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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에서 정릉으로
어제(2011. 2. 4.) 강서구의 야산들을 휘몰아 돈 여세로 오늘은 강을 건너 답십리에서 북쪽 정릉까지 올라가보려 한다. 전에 아차산에서 올라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능선을 타고 갈 때 배봉산에서 천장산, 개운산으로 징검다리식으로 이어지는 야산들을 보며 ‘언제 저 야산들도 가봐야지’ 하는 것을 오늘에서야 실천해보려는 것.
답십리역에서 내려 우선 몸을 가볍게 비우기 위해 역구내 화장실로 들어간다. 기분 좋은 배설의 기운을 느끼면서 앞을 올려다보니 ‘신장개업 남자 마사지사’, ‘가슴 속까지 짜릿하고 황홀한 안마 겸 전신 마사지’. 그런데 남자 마사지사 광고를 왜 남자 화장실에 붙여놓았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광고를 계속 보니 ‘요금 5~6만원에 동성캉캉까지, 여자는 절대 없음’. 가만있자... 이게 무슨 말이야? 여자가 없고 동성이라면 호모들 얘기 아냐? ‘이런! 개자식들!’ 이젠 이런 변태들 퇴폐영업 광고가 이렇게 버젓이 붙어있네? 그런데 ‘캉캉’은 뭐야? 자기들끼리 쓰는 은어인가? 쓰다 보니 걷기 여행기의 시작을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되어 여태 써내려온 것을 지워버릴까 하다가 이런 것도 기록으로 남겨두자는 생각에 삭제하지 않고 그냥 남겨둔다.
9:50경 답십리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른다. 작은 동산이라 꼭대기에 올라봤자 주위 아파트를 누르지 못한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작은 녹지축은 답십리길로 잘려져 있다. 그나마 요즈음 올레길, 둘레길 열풍으로 잘려진 축을 육교가 이어주고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것은 육교 건너편에 녹지길 옆까지 녹지를 잡아먹고 들어온 골프연습장. 누가 여기에 골프연습장을 허가해주었나?
갑자기 절벽이 나타난다. ‘어? 여기에 이런 절벽이 있었나?’ 했더니, 그 밑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이 작은 녹지 동산을 무참히 잘라버린 상처. 이렇게 아파트 단지가 무참히 잘라버리니 건너편 배봉산으로 육교 연결할 수도 없다. 아파트 단지로 내려와 길을 건너 배봉산으로 오른다. 앞에서 꼭 무슨 동물처럼 생긴 바위가 고개를 외로 꼬고 올라오는 나를 쳐다본다. ‘왜? 평소 보던 놈이 아니라서 좀 이상하냐?’
배봉산은 그래도 아까의 답십리 공원보다는 좀 크다고 북쪽 경사면에는 눈이 그대로 있다. 이 배봉산 기슭 어딘가에 사도세자가 묻혀있었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세자이니 이 배봉산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였을 것. 효심이 지극하였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장 아버지 묘소부터 터가 좋은 곳으로 옮겨 제대로 된 왕릉에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무덤이 지금의 화성 융릉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가 즉위하고도 한참 지난 1789년(정조 13). 당장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기에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신하들 세력이 있어 안 되었다. 정조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힘을 길러 아버지를 융릉으로 모신 것이다. 그렇게 새로 이장한 융릉 앞에서 절을 할 때 정조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가다보니 녹색 울타리가 나타나고 길은 울타리 양쪽으로 울타리를 감싸며 간다. 무엇하러 울타리로 길을 둘로 나누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좀 더 가다보니 녹색의 산뜻한 울타리는 칙칙한 콘크리트 블록 돌담으로 변한다. ‘이건 또 뭐야?’ 하는데, 다행히 칙칙한 돌담은 금방 끝난다. 울타리 왼쪽은 제7 안식일 교회에서 세운 위생병원. 위생병원에서 배봉산을 사랑하는 주민들을 위하여 과감하게 블록 돌담을 산뜻한 녹색 울타리로 바꾼 것.
그런데 저 남은 블록 돌담은? 여기에 예전에는 이런 담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청계천 복원할 때 청계 고가 일부를 남겨 놓은 것과 같은 생각이겠지. '위생병원' 하면 예전부터 칙칙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렇게 변신을 하여 배봉산을 찾는 주민들에게 녹색의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보기 좋다.
배봉산을 내려와 영휘원으로 가는 길에 비구니 도량인 청량사를 잠시 들른다. 청량리에 있어 청량사인가, 청량사가 있는 동네라 청량리인가? '청량(淸凉)'이란 이름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이 시원한 공기와 맑은 샘물이 흐르던 청량한 곳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절 연혁을 보니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홍릉에 있던 절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홍릉을 조성하면서 이리로 옮겼다는군. 일본놈들에 의해 살해당하여 불에 태워졌던 명성황후, 그 억울한 죽음이 원통하여서일까? 고종은 무려 2년 2개월 동안 명성황후를 땅에 묻지 못하다가 겨우 이곳에 안식처를 마련해주었지. 이곳에서 쉬던 명성황후는 고종이 승하한 후 남양주의 홍릉에 묻힐 때 남편 옆으로 옮겨가고...
명성황후는 남편의 곁으로 옮겨갔지만 고종이 사랑하던 순헌귀비 엄씨는 이곳 영휘원에서 영면하고 있다. 옆에는 영친왕(의민황태자 이은)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 숭인원이 있고... 그러니까 할머니와 손자가 이곳에 같이 있는 것이군. 그럼 이진의 아버지 영친왕은 어디에서 영면하고 있지? 영친왕은 아버지 고종 옆에 있다. 나는 영휘원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겨, 먼저 나타나는 숭인원의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으로 향한다. 그런데 보통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되어 있는 참도(參道)가 여기는 하나로만 되어 있다. 왕자의 묘에는 참배할 일이 없어 신도만 만들어놓은 것인가? 영휘원은 그래도 제대로 신도와 어도를 갖추어 놓았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실질적인 황후였던 엄비는 양정의숙과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숙명여학교의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할 정도로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관파천 때 자신의 가마에 고종을 태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할 만큼 여걸이었던 엄귀비는 일제가 자신의 아들 영친왕을 신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데려갔을 때는 어미로서 그 찢어지는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영휘원 옆은 세종대왕 기념관. 바로 기념관으로 넘어가려 하나 출입구가 없다. 할 수 없이 다시 정문으로 나와 담벼락을 돌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간다. 기념관으로 오르는 오르막길 왼편에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세종대왕 신도비가 서 있다. 세종대왕의 릉인 영릉은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릉 옆에 - 국정원이 이사온 곳 - 있다가 여주로 옮겨 갔는데, 그 때 이 신도비는 버려져 있다가 순조의 릉인 인릉 근처에서 발견되어 1974. 5. 이곳으로 이전하였단다. 갑자기 뭔가 ‘후두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서서히 녹다가 갑자기 땅으로 낙하하는 소리.
신도비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하는데 글자가 깎여져 나가 읽기가 어렵다. 문종 때부터 왕의 행적은 실록에 다 기록하는데, 구태여 신도비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하여 이때부터 신도비는 없애고 비석만 세웠기에 영릉도 이장하면서 신도비는 버리고 간 모양인데, 그래도 1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 만에 완성한 신도비를 이렇게 글자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버려두어도 되나?
그런데 세종대왕은 왜 여주로 모셔갔을까? 내곡동의 원래 묘 자리는 세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터가 안 좋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세종의 고집으로 그대로 그곳에 세종을 모셨단다. 그러나 뒤이은 문종은 2년 만에 죽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도 죽는 등 왕실에 계속 안 좋은 일이 생겨 예종 때 세종의 릉을 여주로 옮기게 되었단다. 영릉의 터가 안 좋았던 것이 아니라, 세조의 할아버지 태종 자신이 왕자의 난으로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업보가 3,4대로 내려가는 것이었겠지.
오르막을 다 오르니 앞에 보이는 것은 ‘주시경 스승의 무덤’이라고 쓰인 비석. ‘어?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묘소를 일부러 세종대왕 기념관 옆에 모신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다가가서 안내문을 보니 묘비만 여기 갖다놓은 것. 그럼, 왜 묘비만 여기에? 선생이 1914. 7. 27. 돌아가셨을 때 원래 묘지는 은평구 신사동에 썼었단다. 그러다가 1960. 10. 1. 한글학회에서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옮겼는데, 그 후 다시 1981. 12. 12. 동작동 국립묘지의 국가 유공자 묘역으로 모시면서 묘비를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으~응~~ 그런 거였구나.’
묘비 왼쪽으로는 문인석과 무인석, 혼유석(魂遊石), 석양(石羊)이 서있다. 마찬가지로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버려져있던 이을 석물(石物)들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리라. 청계천 수표교(水標橋)에 세웠던 수표도 이곳에 있다. 청계천 복개공사를 할 때에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리로 옮겨왔다는 것인데, 이건 왜 이리로 옮겨 왔을까? 水標는 세종 때에 처음 나무로 만들었다가 성종 때 다시 돌로 만들었다는데, 청계천을 복원한 지금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기념관으로 들어가야지? 그런데 앞에 보이는 건물에는 기념관 간판은 보이지 않고 기념관 간판이 걸려있어야 할 자리에는 결혼식 광고판만 붙어있다. 오른쪽으로 또 건물이 보인다. 저긴가? 그런데 그리고 가야할 철문은 닫혀있다. ‘하! 이거 또 돌아가야 하나?’ 나는 그러기는 싫어 철문을 조심조심 밟고 넘어가, 눈여겨 보아둔 건물로 다가간다. 그런데, 어? 아니네? 그 건물은 KIET 산업연구원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세종대왕 기념관 영역이 아니다. 나는 뒤통수로 산업연구원 방호원의 눈길을 느끼며 연구원을 나와 빙 둘러 다시 아까의 오르막길로 오른다.
아까의 예식장으로 다가가니 바로 그 건물이 기념관. 이런! 안으로 들어가니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 기념관으로서의 엄숙함은 보이지 않고 이미 결혼식장으로서 오염되어 있다. 게다가 관람요금은 4,000원씩이나 된다. 이미 기분이 상한 나는 기념관을 이런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면 안의 전시물도 별 볼일 없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린다. 이미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않느냐고 애써 내 자신에 자문(自問)하기도 하면서...
세종대왕 기념관을 나와서 길을 건너는데 앞은 천장산 기슭에 자리 잡은 홍릉수목원. 바로 저 수목원 어딘가에 명성황후가 묻혀있던 홍릉이 있었겠구나. 천장산 반대편 기슭에는 경종의 릉인 의릉과 한국예술종합대학이 있다. 나는 한국예술종합대학 최고지도자 과정을 다니며 천장산은 몇 번 오르락 내리락 하였기에 수목원 안으로는 눈길만 던지고 길을 틀어 고려대 뒷산인 개운산으로 향한다. 북악산로를 따라 오르다가 고려대 기숙사로 내려간다. 기숙사 바로 밑의 개운사와 보타사를 잠깐 들러보려는 것. 기숙사를 증설하는지 한창 어수선한 공사현장 사이로 빠져 내려와 보타사를 찾았다. 미로 같은 골목길에 약간 헤맨다. 골목길 내의 집들은 저마다 하숙 친다며 고대생들을 부르는데, 그중에는 여학생만 받는다며 차별을 꾀하는 집도 보인다.
보타사를 찾은 이유는 절 뒤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보려는 것. 마애불의 영험한 기운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마애불 여기저기에 동전을 붙여놓았다. 그 앞의 제단에는 과일이, 곡식이 놓여있고, 치성을 드리며 태운 양초들이 줄 지어 있고... 마애불은 머리 위로 툭 튀어 나온 이맛돌을 쓰고 있는데 무겁지 않을까? 그렇게 보아서인지 마애불의 몸체는 약간 찌부런진 듯 부풀어보인다.
개운사 일주문으로 들어서는데 일주문 기둥에 뭔가 벽보를 붙여놓았다. 명도소송에서 이겨 강제집행 예정이니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진 퇴거해달라는 내용인데, 좋게 말할 때 나가라는 얘기. 벽보의 명의는 학교법인 승가학원 이사장. 여기에 원래 중앙승가대학이 있었는데, 지금은 김포로 이전하였다는데, 개운사도 승가학원 소유이구나. 그런데 2010. 10. 30.까지 나가라는 벽보가 아직 붙어 있는 걸보니 좋게 말하는데 아직도 안 나가고 있구먼, 어느 건물인가 둘러보니 마당 왼쪽의 5층 건물에도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저 건물 명도집행을 제대로 해야 절 이름 ‘開運寺’처럼 개운사의 운이 열리지 않을까?
다시 기숙사를 거쳐 북악산로를 건너 이제 개운산으로 붙는다. 개운산도 당연히 운이 열리는 산이겠지. 오르면서 보이는 화살표 위에 쓰여 있는 글자는 ‘개운산 둘레길’. 후후! 요즈음 전국적으로 둘레길이 유행하다보니 이곳도 둘레길이 있구나. 둘레길을 따라 산의 북쪽 사면으로 접어드니 이쪽은 아직도 눈이 그대로이다.
개운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대 밑으로 지나 전진하니, 갑자기 머리 위로 찻소리가 들린다. ‘군부대 찻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위로 올라가니 찻소리는 개운산 위에 자리한 스포츠클럽을 찾는 차량들의 소리. 스포츠클럽 옆에는 성북구 의회도 있다. 이런! 이 위에까지 건물을 세우고 차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나. 명색이 그래도 개운산인데... 개운산에 와서 영 개운치 않은 맛으로 개운산을 내려온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릉인 정릉으로 향한다. 정릉이 이곳 동네 이름이 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이고, 나 또한 이곳을 많이 지나다녔지만 부끄럽게도 정릉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릉을 찾아가는 길은 한적한 숲길을 지나가건만 정릉을 찾아가는 길은 완전히 주택가를 통과한다. 신덕왕후는 태조가 죽자마자 태종에 의해 덕수궁 옆의 정릉 안식처에서 이곳으로 쫓겨 왔는데, 지금 이렇게 후손들이 자기 안식처주위를 자기들 집터와 저잣거리로 만들어버렸으니 뭐라 하실까?
태종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이리로 옮기고, 신덕왕후를 왕비가 아닌 단순한 태조의 첩으로 격하시키고 신덕왕후에 대한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다. 하여 정릉은 200년 동안 아무도 찾는 이 없이 버려져 있다가, 선조 때 가서야 겨우 왕릉으로 복귀는 되었는데, 그 동안 아무도 찾는 이 없이 버려져 있었으니 처음에는 신덕왕후의 무덤을 어디로 옮겼는지 정확한 위치도 찾지 못하여 헤맸단다. 이렇게 선조 때 왕릉으로 복원은 해주었지만 태종의 눈치를 보느라 종묘에 왕비로 배향하는 것은 미루다가, 송시열의 상소로 현종 때 와서야 신덕왕후는 비로소 종묘에 배향되었다. 종묘에 배향하던 날 하늘에서는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 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는군.
묘역 안으로 들어가니 일본말이 들린다. 일본 아줌마 관광객들이 이 외진 정릉까지 왔구나. 일본 아줌마들도 신덕왕후의 슬픔을 듣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홍살문을 통과하니 정자각은 다른 왕릉처럼 앞에서 맞이하지 않고 왼쪽 능 밑에 있다. 지형 때문에 능과 정자각과 홍살문을 일직선상에 자리할 수 없었음이 눈에 보인다. 하긴 태종이 신덕왕후를 이곳으로 쫒아 보낼 때 묘자리를 제대로 보기나 했겠나?
정릉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 뒤로 나지막한 능선을 넘어가면 봉국사가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온 김에 그 봉국사마저 들러볼까 하나 저 능선을 넘어갈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정릉을 물러나와 빙 둘러간다. 정릉 바깥은 저잣거리의 사람들의 떠들썩함이 여전하다. 여기까지 걸어온 내 두 발에 봉국사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느낌을 더하게 한다.
봉국사는 태조 4년에 무학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다지기 위한 호국사찰로 창건되었기에 절 이름도 나라를 받든다고 봉국사(奉國寺). 그리고 이렇게 정릉 바로 옆에 있기에 정릉의 원찰 역할도 한다. 그렇게 나라를 받들려고 했건만 임오군란 때는 절이 홀라당 불타기도 하였다. 절 경내를 둘러보는데 특이하게도 용왕단이 있다. 용왕께서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까지 오시나? 관악산 관음사에 갔을 때에도 용왕각을 보았는데, 이런 내륙에서도 용왕을 모시는구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목표로 한 답사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니, 이틀 동안 빡센 걸음에 다리는 나를 좀 원망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애써 다리를 무시하고 뿌듯함을 감추지 않는다. ‘다리야! 이제 곧 안나푸르나의 그 높은 산속을 헤매고 다닐 텐데,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지?’ ‘그래! 전지훈련도 하는데 뭘~’ 나는 이제 곧 찾아갈 안나푸르나 산록을 머릿속에 상상해보며 정릉천을 따라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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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울이 이런 곳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