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 아들 등에 업혀 '꽃구경' 가는 어머니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가장 슬픈 '꽃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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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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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모더니즘 시인 T.S.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지만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은 참으로 '화려한 달'이다.
길바닥 돌 틈 사이에서 피어나는 키 작은 야생화부터 매화, 산수유, 목련, 벚꽃,
산모퉁이 조붓한 길가의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봄꽃들의 릴레이 경주로 세상은 마치 LED 전등을 켜놓은 듯 환하고 화려하다.
그야말로 화란춘성(花爛春盛)이요 만화방창(萬化方暢) 꽃 시절이다.
이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다.
시보다는 소리꾼 장사익의 <꽃구경>이라는 노래로 더 잘 알려진
김형영 시인의 시 <따뜻한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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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영 시인(1945, 01~ 2021, 02) |
ⓒ 문학과 지성 |
일상에서 소박하고 진한 서정과 깊은 영혼의 소리를 포착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형영 시인은
1945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2021년 2월 15일 향년 77세를 일기로 귀천(歸天)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가 김동리에게 소설을 배웠고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 시인으로부터 시를 사사하였다.
1970년부터 30여 년간 월간 <샘터>에 근무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각설하고 이쯤에서 그의 시 '따뜻한 봄날'을 감상해보자.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웅큼 한 웅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김형영(1945, 01~ 2021, 02) '따뜻한 봄날' <문학사상> 1983
요즘처럼 아지랑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이다.
아들은 갈수록 야위어가며 기력이 쇠해진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꽃구경을 나간다.
꽃구경 가는 모자의 모습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리고 있는 이 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시대에 늙고 병든 부모를 지게에 지고 가서
산속에 버렸다는 풍습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장(高麗葬)'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하지만 고려장은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고려장이라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고려장이 우리 풍습으로 고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동화집>에서 비롯된 일제의 왜곡된 창작물이다.
고려장이 일제강점기 때 날조된 설화라는 사실적 근거와 관계없이 시를 읽는 순간,
질박한 서정적 시어들은 점차 가슴 시린 정한(情恨)으로 변주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어머니의 육성이 들리는 마지막 연에 들어서면
제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가슴이 턱 막히며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리꾼 장사익의 절창으로 재탄생한 슬픈 '꽃구경'
1983년 세상에 나와 뭇사람들의 절절한 언어가 된 김형영 시인의 '따뜻한 봄날'은
소리꾼 장사익의 음표와 목청을 빌려 '꽃구경'이라는 또 다른 절창(絶唱)으로 재탄생한다.
먼 옛날부터 시와 노래는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장사익은 김형영의 풍부한 시어에
자신의 감수성 짙은 가락을 붙여 세상에서 제일 슬픈 꽃구경이라는 한 편의 뮤직 드라마를 연출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두루마기. 우리 전통악기 해금으로 시작되는 애절한 전주.
뒤이어 무반주로 이어지는 장사익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비수가 돼 듣는 이의 가슴 밑바닥을 콕콕 찌른다.
https://youtu.be/X_Dwp_vYzvE?t=38
▲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
ⓒ KBS |
가장 한국적인 전통 가락의 노래는 시간을 한참이나 뒤로 돌려 배고프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소환한다.
전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먹을 것이 없던 '보릿고개'는
매년 봄이 되면 꽃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아픔이었다.
요즘이야 오래 사는 게 축복이지만 그 시절에 장수하는 노인은 죄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춘궁기'(春窮期)가 돌아오면 궁핍한 살림 탓에 늙고 병든 부모를
깊은 산중에 버렸다는 고려장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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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
ⓒ KBS |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없고 꽃구경을 나선다.
아들 등에 업힌 어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의 넓디넓은 등짝을 생각하며 잠시 동안 행복했을 것이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 산자락에 접어들자 아이구머니나 화들짝 놀라며 지금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차린다.
곧바로 어머니는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파란 솔잎을 한 웅쿰씩 따서 가는 길 위에 뿌린다.
당신이 버려지는 것보다 깊은 산속에서 행여 아들이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인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갈 때 길을 잃지 말라고 푸른 솔잎을 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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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
ⓒ 임영열 |
이때 쿵쾅! 하고 가슴을 치는 북소리와 함께 들리는 어머니의 육성.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관객석은 이내 눈물바다를 이룬다. 이 노래의 작시자 김형영 시인도 "아, 내 시가 이렇게 슬픈 시인지 몰랐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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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어머니 무덤가에도 붉은 명자꽃이 피었습니다 |
ⓒ 임영열 |
대한민국 소리꾼 장사익(1949~ )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74살이다.
생계를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45살까지 무려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겪었던 다양한 체험을 자양분 삼아 그는 마흔여섯 늦깎이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유명 시인들의 시에 자신이 곡을 붙인 것과
흘러간 대중가요를 자신의 스타일도 다시 부르는 것이다.
아름다운 노랫말에 장사익의 음표와 특유의 창법이 결합된 가장 한국적인 그의 노래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끈적끈적한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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