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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POET
문학과 사람 2025년 봄호_FOCUS POET_이정록 시인의 시와 에스프리
작성자:문학과사람(다음카페)
이정록 시인의 詩와 에스프리
시로 쓴 자화상
시
주걱
나무 한 그루
풋사과의 주름살
나에게 쓰는 편지
남의나이
식구
의자
실소
짐
다듬는다는 것
그럴 때가 있다
시
- 어머니 학교 10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 어머니 학교(열림원,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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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쓰는 시란 거, 그거 다 내 얘기 베낀 거라며?” “그냥 엄니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꾸며서 쓴 거예요.” “선생이 거짓말하면 못써.” “그러니까 진짜처럼 잘 다듬어야지요.” “어미가 시가 뭔지 가르쳐줄까?” “시도 아세요?” “얘가 나를 아주 흑싸리 껍데기마냥 무시하네. 꼭 학교에 댕겨야만 배우냐? 시를 왜 물러? 내가 시집살이가 몇십 년인데. ‘아리랑’이며, ‘한오백년’이며, ‘이미자’며, ‘조용필’이가 몽땅 시 아녀?” “와, 엄니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으시네요.” “시 쓸 때 말이여, 뜸을 잘 들여야 해. 사람 마음 움직이는 건 연애고 노래고 간에 시간 싸움이여. 슬쩍 무시하면 시란 놈이 안달이 나서 생각을 막 줄 거 아니냐? 그때 살살 꼬여서 노래를 불러주는 거지. 업은 애기한테 자장가 불러주듯이 시한테 막 고맙다고 노래를 불러주면 지가 어디로 가겠냐? 흥얼흥얼 널 쫓아댕기겠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살림의 문학을 더 생각한다. 시를 끌고 빌딩 피뢰침 끝으로 올라가지 말자고 다짐한다. 작가는 고립으로 높아지는 게 아니라, 연대로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속담보다도 더 낮은 부뚜막으로 가자. 독자의 마른 입에 토끼풀잎처럼 단순한 기쁨을 선물하자. 토끼풀 꽃대처럼 고고한 울대의 자존을 갖자. 저 낮은 초록 안에 행운과 행복이 있다. 시가 엄마! 라고 나를 부를 때까지.
주걱
주걱은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나무라면, 나도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나를 패서 나로 지은
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눈물 흘려보는 것, 참회도
필생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뜨건 밥풀에 혀가 데어서
하얗게 살갗이 벗겨진 밥주걱으로
늘씬 얻어맞고 싶은 새벽,
지상 최고의 선자(善者)에다
세 치 혀를 댄다, 참회도
밥처럼 식어 딱딱해지거나
쉬어버리기도 하는 것임을,
순백의 나무 한 그루가
내 혓바닥 위에
잔뿌리를 들이민다
-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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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걱은 그 모양새가 나무로 만든 거울 같다. 봄 여름과 가을 겨울이 짝을 이뤄, 강강술래 춤을 추는 나이테가 있다. 물과 햇살이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결을 이룬다. 나는 나무 주걱을 거울로 쓴다. 밥을 풀 때마다 뉘우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을 건네는 주걱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나는 밥통 같은 사람,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게 다 다른 이의 덕분임을 잊지 말자. 하지만 참회는 번번이 쉬어버리거나 딱딱해진다. 주걱에 붙은 밥풀이나 떼어먹는, 내 마음은 빈 밥솥처럼 어두워진다. 이 시에는 윤회사상이 깔려 있다. 내가 나무로 돌아가서 다시 주걱을 탄생하고 싶은 간절한 기도가 있다. 주걱은 도끼질과 톱질과 대패질을 지나, 오로지 밥그릇에 채워주는 희생이 있다. 주걱과 같은 따스한 시를 쓰고 싶다. 아니면 밥주걱 같은 종이가 되고 싶다. 살갗이 벗겨지는 고행은 훈장이다. 착한 사람이 되어 세 치 혀를 반성하면서 진실을 노래하고 싶다. 참회도 밥처럼 식으면서 딱딱해지기도 하고 쉬어버리고 하리라. 참회도 산 자만의 축복이다. 종이는 늘 소복을 입고 죽어가는 영혼의 말에게 장례식을 치러 준다. 혓바닥이 잔뿌리를 거두는 날까지, 시인은 제가 키운 나무주걱으로 자신을 후려 팬다.
나무 한 그루
내 棺으로 쓰일 나무가
어딘가에서 크고 있다
한 그루 한 그루
뿌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산을 이루는가
하늘의 품은 하도 넓어서
나뭇잎 간혹 새처럼 치솟는다
밑가지를 버리고 순을 틔우는 나무
껍질에 딱딱한 벌레를 감싸며 그늘을 내려놓는
나무는 내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경험한다
목숨을 걸어야 내 할 수 있는 일
나는 누구의 따뜻한 棺이 될 수 있을까
나를 집으로 삼을 벌레들아
여기 나이테만 촘촘한 괴목이 있다
>
내 棺으로 쓰일 나무 한 그루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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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언제나 좋은 선생님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때는 나무의 우듬지를 본다. 세상 모든 나무는 우주의 중심에 머리를 둔다.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왜 없을까. 슬프거나 부끄러울 때마다 능수버들을 생각한다.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는데, 한껏 키가 자란 공작단풍과 수양벚나무를 떠올린다. 나무는 가지 하나 내뻗을 때마다 사람 인(人)자를 쌓아 올린다. 그러므로 나무 안에는 참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가지 하나 내리칠 때마다 나무는 다시 들 입(入)자를 늘어뜨린다. 내가 다리 한 번 내뻗고 팔 한 번 휘젓는 것이, 저 나무처럼 사람을 들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뿌리는 또 얼마나 많은 글자로 나를 떠받치고 있는가. “내 棺으로 쓰일 나무 한 그루/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도대체 어딜 보고 사는 거야? 나무는, 오늘도 날 나무란다. 나를 나무라고 한다.
풋사과의 주름살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塔(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落果(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內部(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鳶(연) 살처럼, 內面(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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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라는 시집이 출간되자, 아내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세놓고 싶다고 하지, 세 들고 싶다가 뭐냐고 샐쭉댔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팔아 봐야 오백만 원도 안 될 것이라면서 투덜댔다. 하지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의 보잘것없음의 위대함에 주목한다. 내부로 가는 탯줄의 당당한 생명력과 내면을 팽팽하게 당기는 힘줄의 자존심을. 만물을 지키는 씨줄과 날줄의 따스한 관계를. 그 둥근 아름다움을.
나에게 쓰는 편지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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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동네는 충남 홍성군 홍동면 대영리 황새울이다. 황새는 큰 새를 뜻한다. 그래서 크다는 뜻의 ‘’과 새라는 뜻의 ‘사이’가 합쳐져서 ‘한사’라고도 부른다. 한자로는 寒沙(한사)라고 쓴다. 풀어보면 ‘찬 모래’라는 뜻이다. 나는 이 찬 모래라는 뜻이 좋아서 한사를 또 다른 내 이름으로 쓰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지명이니, 나름 민족 정체성을 지키자는 각오로 삼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시는 마을이 나에게 준 시다. 그러고 보니 내 시의 태반(太半)은 태반(胎盤)이 준 시다.
「나에게 쓰는 편지」는 정신의 온기를 말하고 있다. 미숫가루보다도 잘 풀어지는 게 정신이다. 좋은 게 좋다고 느끼는 순간, 타락의 수챗구멍에 처박히고 만다. 모나게 살자! 다짐해도 마음의 모서리는 부드러워서 금세 빈 쌀자루처럼 주저앉는다. 하지만 냉기만으로 되는가? 서리 매운 새벽의 차고 맑은 모래를 감싸는 샘물에서는 김이 난다. 내 시가 내 그림자와 그늘의 테두리 안에서 잔물결로 번져나가길 바란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느 나무에 붙은 커다란 흠집인가? 어느 하늘의 샘 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잔모래인가?
나는 나에게 편지를 쓴다. 끊임없이 자신과 이별하라. 애벌레와 이별하고 무지개와 이별하라. 매일 매 순간 최초의 나를 창조하라. 최초의 자유와 구름을 창업하라.
남의나이
환갑이 넘으면
남의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귀 차고 떠난 젖먹이와
둥개둥개 한 몸이 된다.
때도 없이 어리광 부리고
떼쓰기와 삐치기와 사탕을 좋아한다.
아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은
모두 다 동갑내기 벗이 된다.
-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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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나이’란 환갑이 지난 뒤의 나이를 이르는 말이다. 대체로 팔순 이상을 이른다. ‘남의나이를 산다’라는 말을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산다’는 말로 구부려서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참으로 빗나간 표현이다. 오래 사는 일은 축하할 일이며 모든 이의 바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수하고픈 기대와 달리 서둘러 떠나는 이가 있다. 백일잔치가 제사상이 되고 돌잔치 축하노래가 장송곡이 되던 시절에, 우리 조상들은 죽은 아기의 넋을 ‘남의나이’라는 말에 묻어두었다. 그래서 마을에 치매 걸린 노인이 생기면, 내 아기의 영혼이 깃든 거라고 생각을 했다. 아기 하나를 키우는 데에 온 동네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하듯, 어린아이로 돌아간 노인을 모시는 데에 죽은 아기의 이름이 절실했던 거다. 그리하여 가난한 마을이 어우렁더우렁 꽃 대궐 잔칫집이 되는 것이다. ‘남의나이’란 말에는 생명 존중과 어른 공경이 꼭 손을 잡고 있다.
식구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 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에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 정말(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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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食口)는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다. 식구 중에 누군가는 그 밥을 벌어온다. 식구 중에 누군가는 나중에 밥을 벌어오려고 공부를 하고 몸을 가꾼다.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런데 둘러앉아 끼니만 때우면, 다 식구가 되는가?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양육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봉양해야만 식구가 완성된다. 밥상머리를 발로 걷어차는 폭군이 방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다면, 나머지 힘이 약한 가족들은 그늘진 모서리에 모여 눈치만 보는 집구석이 된다. 집은 들어가기 싫은 집구석과 따뜻하고 품이 넉넉한 집안이 있다.
기(器)라는 한자(漢字) 외에 눈물 루(淚)에도 개가 한 마리 들어있다. 어그러질 려(戾)라는 한자가 붙은 걸 보면, 무언가 어긋남을 깨닫고 참회와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그럼 ‘외짝 문이나 구덩이나 지게’를 뜻하는 호(戶)와 ‘개’를 본떠 만든 견(犬)이 만나서, 어떻게 ‘어그러지다, 되돌리다’라는 뜻의 려(戾)가 되었을까? 먹이에 눈이 멀어 구멍에 머리가 박힌 개가 낑낑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개구멍은 언제나 개보다 작으니까 말이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햇살과 거름을 나누고 하늘 가까이 닿으려 어깨동무를 한다면 숲도 가족이다. 무논 가득한 개구리와 올챙이도 노래와 사랑을 둥근 배와 울음주머니에 한가득 나눈다면 수천수만 마리가 몽땅 한 식구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무논을 채우고, 쓰다듬는 나뭇잎으로 숲속 바람을 일게 한다면.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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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젤 좋은 의자가 바로 땅바닥이여. 몸 성할 때는 길바닥이 의자이고 원앙금침인 줄 몰러. 아파봐라. 가시철조망도 등받이 의자고 고슴도치 등짝도 솜 방석이여. 아파야 눈이 떠지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겨.”
어머니는 자석 요대를 차고 다니신다. 저 자석 벨트는 할머니가 브래지어로 쓰던 거다. 어디 아프셔서 두른 게 아니라, 남세스럽다며 한여름에만 차고 다니시던 할머니의 젖 가리개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장롱 구석에 처박아뒀던 것인데, 어느새 어머니가 허리춤에 둘둘 말고 다니신다.
“엄니도 자석 브래지어 차요?”
“아녀. 허리에다 찬 건데, 이게 젖가슴부터 둘러야 흘러내리질 않어. 니들이 다 빨아먹고 쭈그렁이가 됐는데도 둔덕이 남았나 벼.”
<의자>란 시에는 어머니의 말투와 마음 씀씀이를 흉내 낸 나의 거짓부렁이 있다. 독자들은 어머니의 감동은 뽑아 읽고, 작가의 거짓은 짐짓 눈감아준다. 바닥과 가까운 어머니의 그늘 자리와 안식(安息)을 독자가 먼저 안다.
삶이란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 주고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주는 일이다. 의자의 삶이란 지친 이의 등받이가 돼 주고 아픈 이의 방석이 되어 주는 일이다. 배려와 쉼이다. 숨 쉬게 하는 일이다. 끝끝내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다.
실소
웃기는 놈이 되고 싶었다. 당연히 말이 많아졌다. 힘은 대부분 입으로 빠져나갔다. 왜 안 웃지? 웃음의 코드를 뽑은 채 버튼을 눌렀나? 남은 힘은 통박 재느라 다 써버렸다. 석회 포대를 풀어놓은 우물처럼 머릿속 산소가 사라졌다. 이야기를 너무 압축했나? 어지러웠다. 개그맨이 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그런 날은 늦은 시간까지 유머사전을 들춰봤다. 그러다가 시인이 되었다. 웃기는 시를 쓰고 싶었다. 감동이 아니라면 재미라도 있어야지, 내 시 창작법이 전부였다. 고요가 사라졌다. 발광하려고 발광하는 때 많았다. 친구를 좋아한 게 아니라 친구를 웃기고 싶었다. 잘 웃어주는 게 우정이라고 믿었다. 엄숙하게 사는 게 두려웠다. 불안을 부풀리는 기도가 싫었다. 시끄러운 내면을 활기라고 믿었다. 술을 좋아한 게 아니라 취기에 기대어 웃어젖히는 게 좋았다. 혼자 밥 먹는 게 싫었다. 혼자 술 먹는 게 싫었다. 혼자 걷는 게 싫었다.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서 시를 쓰고, 동인들과 합평하는 걸 좋아했다. 이제 쉰 넘어, 쓸쓸함이란 호사가 찾아왔다, 빈 술잔의 고요를 즐기는 요즈음, 나를 들여다보며 혼자 웃는다. 혼자 웃는 놈이 되었다. 아, 나는 나를 크게 이루었구나. 나는 진정 나마저 웃기는 놈이 되었다. 드디어 웃긴 놈이 되었다.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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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의 손가락엔 가시가 돋는다. 밤송이 심장과 가시나무 발가락이 된다. 혓바닥에 고슴도치가 놀고 머릿속에 산미치광이가 뛰어다닌다. 엉덩이에 가시방석이 둥글게 터를 잡는다. 그런데 오래 쓰지 않고 견딘 뭉툭한 가시 펜이 좋은 글을 낳는다. 진짜가 나타나면, 그간 매일 쓴 시답잖은 글을 버린다. 드디어 아예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것처럼 홀가분해진다. 그래서 작가의 발밑에는 제 가시에 찢긴 꽃잎이 흥건하다. 내가 목련을 사랑하는 이유다. 아침에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하얀 목련꽃을 보면, 밤새워 글을 쓰다가 파지만 남긴 실패한 글쟁이 같다.
짐
- 어머니 학교 6
기사 양반,
이걸 어쩐댜?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 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나만 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로석으로 바꿔야겄슈.
영구차 끌듯이
고분고분하게 몰아.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다 고분이니께.
- 어머니 학교(열림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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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이나 마을회관 앞마당에 가면 삶의 말씀이 수북하다. 경우 없는 상황을 만나면, “그게, 말이여? 막걸리여? 어허. 고것이 말이여? 방귀여?”라는 농담이 예외 없이 바람벽을 친다. 여기에서 ‘말’은 사리에 적합한 것이고, ‘막걸리’와 ‘방귀’는 이치를 모르는 철없는 언행을 비꼬는 표현이다. 삶의 지혜가 충만한 이들은 막걸리와 방귀를 즐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우스개와 해학과 풍자를 뒤섞어서 고단한 삶을 웃음바다로 버무린다. 엿듣는 이는 웃음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만,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은 표정 하나 흩뜨리지 않고 진지하다. 대화 상대가 더는 대구를 달 수 없을 때, 드디어 패자가 웃음보를 터뜨린다.
시골 버스 기사의 말솜씨가 고수다. 버스를 노각에 비유하는 문학적 수사와 후진 전문이라는 너스레가 일품이다. 짐짝과 경로석으로 말 펀치를 날리던 둘의 대화는 고분에서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말의 속내가 두껍게 뿌리내리고 삶의 철학이 하늘에 닿아버렸기 때문이다.
다듬는다는 것
퇴고(推敲)라는 말을 새겨보면 글을 다듬는 것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죠. 퇴(推)는 밀다라는 뜻이고, 고(鼓)는 두드린다는 뜻의 한자지요. 퇴고란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 : 자는 낭선浪仙, 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 <이응의 유거에 부침〔題李凝幽居〕 >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이 적어 한가로이 살고 閑居少隣竝
풀숲 오솔길은 황원으로 드네 草徑入荒園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리를 잡고 鳥宿池邊樹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그런데 마지막 구절의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鼓〕’로 해야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멈추어버렸습니다. ‘퇴’와 ‘고’ , 두 글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그는 그만 말을 탄 채로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죠.
“무례한 놈, 무엇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죠.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 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죠.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죠.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지요.
“내 생각엔 ‘퇴’보다는 ‘고’가 좋겠네.”
이 사건을 계기로 가도와 한유는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고, 스님이었던 가도는 환속(還俗)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퇴고란 좁게는 맞춤법에 맞게 어휘와 어구를 고치고 적절하게 문장을 가다듬는 것이지만, 크게는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독자에게 바르게 전달하려는 것이지요. 즉 시원한 소통을 지나 출렁이는 감흥까지 한통속이 되게 해주는 겁니다.
시의 퇴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시어 한두 개를 바꿔도 시 전체의 미적 감흥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거예요. 좋은 시는 단번에 독자의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스위치를 갖고 있지요. 시를 퇴고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스위치를 알맞은 장소에 적정한 높이로 장치하는 일이지요. 시의 방 한 칸이 환해지는 것은 방 어딘가에 스위치와 전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벽지만 아름다워도 시 전체가 화사해지겠지만, 순간적으로 독자의 내면을 확 뒤집어놓는 미적 충격을 주지는 못하니까요. 이것을 나는 ‘스위치론’이라고 말합니다. 어둡고 어수선한 초고(草稿)의 방 내부에 스위치를 달고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이 넓은 의미의 퇴고인 것이지요.
그러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 한유는, 왜 ‘퇴’보다 ‘고’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고 했을까요?‘민다’라고 쓸 때에는 바랑을 멘 스님이 날이 저물자 자신의 암자로 돌아온 것이지요. 그러니 그저 밀고 들어가면 될 뿐입니다. 문 여는 소리야 나겠지만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가 짧은 독경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시의 문이 닫히고 말지요. 탁발과 고행이 끝난 거죠. 시 속에 그려지는 풍경의 역동성이 당연 작아집니다.
하지만 ‘두드린다’로 바꾸면 늦은 밤 스님은 외딴 집이나 낯모르는 암자를 찾은 게 되죠. 고행의 복판에 스님이 있는 겁니다.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낯선 길이 있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신발을 끌고 나오는 동자승의 목소리로, 설핏 잠에 들었던 연못가의 새들도 잠자리를 고쳐 앉을 것이고요. 또한 산짐승들도 몇 번의 울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려 하겠죠. 의심이 많은 작은 새들은 자리를 차고 올라 달빛을 가르며 날아갈지도 모르고요. 문을 열어주려고 동자승이 눈을 비비며 나올 게고, 합장하는 작은 손에도 달빛이 어리겠죠. 탑을 돌아 계단을 올라가는 스님과 동자승의 발등도 보일 터이죠. 큰스님에게 조용히 여쭙는 동자승의 목소리가 있을 게고, 그 다음엔 찻물을 따르는 그림자가 암자의 단조로운 문살에 비칠 테죠.
글자 하나가 바뀌면서 시 속의 그림이 영화필름 돌아가듯 바뀌고 암자를 둘러싼 공간 전체가 입체적인 소리 통으로 바뀌는 게 떠오르죠? 그리고 스님에게는 탁발의 고행 길을 선물하게 되었네요.
퇴고는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시의 혈관을 풀어주고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퇴고가 되어야 하죠. 독자의 상상력에 건전지를 끼워주고 태엽을 감아주는 퇴고가 되어야만 하죠. 그래야만 시정신이며 시인의 통찰력이 독자에게로 건너갈 수 있으며, 새로운 연대의 힘이나 감동의 파장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시의 방에 벽지를 바르고 원앙금침을 깔아놓고 문 가까운 곳에 스위치를 달고 밝은 알전구를 끼워놓아요. 그러면 독자들도 방에 들어와 동침하겠지요.
문은 잠그지 말아요. 지그시 봄바람도 들어오게요.
- 시인의 서랍(한겨레출판, 2012)
그럴 때가 있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창비, 2022)
이정록 LEE, JEONG-NOK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그럴 때가 있다 동심언어사전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정말 의자 등.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을 수상. mojira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