도 없고 꿈도 비전도 희망, 새로움도 없습니다. 현실 문제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자신만 비참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슬픔과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사망 권세에 사로잡히면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 허무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봄꽃들이 만개해도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습니다. 시험 기간인데도 헛생각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안일과 무기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울증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제한을 받는 상황이 지속되니 마음이 답답하고 활력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또 정욕의 관에 누워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욕은 고귀한 시간과 정열을 탕진하게 만듭니다. 목자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캠퍼스 복음 전도가 갈수록 어려워져 포기하기 쉽습니다. 더 이상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실패 의식에 지배당합니다. 그러다 보면 변화, 도전, 개척, 새로움, 스피릿이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하고 평범하고 자기중심의 안락함만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또 우리가 어떻게 청년으로서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길은 다른 그 무엇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살아납니다. 청년이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해, 주일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살아납니다. 그럴 때 청년으로 살아갑니다. 청년은 캠퍼스에서 양들에게 외면받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회 현실이 두렵지 않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죄와 죽음의 관에서 누워있는 분이 있습니까? 현실 문제에 갇혀 절망하며 누워있는 분이 있습니까? 실패의식과 포기의 음성이 들립니까? 낙심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청년으로 불러주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청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셨던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청년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살아있고 생명력 넘치는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