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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심6:1~15 _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바다 위를 걸으심6: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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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빌립에게 무리를 어떻게 먹일지 물으십니다.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데려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이 남자 5,000명쯤을 먹이십니다. 이 일 후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큰 파도를 만나자,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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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심6:1~15 _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간 만나를 먹이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배고픈 이들을 풍성히 채워 주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당시 가난한 자의 음식이었습니다. 당시 보리는 밀보다 싼 재료였고, 물고기(헬라어로 ‘옵사리온’)는 크기가 작았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성인 남자만도 5,000명이 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람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것도 예수님 앞에 내어놓으면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놀라운 표적을 본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은 산으로 가십니다. 표적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세상 영광을 취하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내가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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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걸으심6:16~21
예수님이 홀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날이 어두웠는데 십여 리쯤(약 5~6km) 노를 저어 가던 제자들이 큰 파도를 만납니다. 그때가 새벽 3~6시경(밤 사경, 마 14:25)입니다. 갈릴리 바다(호수)에는 헐몬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과 호수의 따듯한 공기가 만나 높은 파도를 동반한 폭풍이 자주 몰아칩니다. 제자들이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이 그들을 도우러 바다 위를 걸어가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잘 보여 줍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의 대상입니다. 성도가 인생 항해에서 담대할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큰 파도 같은 위기가 닥쳐올 때에도 내가 절망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눈앞의 배고픔도, 시련의 풍랑도,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고백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주님 음성이 삶 속에서 제 귀에 선명히 들리게 하소서. 작은 것이라도 제게 있는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려 주님 일에 쓰임받게 하소서.
지금은 큰 기근의 시대입니다 육의 양식의 기근이 아니라, 영의 양식의 기근입니다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로 가서 영혼의 양식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결코 굶겨 보내시지 않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그래서 큰 무리가 굶주린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6:5) 그러자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 떡을 사오더라도 배부르게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여기 한 어린아이의 양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긴 한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떡과 물고기를 받으사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고, 나누어 주시니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원대로 먹고도 남아서, 그 남은 것만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새와 짐승도 먹이십니다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147:9)
하물며 주의 십자가 피로 사신 우리를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주의 인자를 바라는 우리를 결코 굶게 하지 않으시고 원대로 먹이실 줄 믿습니다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33:18~19)
또한 지금은 큰 광풍의 시대입니다 집과 나무를 날려버리는 광풍이 아니라, 영혼을 날려버리는 광풍입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있었던 영혼이 오늘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큰 광풍이 불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 오셨고, 그때 제자들이 기뻐하며 배로 영접하니 잔잔하게 되었고 거려던 땅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참으로 이 큰 기근의 시대에 주께 영혼의 양식을 구하면 원대로 먹고 마음에 힘을 내게 하실 줄 믿으며, 이 큰 광풍의 시대에 주님을 영접하여 동행하면 가려던 천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많은 설교자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찾기 원합니다. 우리가 작은 것을 기쁨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이유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서술하였을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 전체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5절에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33에는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울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전에 제자들의 전도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도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자들을 보고 좇아 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좇아 온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4:5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들짐승의 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양은 들짐승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배를 채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먼저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육체의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배고픔, 즉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요한복음에서는 빌립)의 해결 방법은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빌립의 해결 방법이 맞습니다.
무리가 빵을 조금이라도 먹기 위해선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돈과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고백을 받기 위함이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들을 찾아온 무리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으로 그들을 찾아온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목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무리의 진정한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무리의 문제는 떡으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온전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세상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재정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지혜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다른 힘을 빌려 문제를 잊혀 버리고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이 땅에서 담대히 살아갈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양으로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의지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시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바침으로 우리를 새로운 관계 속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처음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셨기 때문에 떡과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먹일 수 있는 많은 양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을 축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표현대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린 양으로서 살아가시며 십자가의 사건을 감당하시지만, 이 일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거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늘 능력의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의 몸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 나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 천국 잔치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우리의 유익에 목매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지도자가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면 식량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바랬던 메시아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론 이러한 분위기를 잘 살려서 유대의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피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셔서 홀로 기도를 하십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유대의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홀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심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왜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바다를 걸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바치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광야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을 통해서 오천 명을 먹이게 되는 사랑의 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그들은 기적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고 그저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심으로 부정합니다. 인간은 바다 위에 걸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바다를 잠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찾아 나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냉담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한복음 6:26-27)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그들이 바라던 것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즉 썩을 양식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잘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좇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식이 잘되기 위하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의 성공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나요? 교회는 어떠합니까?
영생의 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곳이 교회인데, 이 땅의 것에 많은 관심을 두고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만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배가 고프면 빵을 주고, 그들이 외로우면 친구가 되어 주고, 가정의 문제가 있으면 부부 세미나를 하지만 정작 하늘의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믿는 자는 영원한 양식을 찾아 예수님께 갑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해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참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영원한 양식을 맛보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영원한 양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경험한 여러분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험한 풍량이 우리를 삼키려 할지라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하십니다. 담대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하십니다. 감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풍랑을 막으시며, 여러분을 품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여러분이 받아야 할 저주를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로 기뻐하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배부름을 소망하지 말고 예수님을 갈망하십시오 (요한복음 6:1~13)
오늘의 말씀요약
표적을 보고 큰 무리가 따르니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 그들을 먹이겠느냐 하십니다.
빌립은 200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하겠다 하고, 안드레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진 아이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이 이것으로 오천명쯤 먹이시고,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에 찹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오천 명을 먹이시다(6:1~10)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 먹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큰 무리’를 보십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빌립에게
질문하시며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하십니다. 주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선택받은 제자로서의 신앙 고백은 온데간데없고(1:41, 45 참조), 믿음의 자세도 보이지 않습니다.
몇 데나리온이 필요한지, 오병이어로 얼마나 먹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합리주의는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표적은 방해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의 눈이 뜨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일하십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야 할지 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기적을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믿음으로 반응하나요?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참(6:11~13)
예수님의 손에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가 놓입니다. 주님은 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무리가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먹을 음식을 숨기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오직 어린아이만 자기 것을
내놓음으로써 모두를 배부르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사람 수를 셀 때는 남자만 대표로 계수했으니
실제로는 부녀자를 포함해 2만 명 이상이 먹었을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의 헌신으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표적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헌신이 큰 기적을 만듭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제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 적용 질문: 주님을 향한 공동체의 믿음이 깊어지도록 내가 드릴 수 있는 오병이어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은 표적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저물어 제자들이 배 타고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큰 파도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로 영접해서 가려던 땅에 이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안전한 인생 항해 (요한복음 6:14~21)
오늘의 말씀해설
왕을 모시고 싶은 사람들(6:14~15)
오병이어는 ‘생명의 떡’(6:35)이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양식 문제를 해결해 줄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표적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지만 몰려다니는 무리에 불과하고, 제자들은 믿음 없는 소리나 내뱉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예수님의 허점을 찾아내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모두의 상태를
정확히 아셨지만, 십자가를 향한 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핍박과 죽음뿐이지만, 결코 타협하거나 미루지 않고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 갈보리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십니다.
- 묵상 질문: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했나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무엇인가요? 영생의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6:16~21)
예수님은 어두운 밤에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출발할 때만 해도
잔잔했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것처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현장에나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도 풍랑은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으면 시련과 고통의 파도가 없어야 한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에게도 풍랑은 닥쳐옵니다(마 7:25 참조).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풍랑 가운데서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 떠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고, 다가가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풍랑을 가로질러 오심으로써 제자들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은 고통을 기쁨으로, 무서움을 평안함으로 바꿔 주십니다.
- 묵상 질문: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했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 적용 질문: 인생의 파도 속에서도 예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태도를 갖게 될까요?
오늘의 기도
구원 사역을 향한 주님의 올곧은 발걸음을 보면서도, 저는 여전히 세상의 풍랑이 두렵습니다.
주님과 동행할지라도 풍랑이 올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실 주님께 제 삶을 의탁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지나 해 오병이어기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생각이 많이 나게한다.
그 평화로운 갈릴리 바닷가, 산상수훈을 말씀 하셨던 팔복교회와 낙심하고 절망해서 떠나버렸던 베드로
에게 다시 찾아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의셨던 베드로 수위권 교회와 가까이 있었던 오늘
의 네번째 기적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오병이어기념교회.....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 여행등으로 피곤해서 한적한 곳에서 쉬기를 바라고 일부러 모처럼 만에
휴가를 즐기고 싶어하는데 38년된 병자를 고친 소문등으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큰 무리들
이 염치없이 예수님 일행을 방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이나 제자들에게 원망이나 불평은 없는 것
같다.
오병이어 기적은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다 드린 줄 알았는데
오늘 말씀을 보니 안드레가 예수님께 보릿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다 드렸다.
지난 번에 안드레가 형님인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 했는데 (요1:42) 안드레에게는 관심없고
베드로에게만 장차 게바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셨었는데....
예수님이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테스트 했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말씀 한마디로 죽어가고 있는 왕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분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분의 능력을 똑 같이 경험했던빕립이고 안드레 였지만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겠다"고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했고
안드레는 자기 것을 찾아보고 주위를 둘러보아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내어 놓고 이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고 뒷머리를 끌쩍끌쩍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드레의 믿음을 보시고 남자만 오천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시는
기적을 보여주신다.
안드레는 자신은 할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수 있다는 믿음이 절망중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이
불행중에도 행복을 찾아내는 믿음이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방법을
불가능에도 도전하는 믿음을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하는 믿음을 갖은 것 같다.
우선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으신 5번째 나오는 이 기적이
나는 한 10여 미터나 되는가 하고 착각 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까 십여리 쯤 걸어가신 것이다. 최소한 4Km 이상이였다.....우와!!!!!
나는 왜 이리 믿음이 없었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만 있으면
경제문제가 해결 되겠다고 잡아서 왕을 시킬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튼날 무리가 예수님을 다시 찾으러 온다.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동기가 참 궁금해진다. 에제 먹고 남은 열두광주리 때문인가?
나는 왜 예수님을 찾아가나? 나는 왜 예수님을 믿나? 믿는다고 하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의 관심과 무리들의 관심이 이렇게 다르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 이지만
무리들의 관심은 오로지 빵 문제에만 집중해 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은 것 같이
계속 먹여주면 메시야로 인정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란다.
우리의 동기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
예수를 찾으러 나온 무리들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계신다.
나의 마음의 중심도 동일하게 보고 계실 것이다.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떡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을......
무리의 관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심장을 갖어보자.
물질을 얻고 소비하는데에
행복을 얻고 기쁨을 찾을 것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더 큰 기쁨과
더 큰 보람과 행복을 찾자.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소개되는 유일한 이적인 오병이어 기적이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몰려와서 말씀을 들었는데, 시간이 늦어 먹여서 보내야 되겠다고 말씀하실 때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데려왔고 예수님은 그것으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무리는 표적만 따르고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해 세상적인 방법과 이성적 계산으로 일하려 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표적을 보이시고 먹이셨다.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 적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원대로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할 만큼 우리를 풍성히 먹이신다.
그 부요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한편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쓰셨다.
비록 믿음을 시험하기는 하지만 빌립에게 의견을 구하셨고 안드레는 보리떡 가진 소년을 데려오도록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오병이어보다 더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지만 그 분이 참된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기적에 동참시키셨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불러 일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사역은 은혜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복 받는 통로가 된다.
소년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보리떡과 물고기가 많은 사람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남는 실마리가 되었듯 우리의 재능, 시간, 물질, 건강이 주님께 드린 오병이어가 되어 능력을 체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호와닛시!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표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여기서도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는 표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고 예수님은 그들은 떠나 가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정치적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기 때문에 출발점부터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하고 멋진 말로 신앙고백을 한다 해도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세상적인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내 삶의 왕으로 믿고 고백해야 된다.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밤바다를 건너갔지만 큰바람과 파도가 일어나 어려움에 빠졌을 때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셨고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고 목적하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친한 사람과 전화를 통할 때는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얘기하는 것처럼 예수님과도 "내다"라는 한마디로 통할만큼 친밀한 관계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성공을 위한 세속적 왕인가요, 아니면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까?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루를 보내기를 소망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14-17)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 40:15~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7)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