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이 차면 외 1편
하갑문
어릴 적 동네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마른 나를 보시고 얼굴에
고물이 차면 한군데 빠질 데가 없는 얼굴일세 하시고
이웃집 철이 아버지는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마루에서 초롱불을 켜놓고 밤새 졸던 나를 담 너머로 보시곤 저 아이는 크면 뭣을 시켜도 다 해낼 거야 하시고
큰형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책보를 던져놓고 키보다 큰 꼴망태에 꼴을 터질 듯 베어 오는 나를 보고는 되름은 나중에 부자로 잘 살거요 하시던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봤을 어린 시절의 덕담들
거울만 보면 고물이 차지 않는 볼때기를 부풀려 보던 시절을 지나
내게 버거운 작은 자리 하나 겨우 해보고, 끼니 걱정은 면하면서 사는 것이 어릴 적 그 덕담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오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옷깃이 촉촉이 젖은
아직도 고물이 차지 않은 한 아이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안개의 거리
보일 듯 보일 듯 안 보이고
없는 듯 서 있는
안개 낀 날
붉은 꽃잎은 더 화사해 보이고
노란 잎은 더 따뜻해지는
안개의 풍경이 좋다
높은 빌딩은 다소곳이 엎드리고
낮은 지붕은 고개를 드는
안개의 마을이 좋다
부드러운 말들이 서로 손을 내미는
누군가 생각이 나는
안개의 거리가 그립다
―《문학나무》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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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갑문 | 2014년 《문학나무》 시 등단. 시집 『텅 비었니 가득 찼니』.
문학나무숲상 시 부문 수상.
첫댓글 어린 시절이 소환되는 시가 좋은 시로 자리매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고물이 차면>이 거둔 시적 성취는 비교적 명확하다.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봤을 어린 시절의 덕담들"이란 문장이 시의 중심부에서 제 몫을 다한 결과다.
어른들의 칭찬을 겸손으로 치환한 전반부와 삶의 근래적 현황을 담은 후반부의 시공간을 분리해주는 한편
맥락적으로 세련되게 연결해주었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과거를 환기하는 방식으로 독자는 감동할 것이다.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