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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사순절 세 번째 주일)
요한복음 18:15~27
그날, 닭이 울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내러티브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른 일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앞에 섰을 때, 문 지키는 여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특별히 허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죠. 더군다나 오늘은 재판이 열리는 날이니 당신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베드로는 문밖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안에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베드로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납니다.
이런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동행했던 또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던 관계였죠. 그래서 그는 무난히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제자는 문밖에 서 있는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 지키는 여자에게 다가가 베드로를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뜰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여인에게 뜻밖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이지요?” 이 여인의 말투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분명 그 여인의 말투는 약간 경멸하는 분위기였죠.
베드로는 조심해서 대답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만일 함부로 대답했다간 자기도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여겼지요.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오.” 이것이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칼을 꺼내, 제사장의 종을 쳤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칼로 종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이 일은 정말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저는 왜 그 시간에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가 등과 횃불과 무기로 무장한 경비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칼을 꺼내 자기 스승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이미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고 약속했던 베드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품고 있던 칼은 스승을 지키기 위한 제자의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충성스러웠던 베드로가 어떻게 문 지키는 여자의 질문에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그날은 몹시 추웠습니다. 베드로는 한쪽에서 불을 쬐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슬쩍 그들 속에 들어가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사이에 대제사장과 예수님 간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꽤 오랜 시간 군중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혹시 무관심, 혹은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 뭐 이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것들을 느낍니다. 저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무심히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서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멀찍이 예수를 뒤따랐듯이, 그는 현재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했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추운 날씨는 혹독한 현실을 반영하고, 따뜻한 모닥불은 일종의 위로를 선사합니다.
예수님의 상황은 혹독해 보였습니다. 굳이 베드로가 나서서 그 추위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 틈에 끼어 사태를 파악하고, 진행되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처세술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에게는 따뜻한 불이 필요했고, 무리 속에 끼어 있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습니다.
어떤 분이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나고 집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아홉 살 먹은 딸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놀고 왔어?” 딸의 질문을 받고 아빠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럼, 사이좋게 지내고 왔지. 그런데 아빠 나이가 되면 그런 질문은 필요가 없어. 우리는 너희처럼 친구와 다투거나 하지는 않아. 다음부터는 차라리 이렇게 물어봐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빠, 친구들을 진심으로 만나고 왔어? 그래서 즐거웠어?’라고 말이야.”
여러분, 어른들이 애들처럼 잘 다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가 나이 들어 성숙해져서 그럴까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다툼이 일어날 만한 관계를 애초부터 회피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혹 우리가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마음을 갖지 않고 사람을 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경우라면 우리가 남들과 다툴 일도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싸우면서도 서로 친하거든요? 반대로 어른들은 싸우지 않는데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서로 연결되려다 보니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연결이 아니라 단절되려다 보니 다툼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다투면서 친해지지만, 어른들은 친한 척하면서 다투지 않습니다. 과연 어떤 이들이 더 성숙한 것일까요?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로스에서는 벌거벗은 몸이 만나지만, 우정에서는 벌거벗은 인격이 만납니다.”
우정으로 가득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할 때, 준비된 상태로 만나야 하고, 가면을 쓴 상태로 만나야 하고, 지어낸 이야기로 만나야 하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지요.
-출처: 손성찬, 「사랑하느라 힘든 당신에게」(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3년 11월호), 173쪽에서 재인용.
과연 군중의 틈에 끼여 모닥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친구의 우정을 발견합니까? 아니면 현실을 회피하려는 자기 중심성을 발견합니까?
닭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던 이야기는 베드로의 자기 중심성을 고발합니다. 닭 울음소리는 그의 잘못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고발했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린 일을 목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혈기를 부르며 칼을 휘둘렀을 때 피해를 본 사람이 자기 친척이었기에, 이 사람은 베드로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당신이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라고 반문했을 때 베드로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위의 차가운 시선이 베드로에게 향했고, 베드로는 당황했겠지요. 그가 “나는 아니오.”라고 이야기했지만, 궁색한 변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양심의 소리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닭의 울음’이었습니다.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가 쓴 「고자질하는 심장」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쩌다 사람을 죽이고 그 시신을 지하실에 암매장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완전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하실 근처만 가면 죽은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죽어서 파묻었는데 그곳에만 가면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지하실 근처에서만 들렸던 이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는 주인공이 어딜 가든 따라다닙니다.
식당에 가도, 침실에 가도, 집 밖에 나가도 둥둥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분명히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계속 들립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입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어느 날 주인공은 홀연히 깨닫습니다. 이 심장 박동 소리가 죽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임을 말입니다. 아무도 그 살인 현장을 보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심장은 그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임을 고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고자질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출처: 박만, 「인생의 질문 신앙의 답변」(새물결플러스,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7월호), 109쪽에서 재인용.
베드로를 일깨운 건 닭 울음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잊고 있던 그 말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마 26:75).
저는 베드로가 느꼈을 감정이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혹독한 추위 앞에서, 그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따뜻한 불로도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니라, 나는 아니라” 부인할수록 그를 고자질하는 양심의 심장은 박동을 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나 대조될 정도로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현실의 혹독한 추위를 느끼는 사람은 베드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더 심한 추위를 느끼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독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너무나 당당하게 현실과 맞서 싸우십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대던 베드로의 의기(義氣)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칼은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 칼은 돌고 돌아 결국 칼을 휘두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셨고, 잘못된 폭력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20~21절).”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절).”
베드로와 대조되는 예수님의 당당함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 진리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당당함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셨고, 진리에 대한 순종을 결심하셨습니다. 거기에서 그분의 당당함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당당함은 잘못된 권력과 폭력에 대항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때로는 칼에 베인 사람을 치유하는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시며,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신 분은 억압당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눅 22:51).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진리에 대해 순종을 결심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는 강인함과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 옳고 좋습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던 베드로마저 현실을 회피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그런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실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도 베드로처럼 똑같이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누가 크게 보입니까?
요한복음을 저술했던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에 맞서 싸우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은 때로 성경의 문학구조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샌드위치는 양쪽에 빵 조각이 있고, 그사이에 고기나 야채, 소스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18절에서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25절에서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사도 요한은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마치 샌드위치를 구성하는 양쪽의 빵 조각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빵 조각 사이를 채우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실 때,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본문의 초점은 베드로의 연약함도 아니고, 베드로의 회개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초점은 혹독한 현실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시고, 바른 교훈을 전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베드로처럼 연약함을 회개해야 한다”라는 교훈보다는 “우리가 혹독한 현실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시고, 바른 교훈을 전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베드로처럼 넘어지더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로역정」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크리스천이 오랜 여행 끝에 천국 도시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도성에 거하는 주민을 보호하는 무기가 보관된 창고를 구경합니다.
그 안에 어떤 무기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나팔’과 ‘부서진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격 미달이었던 기드온을 통해 승리를 거두신 하나님이 쓰신 도구였습니다.
-박희석, 「은혜는 내일 오지 않는다」(국제제자훈련원, 2020);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3월호), 243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나팔과 부서진 항아리들처럼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진리를 전하는 일에 당당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베드로처럼 넘어질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