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의 풍금"을 시청하고
德田 이응철
찰거머러처럼 팬더믹 코로나19가 기생하여 계절이 바뀌어도 떠날 줄을 몰라 아우성이다.
작은 짐승이 되어 방콕 집콕하던 구월의 첫주였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내 마음의 풍금이란 영화를 발견했다.
1999년 개봉된 예전의 영화로 사범학교를 나와 강원도 산골 신리마을로 간 이병현 수하선생과
전도연 홍연제자와의 사랑이야기가 참으로 아름답게 전개된다. 평생 교육자로 마침표를 찍은 내겐
얼마나 정겨운 영화인가! 동병상련인가! 퍼뜩 42년전 첫부임지가 갑자기 무럭무럭 피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69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장을 받고 태백준령을 넘어 찾아간 첫부임지는 동해안 최북단 어촌 고성 대진초교였다. 20세 약관의 나이에 교육을 불사른 초년생, 전형적인 내륙토박이에서 어촌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니 모든 것들이 마냥 새로웠다.
철썩이는 바닷물을 찍어 맛도 보고 , 책에서만 보던 등대를 직접 만져보았다. 미술시간에 바다그림을 그리는데 신기한 것은 무엇인가? 고기를 그리는데 녀석들은 고기 이름을 모두 말하는거였다. 황어, 명태, 고등어 숭어, 배도미 등등-.
무엇보다 처음 접한 것은 사투리였다. 아니예요를 아니래요,선생님요-라고 부른다. 당시 어촌은 명태와 오징어가 풍어를 이루어 경기가 한창이었다. 덕장에 고기가 사시사철 촘촘이 그네를 타고, 바닷가 술집은 한집건너 한집 술집 잡부가 수십명씩 우글거려 마치 통일신라시대 같이 노랫가락이 끊이질 않단 그 시절!
처음 3-4반을 담임했다. 남녀 혼합반이다.
모든 교사가 새벽이면 배도미 낚시를 방파제로 낚시를 나간다. 해변에 톡톡이를 미끼로 쓰는데 애들이 잡아병에 넣어가지고 와서 준다. 총각선생이라 홀어머님을 모시고 생활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교통편이 안 좋아 새벽에 춘천서 버스를 타면 저녁 때나 도착한다. 하루종일 완행버스에 시달린다. 찐계란, 자르지 않고 깨소금에 둘둘 말은 김밥을 씹으며 당시 딘일로라 군인들 통제가 심하던 진부령을 넘곤 했다.
내 담임반에 임양숙이라고 지금도 기억된다. 의족으로 두 다리를 전혀 쓰지못해 할머니가 엎고 등교를 한다.
할머니가 바쁠때면 하교를 못해 혼자 울고 있으면 내가 엎고 마을 꼭대기 언덕길을 데려다 주곤 했다.
당시만 해도 전기밥솥이나 전기밥통이 없어 늘 아랫목 담요속에 주발을 묻어놓고 막내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 막국수집 사랑을 월세로 얻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방과후면 숙직실에선 마작이 한창이다. 선생들이 흥청거리며 시간 보낼 때, 대학에서 아동화를 전공한 총각선생은 오자마자 미술반을 맡는 등 용기백배했다. 누구 눈치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 각반에 그림선수를 뽑아 방과후 미술지도를 했다. 시군 실기대회에서 입상, 도 실기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판화와 생활화를 지도했는데 도에서 모두 은상을 수상해 기염을 토했는데, 아뿔싸! 끝나고 중앙시장에서 판화출전 5학년 아이를 잃어버려 몇시간씩 찾아 헤매던게 떠오른다.
바다는 풍어기라 개가 명태를 물고 다닐 정도로 명태가 지천이었다. 봄이면 미역과 성게를 따서 해변에 온통 검을 정도로 미역을 널어 말린다. 애들 학교도 안보낸다. 학교는 서둘러 어번기를 한다. 여름엔 오징어가 지천이고 겨울엔 명태-.젖은 명태 한 리어카에 지금 돈 5천원-. 눈이 많이 온 겨울이면 간성까지 동해북부선 옛철로길을 따라 경리선생과 무릎까지 오는 눈길로 돈자루를 걸머지고 오기도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국어선생님 존키팅 선생님만은 못하지만 나 또한 그런 스타일로 가르쳐야 직성이 풀린다.
구태의연하게 칠판과 백묵에 의지한 일제 수업보다 아동중심의 수업으로 유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때 가르친 녀석들이 지금도 가끔 전화가 온다. 함께 늙는다.
무엇보다도 활기차게 교육에 전념했던 것이 어머님이 멀리까지 오셔 조석을 끓여주셨기 때문이다.
얼마 안되는 월급봉투를 타오는 날이면 어머님 표정은 환하시며 너무 좋아하시던지-.
봉급이 적어 당시 한 달간 외상 놀음이다. 연탄, 쌀, 반찬 식료품들을 외상장부에 적곤 봉급날 어머니는 갚으로 다니신다. 아니 방에 돈을 분류한다. 연탄값, 쌀값, 식료품가게 줄 것 등, 그리고 싱글벙글하시며 좋아하시던 총각선생 모친-. 그런데 당시 불효자처럼 혼자 자취하는 선생이 부럽기 그지없었으니 ㅎ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오는지 동해안은 다설지다. 비포장도로인 당시 차가 거진(巨津)까지만 오고, 길이 나빠 버스운전수들이 마음대로 운행을 멈춘다. 거진서 대진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야 했다.
내마음의 풍금에서 총각선생인 이병헌은 처녀선생인 이미연을 좋아하지만 끝내는 미국으로 떠난다.
17세 제자 전도연이 선생님을 사모한다. 나역시 임시 강사쯤 되는 처녀선생이 양복을 대려준다고 하다가
태운 일도 있고, 서울서 온 흰피부의 강사선생도 오빠가 만화가라고 으스대며 접근, 함께 화진포에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청보리가 필 때면 서울 여선생은 낭만을 늘 나와 함께 누리고 싶어 안달이다.
방학을 해 고향 서울로 갔다가 개학하면 늘 수채화같은 멋진 넥타이를 사다가 매어주던 이명숙선생-.동양화 사군자에 능했지만 내 그림을 더 좋아해 그의 방에 온통 도배를 할 정도였지, 지금은 어디서 행복할까!
"내마음의 풍금" 을 시청하면서 옛 정경들을 접해 영혼이 푸근했다.
옛소방장비, 손다리미, 등잔불, 연극, 자습이란 칠판 글씨, 엔딩크레딧이 해피앤드로 끝나 훈훈했다.결국 총각선생과 사모하던 전도연과의 결혼사진,주례는 교장선생님이다. 정말 당시 우리 학교에서 그런 결혼이 있어 지금까지 강릉서 살아간다.
이화여대 별장가-.나를 좋아하던 명숙선생은 혼자 금모래만 자꾸 파며 흰 정갱이를 보이고 끼룩대는 갈매기를 보고 한마디 하던 게 지금도 생각난다.
-선생님! 여자가 옆에 있을 때는 그림그리는 걸 여자는 안좋대요.ㅎ
내 영혼을 맑게 했던 초임지-. 무엇보다도 홀어머니로 막내자식 떡장사해며 키운 보람을 맛있게 퍼마신 곳이기에 늘 그곳이 고맙다. 방학을 하고 잠시 고향을 다니러 올때면 학부모들이 챙겨준 마른 명태, 명란젓
,창란젓 돌김, 미역,꾸덕한 동태, 말린 오징어, 문어까지 바리바리 싸주신다. 어머니 입은 다물지 못하지만 그 때부터 내 눈치를 보기 시작이다. 엄청난 화물이 아닌가! 차에서 빨리 내려 특히 딸네들께 나누어 주며 행복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 많은 위안이 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와 대진을 찾고 42년전에 가르친 초도리 학부모님댁에서 1박을 하며 옛이야기를
했는데 아뿔싸! 이제 부모님이 모두 천상에 가시고 제자만이 홀로 반기며 옛 이야기 한다.
봇물처럼 쏟아진 첫부임지 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다. 내마음의 풍금이 뇌관이 되어 자꾸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철썩인다. 화진포는 내겐 추억의 앨범이다. (끝)
[프로필
1997. 수필과 비평(27호), 96.강원일보 신춘문예 동화입상
저서 수필집 어머니의 빈손 外 3권, 시화 개인전 1회
수상 강원수필문학상,춘천시민상, 백교문학상
교직 42년, 제 14대 강원수필문학회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