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⑬ 유진벨 선교사(Eugene Bell 1868~1925)
아픔을 어루만지며 복음을 전하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성장 뒤에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미지의 땅으로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특히 두 명문가가 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와 유진벨 선교사의 가문이 자리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유진벨은미국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이 두 가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4대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선교지원자가 생겨났고, 1892년에 남장로교 7인의 한국 첫 선교사에 뒤이어 1895년 4월 9일 유진벨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와 함께 제2진 선교사로 파송되어 내한하게 된다. 이 때 유진벨의 나이가 27세,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남지역 교회 개척
지난 선교사 열전에서 소개하듯 당시 한국장로교로부터 전라도 호남지역에서 개척하도록 위임 받은 미 남장로교회는 전주지방의 레이놀즈 선교사나 군산지역의 전킨 선교사의 전북지방에 이어 유진벨 선교사는 전남 나주지방으로 가서 사역하기로 하고 어학 선생 변창연과 함께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지역을 답사에 나섰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거주지도 얻지 못하고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하게 된다.
이에 유진벨 선교사는 실망하지 않고 목포로 옮겨가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활동 중 시련을 맞았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 한국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경험했다. 그리고 아들 역시 어린나이에 풍토병으로 죽었다.
목포지부를 개척한 그는 이후 1904년 광주로 옮겨오게 된다.
먼저 김윤수 집사를 보내 광주에 거처를 확보하게 하고 주택이 거의 완성되자 1904년 12월 19일 유진벨은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벨과 오웬 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 명이 함께 예배 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유진벨은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한국 생활에 대한 많은 편지를 보냈다.
‘밥은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음식을 먹기로 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선 어떤 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등의 낯선 문화에 대한 거부감에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점점 친화적으로 변해가는 솔직한 생각들을 적어 보낸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갖가지 이유로 쫓겨나 갈 곳 없는 여성들을 야학을 통해 글을 깨우치게 했다는 선교 활동 내용도 있다.
광주양림교회
교육사업과 의료선교, 교회 개척
유진벨은 이곳 광주에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고 광주기독병원도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 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와서 일을 했던 것은 주지역에서는 이전까지 광주지역에서 보지못했던 사역을 하게 된다.
유진벨 선교사는 단순한 종교전파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삶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한센병자들을 몸에 끌어안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양녀, 양자로 삼았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학비가 있든 없든 간에 교육을 시켰고,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생활촌까지 만들어 지속적으로 돌봐 줬다.
1905년 미신에 의존하여 치료하던 이들에게 제중병원을 통해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치료를 받게 해줬고, 1908년에는 남학교, 여학교를 세워 다음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1914년에는 오웬 기념각을 세워 근대문화가 꽃 피우는 공연이나 집회를 가능케 했다. 그뿐인가 학교를 통해 생활이 가능하도록 양잠기술, 바느질이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술들을 가르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줬다.
아울러 교회는 단순한 종교적 예배만이 아니라 그 안에 노래와 예술,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보급됐다. 6·25이후 귀일원, 동광원, 충현원 등이 생겨서 버려진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에게 생을 이어가게 해 주었다.
유진벨 선교사는 한국에서 30년간 일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양림동은 광주 근대가 싹튼 곳이다.
근대역사마을로 명명되며 조명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더니 이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양림동 근대역사마을은 연원을 살피자면 당연 남장로교 유진벨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양림동에 뿌리를 내린 선교사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대를 이어 심겨진 한국사랑
유진 벨, 배유지라는 한국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 선교사의 거룩한 열정은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있다.
그의 둘째 딸 샤롯 벨(1899-1974)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당시 한국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장성하여 내한하였다.
그녀는 1912년에 내한하여 군산에서 일하게 된 윌리엄 린튼을 만나게 된다. 린튼은 21세의 나이로 내한했는데 한국에 온 최연소 선교사였다. 이 둘은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일하게 되므로 제2대 선교사가 된다.
린튼은 교육선교사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전주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등에서 교장으로 일했다. 부인 샤롯은 한복을 즐겨 입었고, 한국을 사랑했던 이국인이었다. 그는 기전여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학교를 폐쇄하게 되자 린튼 부부는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강제 추방되었다. 광복과 함께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내한하였다. 6·25 전쟁 중에 거의 모든 선교사는 한국을 떠났으나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피난민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게 되자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전에 1956년 대학, 곧 대전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본래 건축학을 전공하여 교사건축도 꼼꼼히 챙길 만큼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1971년 서울의 숭실대학과 합병되어 숭전대학교가 되었다가 1983년 다시 분리되어 한남대학교로 남아 있다.
그는 1960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일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이 인돈이었다.
유진벨 선교기념관
순천의 검정고무신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은 선대에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가 3대 선교사였다.
그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아버지와 외조부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복무했는데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을 만큼 한국과 관련이 깊었다.
그는 순천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으나 전라남도의 산간벽지를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다.
특히 1960년대 순천 지방에 결핵환자가 많았으나 병원이 없어 광주나 전주로 이송하는데 불편이 많았고, 이송 중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의 세 아들도 결핵에 죽었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 때문에 린튼의 부인 로이스는 순천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고, 순천결핵재활원 책임자로 1996년 은퇴하기까지 35년간 결핵 퇴치를 위해 일했다.
휴 린튼 목사는 주로 교회개척에 힘썼는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 하여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고흥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던 중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휴린튼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스티브 린튼, 인세반이고 막내가 존 린튼, 인요한인데, 이들 두 형제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어 4대 선교사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출생했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스티브 린튼은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돕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북한 주민의 결핵 퇴치를 위해 장비와 의약품을 보내는 등 선한이웃이 되고 있다. 인요한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신촌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형 응급 구급차량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119 응급구조 체계를 마련하는 데도 기여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응급처치만 할 수 있었어도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의 죽음과 희생을 막아보려는 일념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 참고문헌 참고문헌 ‘유진벨 선교기념관’ ‘미 남장로회 한국선교이야기’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