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1-17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6 : 11 - 17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 사이에서 최대의 공포의 대상은 문디(나환자)와 상이군인이었습니다. 나환자에 대해서는 『보리밭에서 아 잡아 묵는다 카더라』는 낭설 때문이었지만 잘려진 손목에 갈고리를 끼워서 다니는 상이군인들은 동냥을 하면서도 어찌나 행패도 심하고 당당했는지 어른들이나 심지어 지서의 순경까지도 어쩌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국가를 위해 싸우다 생긴 부상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천형의 흔적을 가졌든 전쟁의 흔적을 가졌든 그들의 몸에는 강한 흔적을 가진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작든 크든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사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부흥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긴다면 그 흔적은 어디에 남겨야할까요?
첫째, 내 영혼에 남겨야 합니다.
이 말은 『중생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 나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말합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청송 감호소와 서울 구치소에서 교도관 생활을 오래 하셨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듣고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생일이 세 번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생일은 육신의 나이로 51세라는 육의 생일이 있고, 또 한 번은 청송 감호소에 있을 때 『너의 몸이 거룩한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읽고 지금까지 신앙 따로 생활 따로였던 이중적인 신앙을 바로 잡은 날이고, 세 번째는 서울 교도관으로 있으면서 윤도영이라는 사형수가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죽음조차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순교적 결단을 한 날을 또 다른 생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흔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연륜이나 학문적 업적이나 물질의 유무나 명예의 높고 낮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이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내 영혼에 예수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십시오. 그 다음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사함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구원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의 영혼에 예수의 흔적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내 육체에 남겨야 합니다.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은 양쪽으로 협공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짜사도라는 비난 속에 온갖 모함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말라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가진 흔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당한 고난목록들이 여러곳 있지만 가장 잘 요약된 곳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입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을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했던 지도자들은 거의가 다 순교했습니다.
사자 밥이 되고 산채로 껍질이 벗겨지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고, 돌에 맞고, 화형 당하고, 수장 당하고, 목이 잘리고, 톱으로 켜임을 당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이고,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멸시를 받는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부흥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회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상에서 『주님 제가 이렇게 과로로 쓰러진 것이 왜 입니까』라고 원망을 했더니 기도 중에 응답하시기를 『나는 너희들을 위해 수십 번도 더 쓰러졌는데 겨우 한 번 쓰러졌다고 불평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서울 신월동이라는 곳에 작은 개척교회에 다리가 불구인 노총각이 은혜를 받아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되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놀라 왜 그러냐고 물으니 『목사님 제가 전도지를 돌리는데 왜 남의 집에 쓰레기를 버리느냐』고 다짜고짜 때리기에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했더니『이 병신아 너나 받아라』 하면서 떠미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어요 라고 했답니다. 찢어진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서 목사님이 형제의 손을 잡고 『형제님은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라고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16년 전에 서울 면목동에 위치한 어느 개척교회에서 성전을 짓기 위해 기도회를 하던 중에 어느 여 집사가 자기 눈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하여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온 교회가 합심함으로서 교회를 지었다는 순교적 미담도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내 육체에 주님의 흔적이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셋째, 내 재물에 남겨야 합니다.
기독교의 물질관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여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식의 물질관입니다. 그 결과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사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적 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재화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많이 남기는 종이 되어야한다는 비유는 물질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잘 못 사용할 때 문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데에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썩어질 물질을 들여서라도 값진 일을 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일 것입니다. 일산 한 소망 교회에는 교회 건축을 하면서 이런 구호를 내걸고 했다고 합니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을 내 아파트에는 한 소망의 흔적을!』 멋있지 않습니까?
넷째, 내 시간에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는 흔히 물질 좀 드려놓으면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의 요구보다 시간의 요구를 더 많이 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에 십일조에 관한 계명은 없어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있습니다. 물질의 기준은 십일조지만 시간은 칠 분의 일을 요구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예배시간, 기도시간, 헌신시간을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은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시간에 주님의 흔적을 남기는 일 인줄 믿습니다.
- 맺는 말 -
훗날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내가 목말라 할 때, 내가 배고파할 때, 내가 헐벗었을 때, 내가 갇혔을 때,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 영혼에 흔적이 남겨질까봐, 내 육체가 고달플까봐, 내 물질에 손해가 올까봐, 내 시간이 도적질 당할까봐 외면하지는 않았는지요? 세계 최대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이과수 폭포는 그 웅대함이나 시원함이 보는 이를 흡족하게 한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향한 마음이 이 정도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 영혼에 주님의 흔적을 남기십시다. 내 육체와 내 물질과 시간을 주님께 드림으로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