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자궁, 나는 태아…서재 있을땐 몸 달아오르지 |
|
고은 시인이 30년째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공간인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자택의 서재. 바닥에 쌓인 책 더미들 사이로 ‘책상에 이르는 길’이 나 있다. 안성/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⑤ 고은의 ‘30년 안식처’ 안성 집
“가슴 받힐 듯 강파른 고개 너머/ 거기 마음 놓아/ 지지리 지지리 못나도 좋아라/ 개새끼와 개 사이/ 그 살가운 것 아껴온 이래/ 그렇게 몇백 년인가/ 마을 앞 바람받이 늙은 팽나무 엄하시어라// 어디 이뿐이리오/ 마을 건너/ 샘 죽은 적 없이/ 언제라도 한 바가지 축나지 않으니 어쩌리오// 아이들 돌팔매질로/ 괜히 다른 쪽 언덕에서/ 후닥닥 꿩 날으는데// 아직 눈 녹을 줄 몰라 할아버지 팔짱 끼고/ 괜히 회오리바람 하나 만난다”(고은 <마정리> 전문)
문학 후반기 이끈 이층 양옥집
벽·바닥이 책장인 일층 서재가
‘만인보’ ‘백두산’ 등 작품 산실
고은 시인의 1970년대는 ‘화곡동 시절’로 요약된다. 제주 생활을 마감하고 67년 서울로 올라온 시인은 정릉과 연희동 등을 거쳐 73년 화곡동으로 이사했으며, 그의 화곡동 집은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산실 구실을 했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끌려가 죽음 직전으로까지 몰렸던 그는 82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뒤 이듬해 영문학자 이상화 교수(중앙대)와 결혼하면서 경기도 안성 공도읍 마정리에 정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정리에서 그는 <만인보> 전30권과 서사시 <백두산> 전7권, 소설 <화엄경>과 <선>, 그리고 올여름에 낸 두 시집 <상화 시편>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를 비롯해 이루 헤아리기 힘든 수의 시집과 산문집을 그야말로 쏟아냈다. 낮은 구릉 지대에 자리잡은 그의 이층 양옥집은 고은 문학 후반기의 대폭발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그 이층집의 일층에 시인의 서재가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거실이고 왼쪽이 시인의 서재. 서재는 두 개의 방으로 되어 있어서, 안쪽 방에는 의자가 딸린 책상이 있고 바깥 방에도 앉은뱅이 책상 두 개가 있다. 시인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그리고 원고의 성격에 따라 세 개의 책상 중 하나를 골라잡아 쓴다. 창문 있는 쪽을 뺀 나머지 벽에 모두 책장이 서 있고 책장에는 이렇다 할 체계나 원칙을 짐작할 수 없게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그나마 책장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바닥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책들의 담 사이로 책상에 이르는 길들이 지그재그 나 있는 셈이다. 이 책들 말고도 전집류나 묵직한 참고도서처럼 이따금씩 보게 되는 책들은 지하의 서고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참, 책은 과거가 아니야. 열여덟에 읽은 책도 지금 읽으면 전혀 처음 읽는 책 같아요. 책처럼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게 없어. 나는 책이 자궁이고 내가 태아인 것 같아요. 서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몸이 달아오르지.”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응해 포즈를 취하느라 책 하나를 집어들어 읽던 시인이 문득 무릎을 친다. 천문학 책이었다.
“아, 이것 봐! ‘준성’(準星)이란 게 있네. 불확실한 별이라…. 뱃속에 있는 태아 같은 거겠지? 이런 말을 만나면, 아, 미치지!”
시인은 이렇듯 느닷없이 ‘발견’하는 독서의 기쁨이 크다고 했다. “잃어버렸던 돈을 장롱 안에서 문득 찾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체계적인 독서보다는 우연에 기대는 즉흥적인 책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책장의 책들을 도서분류법 같은 계통에 따라 정리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책이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알고 있다.
|
고은 시인의 책상 위에는 손으로 쓰다 만 원고와 뿔테 안경이 놓여 있었다. 안성/이정아 기자 |
그가 작업하는 책상 위에는 역시 계통 없이 쌓인 책과 온갖 프린트물, 수십 권의 메모 수첩과 원고지가 놓여 있다. 시인은 주로 원고지에 볼펜으로 글을 쓰지만, 때로는 신문에 끼워져 오는 광고지의 이면 역시 흔쾌히 원고지 대용으로 쓴다.
“종이가 아까워서. 그냥 버리면 천벌 받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은 나무를 죽여 가며 사는 존재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천벌을 덜 받으려면 종이를 아껴야죠. 백지는 내 종교예요. 보면 절 안 할 수 없고 달려가서 껴안지 않을 수가 없어요.”
보물찾듯 ‘즉흥적 책읽기’ 선호
해외강연 등 일정 잠시 줄이고
작업-산책 반복하며 대작 구상
지난여름의 시집 두 권 이후 요즘 시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새로 쓴 시들이 50여 편 정도 되지만, 그보다는 <만인보> 이후의 또다른 대작 구상에 골몰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덩치 큰 주제가 10여 개나 된다는 것. “동쪽에서 쌓아 놓은 지혜와 서쪽에서 쌓아 놓은 이치를 종합시키는 어떤 것도 해야 하고, 조국 한반도의 그 무엇도 그려야 하고, 아시아의 구비서사도 건드려야 하고. 온갖 주제들이 거미줄에 달린 이슬방울처럼 뒤숭숭”하다. 어쨌든, 이번 겨울부터 손을 대서 내년 봄쯤에는 원고지 1200장 정도의 대작 하나를 신작 시집과 같이 낼 계획이다. 꼭 소설은 아니어도 장르를 지워 버리는 형태가 될 것이라서 보르헤스도 다시 읽고 있다. <만인보> 보유(補遺)도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다른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늘 방선(放禪)이더라// 어디 곱씹을 삶이라는 것/ 슬픔뿐이랴/ 기쁨뿐이랴/ 그냥 망연자실의 한동안들도 삶이더라// 오늘도 마당의 살구나무 보다가/ 콧노래가 슬몃 나온다/ 내일도/ 책 보다가/ 입 달싹여/ 슬몃슬몃 노래가 나오리라”(<근황> 앞부분)
다음 작업을 위한 준비도 할 겸 요즘은 가능한 한 집에 있으려 한다. 한때 잦았던 해외 걸음도 일년에 네 차례 정도로 줄이고 있다. 국내 강연 요청도 많지만,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한 달에 서너 번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나가서 놀면 좋지만, 그리 되면 공부도 못하고 일도 못하니까.” 이런저런 사회적 요구가 많지만, 일주나 이주에 한 번 정도만 외출하려 한다. 그리고 나가면 가능한 한 막차를 타고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편이다. “아내와 같이 있고 싶기 때문”이다.
“해가 진다/ 사랑해야겠다/ 해가 뜬다/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너를 사랑해야겠다/ 세상의 낮과 밤 배고프며 너를 사랑해야겠다”(<상화 시편> ‘서시’ 전문)
집에서의 일과는 비교적 단순하다. 예닐곱시쯤 일어나서 오전에 작업하고, 점심 먹은 뒤 집 앞 한천 둑길을 30~40분쯤 산책하고는 오후에 다시 작업하며, 저녁 먹은 뒤에는 주로 책을 읽는다. 가끔은 저녁 뒤에 산책을 하기도 한다.
차령산맥이 건너다보이는 일층 거실 벽에는 미술사학을 전공한 딸 차령씨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시인 자신도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2008년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림에 관한 꿈은 여전해서, “큰 덩어리 하나를 하고 쉴 때쯤, 화실을 마련해서 그림도 다시 그리고 싶”단다.
시인 겸 소설가 김승희가 ‘파란과 신명’이라 표현한 시인의 생애도 내년이면 80 고개에 올라선다. 그러나 시인은 팔순에 맞춘 별다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역시 내년이면 그의 안성 생활도 30년째에 이른다. “30년쯤 살았으니까 새로운 삶을 살아 보고 싶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다. 2008년 전시 당시 후배 작가 정도상은 그의 그림 세계를 ‘동사(動詞)를 그리다’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고은 시인의 삶이야말로 영원히 움직이는 존재, 동사형 존재라 할 법한데, 그런 것치고는 그의 안성 생활은 예외적일 정도로 길었다. “내 위치는 아직도 움직임 속에 있다”며 “유목민과 같은 행(行)으로서의 존재”를 자처하는 고은 시인. 그는 지금 또다른 탈주와 이동을 꿈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