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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9.정파(正派) 대(對) 사파(邪派)
군웅대회 9일째, 남은 선수는 총 16명이다. 그 16명이 경기를 끝마치면 8명만 남게 된
다. 그럼 우승후보에도 들게 되고, 진다 하더라도 명성 정도는 어렵잖게 날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16강 첫 경기는 전 무림인들의 시선을 끌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전이다.
강력한 두 우승후보, 정파에서도 배분이 꽤 높기로 유명한 무당파의 대제자 조무환과,
사파 신진고수로 아찔한 용모와 냉혹한 손속, 그리고 확실한 필살법의 1인자 사문도
의 결전이기 때문이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는 자가 이번 군웅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거의 모든 무림인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정사(正邪)간의 자존심 대결이 될 이번 승부... 과연, 하늘이 누구 편을 들어줄 지는
지켜볼 일이다.
진시(辰時) 정각, 비무장 관중석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설 틈이 없을 정도다. 이번
군웅대회의 우승자를 판가름하는, 일종의 작은 결승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결전
이기에, 이번 군웅대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가 모였다.
비무장의 관중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북소리가 네 번 울려 퍼진다. 결전 시작의 신호
다.
"천비, 주군께서... 이길 수 있을까?"
약간은 걱정된다는 듯, 모용화운이 팔짱을 낀 채 강천비에게 묻는다.
"글쎄요. 주군이 간단하게 이기실 것 같진 않고... 일 각 이상은 갈걸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강천비 역시 사문도의 전력공격은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고, 조
무환의 무공 수위도 높다고 말이 많은지라, 알 수가 없다.
강천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측 출입구에서 조무환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먼저
등장한다.
녹의(綠衣)를 잘 차려입고, 삼 척 길이의 검을 메고 나타난 조무환의 모습은, 명문정
파 무당파의 대제자(大弟子)답게 당당하기 그지없다.
조무환이 비무장의 반쯤 올라왔을 때, 반대편 출입구에서 사문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찌는 듯한 6월이지만 변함 없는 흑의(黑衣), 역시 3척 길이의 검, 칙칙한 눈빛과 그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잘생긴,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찔해질 것만 같은 용모...
둘이 비무장 중앙에서 가볍게 목례를 올린다. 그러자 또다시 두 번의 북이 울린다. 대
회 시작의 북소리다.
조무환은 거침없이 검을 뽑아 오른손에 움켜쥔다. 그에 비해, 사문도는 여전히 무반응
이다.
"왜 대결 때 검을 쓰지 않지?"
조무환이 건네는 말에, 사문도가 여전한 얼굴로 입을 연다.
"검을 쓸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오."
광오(狂傲)한 사문도의 발언에, 조무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오만한 말이로군. 그럼, 나도 마찬가지란 말인가?"
"물론."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고, 조무환이 검을 쓸 자세를 취한다.
"우리 무당파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검법이다. 태극검법(太極劍法)이라 하지."
"피하면 되는 것 아니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사문도의 발언에 화가 났는지, 조무환이 전력으로 달려든다.
"무당파의 무공이 장난인 줄 아느냐!"
그래도 같잖다는 걸까? 사문도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태극검법을 모조리 피해낸다. 이
렇게 간단히 태극검법이 파해되자, 당황을 금치 못하는 조무환.
"호오... 제법 빠른 걸...?"
'이 녀석... 빈말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전열을 재정비해 보는 조무환에게 사문도가 말한다.
"조무환, 당신은 태극검법의 중심을 쾌(快)에 두고 있군. 덕택에 당신의 태극검법엔
쾌만 있을 뿐, 중(重)이 없소. 쾌만으로는 날 이길 수 없소."
하며 사문도가 오른손을 요대(腰帶)에 가져간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꺼내든다.
"거, 검이다!"
"역시, 검은 장식이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관중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강천비가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굳어진
다.
"천비, 갑자기 왜 얼굴이..."
"아아... 주군께서는 검을 뺀 순간부터, 사람이 확 바뀌거든요..."
"사람이... 확 바뀐다고?"
사문도가 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는데... 놀랍게도, 조무환이 태극검법을 쓸 때와 동일
한 자세다.
"그런 되다 만 검으로, 날 베겠다...? 그것도, 그 자세는 태극검법인데...
대무당파의 무공이, 그리 쉽게 익혀지는 줄 아느냐?"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조무환이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사문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당하고 정신차리지 마시오!"
번쩍-! 하고 묵섬(墨閃)이 인다 싶더니, 조무환이 미처 방어 체제도 갖추기 전에 오른
쪽어깨가 화끈거리는 걸 느낀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믿기 싫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오른쪽어깨를 바라보
는 조무환의 두 눈엔 불신감이 가득하다.
'또, 똑같다... 사부님께서 태극검법을 극성 연마하시고 쓰셨을 때와... 다른 게 없어
...!!'
몸을 홱 돌리고 사문도에게 시선을 돌리는 조무환. 그 순간 사문도의 말이 이어진다.
"이것이 극성에 이른 태극검법의 참모습... 조무환, 당신이 쓰는 태극검법은 반쪽 짜
리 밖에 안 돼."
관중들이 이 모습을 보고, 술렁이기 시작한다.
"태, 태극검법이다..."
"어떻게 고독랑이 정파무공인 태극검법을...?"
모용화운도 뜻밖이란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 사문도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이란 말이야...
무당파의 무공을 사용했다는 건, 분명 무당파의 장문인과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란
소린데...?'
그 누가 자신의 사문 무공을 그리 쉽게 가르쳐 줄 것인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라야,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다.
"처, 천비... 주군께서 애초부터 저 무공을 익히고 계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저런 일이...?"
녹의 사이로 배어 나오는 피.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조무환의 심기를 어지럽히
기엔 넘치고도 넘친다.
"주군은 말예요, 한번 본 무공은 바로 소화해 버리신다고요."
"... 뭐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 강천비에게서 떨어졌다. 단 한번 보기만 한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한 반년 정도 됐나? 바로 소화해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게...?"
그 말을 들은 모용화운의 뇌리로 스쳐 지나가는 단 한마디의 말.
'무신(武神)이다... 인간이 아냐...!!'
"조무환, 괜한 몸부림치지 말고 항복하시오."
낮은 목소리지만, 그 안에 수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닌,
진심으로 권하는 그런 어투다.
"후후... 그런다고 내가 쉽사리 항복할 거라 생각하느냐!
난 정파인이다. 장파의 혼이 내게 붙어있는 이상, 사파에게 무릎꿇을 순 없다 이거다!
"
조무환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항복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다.
"... 어차피 항복하리라 생각지도 않고 있었지만..."
잠시 뜸을 들이고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리는 조무환. 주변의 기운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마지막이다!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
무당파의 검식 중에서 가히 최고로 꼽히는 기술, 신문십삼검. 조무환이 무당파의 대제
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바로 지금 쓰는 신문십삼검을 익혔기 때문이다.
조무환이 마지막 결사의지를 불태우고... 사문도는 쥐고 있는 검에 힘을 주며 입을 연
다.
"혈영검강(血影劍强)!"
조무환이 사문도에게 파고드는 속도는, 가히 쾌속선(快速船)을 능가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보다 사문도의 손놀림이 더 빨랐으니...
두 기류가 충돌하기 직전, 사문도의 검이 허공을 죽 긋는다. 이를 보고 조무환이 코웃
음을 친다.
'큭, 애송이놈. 마지막에 결정적 실수를 범하는군! 승리는 이 몸이 가져가겠다!!'
조무환이 검으로 막 사문도의 검을 걷으려는 순간, 사문도의 입가에 걸려 있는 비릿한
웃음에,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서, 설마...?"
핏빛 기류... 자신의 검을 막고 있는 핏빛 기류를 의식한 게 그때였다.
"제, 젠장...! 으윽...!!"
전력을 끌어올려 신문십삼검을 전개해 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밀리고만 있다.
'이 녀석의 내공이 2갑자(甲子)를 넘어선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별안간 조무환의 발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장외로 날아간다. 이를 바라보는 사문도
가 혀를 찬다.
"쯧, 내 분명히 '검강'이라 했건만, 그것 못 믿었단 말인가?"
쿵!!
"큭...!"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비무장 벽과 충돌한 조무환이 장외로 쓰러진다.
"조무환 나리, 당신은 내게 졌지만 당신은 결코 약한 게 아니오. 개인전에서 내 힘의
3분지 1을 사용하게 만든 사람은, 우리 아저씨들 이후로는 당신이 처음이니까."
3분지 1! 사문도는 단 3분지 1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후일 무당파를 이끌게 될
대제자, 조무환을 상대로 말이다.
"고독랑 사문도, 준준결승 진출!!"
심판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중들이 혼란에 휩싸인다.
"설마 하니, 무당파의 제2인자가 깨질 줄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이곳 무림인들의 8할이 정파인이다.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던 조
무환 정도의 실력자가 약관도 채 안 된 소년에게 깨질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게, 게다가... 고독랑이 사용한 건... 거, 검기?!"
"아니, 단순한 검기가 아냐. 그건... 검강이다!"
"거, 검강?!"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주변 정파인들은 아연실색(啞然失色)이다. 검강이라면, 검황(
劍皇) 독고천조차 익힌 지 채 5년도 안 되는 최상승 무공인데, 저 고독랑은 벌써 구상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박빙의 승부를 이룰 거라 예상했던, 군웅대회 최고의 재미를 선사할 거라 예상됐던 승
부. 하지만 만인의 예상을 깨고, 대결은 단 일 각도 가지 못했다. 사문도의 일방적 승
리였다.
어느덧 사파의 자존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사문도. 그러나 그가 언젠가 중원무성에
반기를 들고, 무림통일에 앞장서게 될 거란 걸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가 알아챌 수 있으랴? 사문도의 깊은 눈동자 안에 새겨져 있는, 훗날 그가 벌일
일들을...
비무장(非武裝)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문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사문도
는 그에 괘념치 않고, 갈 길만 걷고 있을 뿐이다.
'조무환... 비록 내 원수 놈의 제자지만, 조무환 넌 예전 천마궁의 혈겁과는 관계가
없으니 살려 주지. 다만, 내 복수행을 저지한다면 죽여 버린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 가던 느티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는 사문도. 그 뒤
로 강천비와 모용화운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군."
"아, 천비로구나."
"다친 덴 없으시죠?"
염려스런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모용화운에게, 사문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물론이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가볍게 훑으며 사문도가 묻기를,
"천비... 넌 다음 대결이 언제지?"
"다다음입니다."
"다다음이라... 얼마 안 남았구나."
모용화운이 건네주는 물을 들이키며, 사문도는 강천비의 답을 기다린다.
"네. 상대가 천풍공자 장유승이니만큼, 주군의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두 손을 싹싹 비벼대며 씩 웃는 강천비의 모습에, 사문도가 강천비의 머리에 알밤을
한 방 먹인다.
"앗! 왜 때리세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문지르는 강천비.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산다.
"그깟 정파 놈이 뭐가 두렵다고 조언이냐, 임마!"
"하, 하지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白戰不敗)란 말이 있듯이..."
어떻게든 강천비는 조언을 구할 속셈인 듯하다. 그제야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며 상황
설명을 해 준다.
"휴, 천비. 내가 단순히 장유승을 얕봐서 이러는 거라 생각하나?
3년 전, 비록 녀석이 내게 무참히 짓밟혔다고는 하지만, 녀석은 강하다. 그때에 비해
수배는 더 강해졌다."
강천비는 아무 말 없이 사문도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모용화운은 흥미로운 눈길로 이
들을 바라본다.
"장유승과 네가 붙는다면, 네가 이긴다는 쪽에 몇이나 붙을까?"
"글쎄요, 한 3할 정도는..."
"아니, 단 1할도 안 된다."
"예?!"
어처구니없다는 듯, 순간적으로 강천비의 표정이 멍하니 일그러진다.
"살살 놀아줬더니, 완전 날 바보취급 하는군!"
강천비가 얼굴을 붉히며 성질을 내자, 모용화운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진정해라, 천비. 넌 충분히 장유승을 이길 수 있으니까."
그제야 강천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길 수 있다는 말이 그리도 좋았을까.
"하하, 그럼 그렇죠! 이 질풍귀 강천비 님이 그리 쉽게 패할 리가..."
"지금은 붙으면 진다."
이랬다저랬다 왔다갔다하는 사문도의 반응에, 강천비는 헷갈리는 듯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길 수 있다고 하시다가, 진다고 하시면 절 할 말이 없
잖아요."
"벽 하나. 그걸 넘으면 넌 특급 무인이 될 수 있단 말이다."
확신하는 사문도의 표정과 발언에, 강천비가 심한 의혹의 눈길로 생각에 잠긴다.
'벽? 벽이라... 그 벽이 대체 뭐야?"
얼마 후에 강천비의 얼굴에 금세 난감한 빛이 떠오른다. 넘어야 할 벽이 있다는 걸 알
았을 뿐, 무슨 벽인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 것이다.
'쉽진 않을 거다. 일급에서 특급으로 넘어가는 벽을 뚫기가... 쉬울 리가 있겠느냐.'
무인들이 흔히 좌절감을 느끼고 검을 가장 많이 꺾는 시기가 바로 지금 강천비가 겪고
있는 과도기적 시기다. 노력을 해도 발전성과는 없고, 잠시나마 무학(武學)에 대해
지루함이 느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주군께 여쭤본대도 쉽게 가르쳐 주시진 않을 터... 젠장, 혼자 연구해 보지 뭐!'
결국, 강천비가 한숨을 훅 내쉬다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긴다.
"저대로 놔 둬도 괜찮을까요?"
모용화운이 강천비를 바라보며 던지는 말에, 사문도가 고개를 끄덕인다.
"염려할 것 없소. 초반엔 밀릴지 모르더라도... 천비 정도의 정신력과 자질이라면, 승
률이 8할 이상 될 테니 말이오."
사문도와 이세혁이 강천비를 공통적으로 칭찬한 정신력. 이들의 말대로, 정신력이 장
유승과 강천비의 승부를 결정지을 것임엔 틀림없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하늘은 누군가를 승자로 만든다. 그 승자가 누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한 시진 이상을 끌던 16강전 둘째 경기가 끝났다. 이젠 정사격돌 2차전이다.
이번 군웅대회 태풍의 눈, 질풍귀 강천비와, 무정랑 조무환과 함께 이번 군웅대회의 2
대 정파 기둥이라 불리는 천풍공자 장유승, 이들의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 탓일까? 싱글거리며 지내던 강천비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진지 오래다.
'벽... 벽이라...? 그 벽이 대체 뭐야, 젠장!!"
경기 시간은 다가오고, 사문도가 일러준 건 짐작조차 되지 않으니, 강천비가 미칠 만
하다.
'내가 장유승을 이긴다면, 완벽한 사파의 승리다... 하지만, 진다면...?'
사문도의 기대를 저버리게 됨과 동시에, 신뢰마저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질 순 없고... 이기기는 힘들고... 내 참 환장하겠네!"
강천비가 왔다갔다하다가 무심결에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러다가 문들 들려 오는 목소
리에, 깜짝 놀란다.
"허허, 소협(小俠)이 질풍귀 강천비 소협인가?"
"?!"
봄바람만큼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오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대체 누구지?'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다보니, 풍채 당당한 초로의 노인이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아, 예. 그렇습니다만... 어르신께서는 누구신지...?'
황의(黃衣)를 걸치고 반백의 머리를 한 초로 노인의 정체를, 강천비가 알 리가 없다.
"노부(老父)는 이세혁이라 한다네."
신분을 숨기고 군웅대회에 참가한, 황실 제일의 고수 이세혁. 그가 강천비를 찾은 것
이다.
"아, 이 대협(大俠)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강천비를 이세혁이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주시한다.
'저 소년... 고독랑 사문도와는 기질이 다르다. 뭐라고 표현할 순 없지만,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턱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
는 시선. 그리고 강천비 역시, 이세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을 느
낀다.
얼마간 그들은 서로 말이 없다. 서로의 느낌에 흠뻑 매료된 것이다. 그 정적을, 강천
비가 먼저 깬다.
"참, 이 대협께서 여기 오신 이유라도 있으신지...?"
"허허, 고민하는 일 이 있는 것 같아서 이 노부가 조금 보탬이 되어 주려고 왔다네."
이세혁의 답변에, 강천비가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이 대협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전 괜찮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닐뿐더러, 개인적
인 이유인지라..."
"천풍공자 장유승에게 이기고 싶은가?"
정곡을 찌르는 이세혁의 질문에, 강천비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가 지워진다.
"어떻게 그걸...?"
"소협의 얼굴에 써 있다네. 이기고는 싶은데, 실력이 부족한 듯하군."
무거운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강천비. 자신도 모르게 이세혁에게 묻는다.
"저희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일급으로서의 자질은 갖추었으나, 특급이 되기엔 부족하
다고 하셨습니다."
"그 벽을 넘고 싶다,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끝맺는 강천비. 그 표정을 바라보는 이세혁의
입술 끝으로 걸리는 야릇한 미소는 대체?
"강 소협."
가라앉은 목소리다.
"예."
"호흡의 오의(奧義)를 알고 있는가?"
"호흡의... 오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세혁의 말을 중얼거리는 강천비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묘한 기
대감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헛헛, 내 예상이 맞다면... 사문도는 분명 그걸 노리고 있었을 거네. 일급에서 특급
으로 넘어가지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니..."
하지만, 이세혁의 말도 거기까지로 끝이다.
"왜 시간이 됐는데 안 나타난다 했더니, 이 대협과 같이 있었군."
"!!"
강천비와 이세혁이 놀라 소리가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미소년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은 채 둘을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사
문도, 그다.
"주, 주군!"
"빨리 가 봐라. 이야기는 거기까지 해 두고."
"... 예."
강천비는 이세혁의 말을 다 듣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사라진
다.
"..."
이세혁 역시 강천비에게 말을 다 못해준 게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자네가 사문도로군."
"그렇습니다."
"노부는 이세혁이라 한다네."
그 순간, 사문도의 얼굴에 걸리는 한줄기 청아한 미소에 이세혁이 의문을 느낀다. 그
리고 바로,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랄 말이 사문도의 입에서 떨어진다.
"알고 있었습니다. 대명제국의 특수 첩보기관, 동창의 대영반 이세혁 나리!"
"!!!"
금의위의 지휘자이자, 동창의 대영반 이세혁의 정체를 사문도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대영반 나리께서, 황족 한 분과 함께 이곳 항주(杭州)에 계셨
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그 말인즉, 사문도의 발언을 인정한다는 것, 곧 사문도는 믿어 보겠다는 것이다.
"군웅대회 전단지를 보니, 종이 품질이... 일반 부호들이 쓰는 종이가 아닌, 황실에서
만 쓰는... 그것도 고위 관직자들만 쓰는 종이더군요."
사문도의 말에 이세혁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천장으로 시선을 돌
려 허무한 웃음을 내뱉는다.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내가 대영반이란 사실을 알아내다니... 평범한 소년은 아니로
군.'
일반 서민들이나 무림인(武林人)이라면, 결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사문도의 말대로
, 시중에서 판매되는 종이와는 품질이 다른, 조선(朝鮮)에서 바쳐 온 것이기 때문이다
.
"대영반 나리,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제야 이세혁이 고개를 숙여 사문도를 바라본다.
"말해 보게나."
"동행하시는 황족... 어떤 분이신지요?"
말할까 말까 하다가, 이세혁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그때, 사문도의 목소리
가 이어진다.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군웅대회가 끝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 말입니
다."
"헛헛. 물론, 사 소협 그대가 우승한 후의 이야기겠지만."
이세혁은 웃고 있다. 하지만 이세혁이 내뱉는 말은 왠지 모르게 딱딱한 느낌을 준다.
"훗, 그렇습니까."
사문도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있었던 탓에, 이세혁은 사문도의 미소를 볼 수 없
었다.
'믿고 계시군요... 우승할 거라고. 허나 이 사문도가 있는 이상, 대영반 나리의 꿈도
끝입니다.
최고의 한 판이 될 수 있도록.... 적당히 놀아드릴 테니, 기대하십시오...'
둥... 둥...
두 번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천비와 장유승이 대결에 임한다.
"네가 정말 고독랑 사문도의 수하냐?"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던지는 장유승에게, 강천비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큭큭, 마침 그 자식에게 쌓인 게 있던 참인데... 그 녀석의 수하라니, 좀 맞아 줘야
겠구나."
장유승의 입에서 번지는 희미하게 번지는 섬뜩한 미소. 하지만 강천비는 동요하지 않
는다.
"쉽지만은 않을 거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장유승의 검이 검집에서 살짝 빠져 나온다.
"쉽건 어렵건, 난 네 녀석을 가만히 놔 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누가 떡이 될지는 하늘이 결정할 문제다. 빨리 덤비기나 해라."
장유승의 아미가 꿈틀거린다. 상당히 비위가 상한 듯, 검을 쥐고 있는 장유승의 오른
손엔 힘이 더해진다.
"애송이놈! 죽여주마!"
쏜살같은 속도로 장유승의 신형이 강천비에게로 돌진한다. 물론, 강천비가 가만히 당
할 리가 없다. 곧바로 도(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넣는다.
"차앗!"
'챙' 하는 소리가 비무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둘이 엉겨붙은 주변에서는 기가 소용
돌이친다.
"크으윽... 이깟 애송이에게...!!"
"크윽... 이깟 3류 무림인 따위에게...!"
밀고 밀리는 접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문도가 저만치서 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
젓는다.
'호오... 장유승, 3년 전보다 네 배 이상 강해졌군. 정말 뜻밖인데...?'
이 정도는 강해질 줄 몰랐다는 듯, 사문도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완력으로 붙지 마라, 천비. 그렇게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진정 이기고 싶다면... '힘'이 아닌 정신력으로 흥부해라. 그러면 깨달을 수 있을 것
이다. 네가 원하는 바를!!'
주은비는 반대편에서 강천비와 장유승을 주시하고 있긴 하지만, 위치가 안 좋은 탓인
지 햇빛 때문에 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천풍공자야 본 적이 있어 알겠지만... 저 질풍귀란 사람, 얼굴이 전혀 안 보이잖아..
.'
몹시 아쉬운 듯, 서운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강천비에게 시선을 접해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데다가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탓에 보일 턱이 없다.
'질풍귀 일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대영반은 어디로 가신 건지...'
몇 번이고 찾아 봤지만, 이세혁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탓에 주은비가 내심
불안한 것이다.
'일단, 오늘은 포기하자. 뭐, 못 본다 해도 그게 운명이니까...'
그러고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돌린다.
'그럼, 일단 대영반부터 찾아볼까...?'
하고 빠져나가려다, 뒷사람과 가볍게 부딪친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주은비가 고개를 들어 부딪친 사람을 바라본다.
"전 괜찮으니, 심려치 마세요."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 그럼 전..."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은비가 비무장 밖으로 나간다. 그리
고 나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사람, 분명 북해빙궁의 소궁주, 사망빙화 무용화운인데...'
문득 모용화운이 여기 있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자신이 빠져나온 이유도 잊은 채, 방
금 전의 모용화운을 떠올리며 주은비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다.
'강천비야 사문도의 수하니까 상관없지만, 모용화운까지 같이 있는 게 좀 이상하단 말
야...
강천비와 모용화운... 이 둘은 별 관계가 없는 걸로 아는데...'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문도와 모용화운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걸.
"여기 계셨사옵니까?"
"어맛!"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주은비가 깜짝 놀란 듯 짧게 비명을 지른다.
"헛헛, 많이 놀라셨사옵니까?"
"난 또 누구라고... 휴."
대영반 이세혁, 그가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주은비 바로 뒤에 서 있었던 것이
다. 주은비가 놀란 가슴을 쓰러 내리며 이세혁에게 묻는다.
"그런데, 대영반. 어디 계셨던 거예요?"
"아, 예. 관중석에서 강천비와 장유승이 싸우는 걸 보고 있었사옵니다."
"관중석에서요...? 그래, 질풍귀 강 소협의 얼굴은 보셨겠군요?"
주은비의 질문에, 이세혁의 안면에 밝은 미소가 걸린다.
"물론이옵니다. 얼굴은 고사하고 담화까지 나누고 왔습지요."
흥미를 잃어가던 주은비의 안색에 변화가 생긴다.
"어머, 그래요? 그럼 어떤 얘기를 나누셨는지 가르쳐 주세요, 네?"
두 사람의 담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비무장의 열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간다. 경기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벌써 이들이 대적한지 이 각이 다 됐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
었다. 그만큼 그들의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정말... 뜻밖이군. 그 애송이 놈의 수하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헉...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강천비를 바라보며 장유승이 생각한 말이다.
"이제... 서서히 끝내 주마. 많이 힘들겠지... 하지만 내가 편안히 끝내줄 테니, 걱정
마라."
"너같이 사람을 비하하는 인간에겐... 절대 질 수 없다! 또한, 주군의 명예가 걸린 일
이니 만큼... 헉... 난 절대지지 않는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장유승이 흠칫 놀란다.
'굉장한 기백이다... 애송이 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자식보다 이놈의 기백이...
대등할 줄은...!!
내가 여태, 이 녀석을 과소평가 했다는 거로군...'
둘의 상황을 보자면 엇비슷하지만, 체력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
장유승은 아직 여유가 있는데 반해, 강천비는 많이 지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 증
거다.
"애송아, 하나 가르쳐주마. 분명 너와 난 실력이 비슷하다. 그 정도로 많은 수련을 한
네게, 칭찬 정도는 해 주마.
하지만 넌 날 이길 수 없다. 왠지 아느냐? 그게 바로 나이 없이는 메꿀 수 없는... 체
력이 내가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지!"
장유승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강천비에게 호령하고 있다. 하지만 강천비는 그저 고개
만 몇 번 끄덕이고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는다.
"그게 뭐 어때서... 체력이 밀리고 있다는 것 따위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 명예가
아니다. 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게 내 심장 깊은 곳에 박혀있는 한, 난 결코 안
져!"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하는군.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몸에게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거
다."
"아, 물론. 난 널 이길 사내니까."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장유승이 다시 검을 꽉 움켜쥐며 소리친다.
"넘어 봐라! 넘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이 나의 벽을!!"
강천비 역시,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도를 꽉 움켜쥔다.
"받아라, 지옥화룡(地獄火龍)!"
장유승의 주변에서 여지껏 강천비가 느끼지 못했던 열풍(熱風)이 휘몰아친다. 그걸 직
감적으로 느낀 강천비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든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최후의 공격인 양, 강천비 역시 정신을 모아 한 가지 초식을 전개한다.
"대지양단(大地兩斷)!!"
3년 전, 사문도에게서 전수 받은 비급. 그 비급엔 바로 이 '대지양단'의 구결이 들어
있었다.
한 번 쓰면 내공이 진탕되는 데다, 가공할 위력의 도식인지라, 여태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무공을, 지금 강천비가 사용하고 있다.
"잘 가라, 애송아! 내 승리다!"
어느덧 두 사람의 거리가 급속도로 좁아진다.3장...2장...1장!!
"이앗!"
"비, 빛이!!"
두 개의 거대한 기 덩어리가 충돌하고... 작렬하는 섬광에, 관중들이 눈을 싸쥔다.
얼마나 흘렀을까. 관중들이 서서히 눈을 떠 비무장을 바라본다. 둘 다 몰골이 말이 아
니다.
"커헉... 제, 젠장...!!"
갑자기 장유승의 입에서 한 모금 정도의 핏물이 쏟아져 나온다.
"질풍귀 강천비가, 천풍공자 장유승을...?!"
"아니, 그렇게 판단하는 건... 이런 게 아닐까...?"
"!!"
피를 먼저 쏟은 장유승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던 것이다. 내상만 당했다는 뜻이니까
. 하지만 강천비는 내외상 모두 당한 듯하다.
"...?"
별안간 강천비가 휘청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전신에 지나간 검흔
들로 봐서, 상당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지... 질 순 없어... 크윽...!'
이를 악물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강천비를 바라보는 관중들이 경악한다.
'저 상태인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기권하면 편할 텐데...!'
하나같이 질렸다는 표정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사문도의 안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
른다.
'후후... 천풍공자 장유승, 넌 저 소년에게 진 거다...
저 녀석은, 내가 명령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널 이기려 달려들 테니까!!'
토혈(吐血)을 해 입가에 번진 피를 닦으며, 장유승이 강천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큭큭... 네놈의 공격이 먹히긴 했지만, 지옥화룡을 완벽하게 뚫진 못했군.
그냥 쓰러져 있다면, 더 당하진 않았을 텐데... 지옥 구경을 하고싶어 안달이 난 게로
구나!"
그렇다. 아무리 봐도, 강천비는 툭 건들기만 해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인다.
"가능성 없는 짓을 하는 거 만큼이나 어리석은 짓도 없지! 네놈이 딱 그 꼴이구나.
내게 이기고 싶겠지... 하지만 꿈 깨라! 넌 날 이길 수 없어!!"
말을 끝낸 장유승이 다시 검을 꽉 움켜쥐고, 내공을 끌어올린다.
"큭큭... 네놈의 주인이 이걸 보고 있으면서 무척이나 좋아하겠지! 이것으로 이 경기
도 끝이다! 지옥검광(地獄劍光)!"
장윳으의 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 갈래의 빛줄기가 모두 강천비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
강천비에게 있어선 절대절명의 위기다. 하지만 강천비의 다문 입술에서는 말이 없다.
'내가 못 이긴다고...? 내가 하는 짓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낭패로 물들던 강천비의 얼굴이 점차 분노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
히 도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움직인다.
이런 강천비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장유승. 코웃음을 친다.
'네놈 상태로 지옥검광을 막겠다...? 큭큭,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아서라, 말어라.
상처만 더 깊어진다.'
하지만 강천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겠다는 듯, 초식을 전개시킨다. 우연찮게 한
줌의 내공이 단전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이게 마지막 내공... 이게 먹히면, 최소한 장외패는 면할 수 있겠지...?!'
"대지... 양단!!"
이어서 일어난 두 기류의 대충돌. 뼈가 깨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강천비의 손이
덜덜 떨린다. 그러나 끝내 도를 쥔 손은 건재하게 버티는데...
"저... 저렇게까지 버틸 필요는 없잖아...?"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독백에, 주변사람들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의 흐름은 멎은지 오래다. 휘날리는 먼지 속에, 장유승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검집
에 검을 밀어 넣는다.
"이 정도의 지옥검광이라면, 네 녀석이 버틸 리가 만무하겠지.
내공도 바닥났는데 무리하게 초식을 사용했으니... 장이 뒤집혔을 테고..."
"쿠욱...!!"
먼지가 걷히자, 피로 물들어 시뻘겋게 젖어 있는 백의를 입고 있는 강천비의 처참한
몰골이 드러난다. 그를 보고 장유승이 천천히 강천비에게 묻는다.
"어떠냐... 이래도 덤빌 테냐...?"
미소짓고 있지만, 장유승 역시 성치는 않은지 걸을 때마다 조금씩 비틀거린다.
"큭... 후... 후후... 누구 맘대로...? 내가 여기서 안 떨어지는 이상... 난 절대 포
기 안 한다니까...!"
장유승의 인내력도 이젠 한계다. 미소가 입에서 깨끗하게 지워지더니, 지옥나찰의 험
상궂은 얼굴로 바뀐다.
"... 애송이, 죽여버리겠다!"
인사불성 상태로, 즉각 검을 뽑아 미친 듯이 장유승이 달려든다. 그러자 믿기지 않을
듯한 일이 일어난다.
'뭘까...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저 녀석의 움직임이 읽히는 이유가...'
미친 듯이 휘두르는 장유승의 검을, 만신창이가 된 강천비가 모조리 피하고 있다. 그
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핀다.
'뭐, 어쨌거나 예상대로 깨달은 것 같군. 호흡의 오의를!'
날뛰는 장유승도 나름대로 경악에 가득 찬 마음으로 중얼거린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싸우려고 할 수 있는 건가...!
지옥화룡과 지옥검광은 분명 제대로 먹혔는데... 어째서 내 공격을 이렇게까지 피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때, 균형을 잃고 장유승이 휘청거리고... 강천비가 기회라 여기고 파고든다.
'검의 약점은... 저긴가...?'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천비의 신형(身形)이 공중에서 빙 돈다. 그리고,
"선풍각(旋風脚)!!"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아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중력이 실린 터라 약할 리는 없다. 바
로 '쨍강'하는 소리와 함께, 장유승의 검이 두 동강이 난다.
"뭐, 뭐야...?!"
"지, 질풍귀가... 천풍공자의 검을... 부러트렸다...!!"
십중팔구가 장유승에게 걸었던 승부... 너무도 쉽게 장유승이 승자가 될 거라 생각했
던 승부지만, 지금 결과는 그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덤비는 강천비에게 질린 듯, 장유승이 부러진 검을 떨어트린다.
'뭐, 뭐 이런 자식이... 지, 질린다...!!'
분명 강천비의 전신은 검에 난자당해 엉망이다. 그러나 강천비는 처음과 달리 이젠 아
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훗... 이젠, 그런 대로 움직일 만하군. 이젠 내 차례다, 천풍공자!!'
순간적으로 강천비의 주먹이 번쩍이더니, 얼이 빠진 장유승의 왼쪽 턱에 그대로 꽂힌
다.
"크윽...!!"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장유승이 비무장 저편으로 날아간다. 재빨리 쫓아가
려던 강천비가 뜨끔한 듯, 오만상을 찌푸린다.
"큭... 역시, 몸이 말을 잘 안 듣네... 빌어먹을!"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핏물을 탁 뱉으며, 강천비가 달린다.
"빌어먹을 애송이놈...! 젠장...!!"
제대로 맞은 듯,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는 장유승. 허나, 바로 쇠몽둥이로 얻어맞
는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강천비의 왼발이 그대로 배에 꽂혔기 때문이다.
"커허억...! 커헉...!!"
입에서 피를 뿜고, 장외로 날아가는 장유승의 모습이 강천비의 눈엔 마치 한 편의 과
거처럼 느리게 지나간다.
쿵... 장외로 장유승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질풍귀 강천비, 준준결승 진출!!"
"우와앗!"
"질풍귀 만세!"
사파인들의 고함소리가 항주 하늘을 가득 메운다.
"이긴... 건가...?"
힘없이 웃으며, 그대로 강천비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승리의 북소리가 비무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천비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제대
로 들릴 턱이 없다.
'깨달았다... 주군과 이 대협께서 말씀하셨던, 호흡의 오의를...'
고통 속에서도 지어지는 희미한 미소. 자신이 그렇게도 넘지 못했던 벽을 넘었기에,
고통 따위는 잊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 천비."
"주, 주군..."
사문도의 음성이 강천비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음성이다.
"진정 강해졌구나. 난 네가 내 수하란 사실이... 자랑스럽다."
사문도를 직시하는 강천비의 눈에, 어느덧 희미한 눈물이 걸린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문도는 강천비를 들쳐업고, 비무장 밖으로 걸어나간다.
수하를 업고 나가는, 가슴 훈훈한 광경에 정사인(正邪人) 모두 하나같이 기립박수를
보낸다. 특등석 정중앙에서 이를 바라보던 주은비 역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허허... 보기 좋은 광경이옵니다, 공주마마."
"네. 자기 주군의 명예를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든 부하와, 그런 부하를 업고 가는 주
군이라니... 정말 멋져요."
관중들이 연이어 '강천비'를 외쳐된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주은비의 뇌리에 묘한
기분이 자리잡는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강 소협... 꽤나 준수한 편이었지...? 사 소협에 비하면 조족
지혈(鳥足之血)이지만, 뭔가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어...
내일이 꽤나 기대되는걸... 후훗!'
기대에 찬 표정으로 사문도와 강천비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는 주은비. 그리고, 이런
주은비를 바라보고 있는 이세혁.
'강천비... 상상외로 충성심이 강한 소년이로다... 저런 마음을 지닌 소년이, 무림에
서 썩고 있다니... 너무도 아쉬운 일이야...!'
잘 알고 있기에, 이세혁이 한탄을 해 본다. 강천비란 소년은, 억만금을 준대도 사문도
를 배반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강천비의 상처를 손수 봐 주고, 옷까지 새로 사다 준 사문도이기에, 강천비가 감격한
건 말할 것도 없다.
16강 경기도 모두 끝나고... 예상대로 이세혁과 모용화운 역시 쉽게 준준결승(準準決
勝)까지 올라왔다. 지금 떠오른 달만 지면, 이제 준준결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달 아래서, 뚫어져라 대진표를 바라보고 있는 흑의소년(黑衣少年), 사문도.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다.
'대영반(大領班) 나리께서 모시고 계실 만한 황족이라면... 당연히 주씨(朱氏)인 이
사람, 주은비...
아마, 만력제(萬曆帝)의 둘째 딸인, 표연공주(漂燕公主)님이시겠지...?'
명(明)에서 황족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자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만력제의 두 딸.
첫쨰는 표향공주(漂香公主) 주은희(朱殷熹). 도도한 성격이며, 그에 걸맞게 높은 학식
과 독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한다. 나이는 15세.
둘째가 사문도가 언급하고 있는 표연공주 주은비. 언니 주은희와는 달리, 선천적으로
무(武)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유순하며 겸손하다 한다. 황국(
皇國)의 공주답지 않게 서민적이며, 애국심이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다. 흠이라면 너무
착하다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착하다.
'몸이 약하다고 알려진 표연공주님께서, 언제 무예를 익히신 거지...?'
사실, 주은비가 항주(杭州)에서 휴양하고 있단 사실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탓에, 사
문도가 그 일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무예를 익혔다는 사실도 물론.
'천비 상황으로 봐서, 내일은 실력의 6할도 사용할 수 없다. 이길 수 있을까?'
사문도가 강천비에게 기권을 권한다면, 강천비는 기꺼이 기권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사문도는 강천비의 투혼을... 싸우려는 의지를 꺾기가 싫었다.
"후... 역시,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결국, 고민하던 사문도가 묵고 있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천비에게 물어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천비 녀석, 많이 피곤할 텐데... 지금쯤이면 자고 있진 않을... 응?'
유유자적하게 걷던 사문도의 발걸음이 딱 멈춘다.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던 시선을 왼
편으로 돌린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문도가 시선
을 돌린 쪽에, 한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누구지...?'
두 사람의 시선이 오고 간다. 먼저 빙긋 웃으며 가볍게 인사하는 소녀에게, 사문도가
가볍게 포권을 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린다.
사문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다름 아닌 주은비다.
'너무도 쓸쓸해 보이는 눈동자다... 이런 나이에 왜 저렇게 쓸쓸한 눈을 가지게 됐을
까...?'
사문도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상반된 감정이 숨쉬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잘생긴 용모 덕택에 아찔했고, 그에 어울리지 않게 차갑게 죽어있는 눈동자 덕택에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던 것이다.
'세상 모든 여인들의 심금을 울릴 사람이야. 아무리 언니라도, 저 사람에겐 못 헤어나
올 정도로...!'
사문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주은비가 고개를 들어 달을 한 번 바라본다. 그
리고 자신도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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