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오늘의 묵상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침 산보 중에 어김없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볼 수 없지만, 태양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저녁에는 서쪽 하늘로 사라집니다. 제가 있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데, 태양은 이렇게 매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느낍니다. 이렇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 ‘천동설’입니다. 비단 태양뿐만 아니라, 하늘의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입니다. 천문학이 발달하고, 망원경이 생기면서 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동설’의 등장입니다. 학자들은 지구가 시속 1760킬로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루에 거의 300만 킬로를 움직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느끼지 못하지만 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동설은 우리의 감성과 느낌의 영역이고, 지동설은 과학과 학문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신기 할 뿐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우주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빅뱅’으로 어느 순간에 우주가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옹기장이가 옹기를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하느님을 모른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를 모른다면 천동설도, 지동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태양이 중심도 아니고, 지구가 중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중심으로 우리는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는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예동설을 믿는 우리는 역사를 예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위령 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