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목사의 앞과 뒤
아직도 한경직목사를 성자처럼 추앙하는 글과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한경직은 동방요배 일본 히로히토 천왕 숭배에 앞장 선 인물이다.
1938년 9월 9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평양 장대현 교회 를 담임하던 주기철목사님를 감옥에 가두고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27회 총회가 열렸다.
총회장 홍택기는 21명 선교사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신사 참배를 가결한다.
그리고 이후 1939년 제28회 총회를 한경직목사가 담임 으로 있던 신의주 제2교회에서 열렸다.
이때 총회장은 윤하영씨(신의주제일교회) 총회 서기는 한경직이 선출 된다.
서기 한경직은 전국교회에 공문서 보내 신사참배를 독려 한다.
이후 경북노회가 가장 먼저 우상숭배를 가결하고 앞장 섰다.
교회는 이때 부터 예배에 앞서 기미가요를 부르고 동쪽 을 향하여 동방요배하고 시작했으며 헌금 시간에는 일본 전투기 헌납을 위하여 거출하는데 열심 한다.
뿐만아니라 1940년대에 접어 들면서 앞다투어 교회 종
까지 헌납하는데 앞장섰다.
해방후 한경직
1945년 9월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며 정치에 투신하지만 북한에 소련군의 진주로 뜻을 이룰수 없게 되자 그 해 10월 월남했다.
12월 현 한신대학 설립자 김재준박사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서북지역에서 넘어온 북한 이탈자들과 함께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 '를 열었다.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1946년 11월 영락 교회에 속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북 청년회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가 발전한 것이 서북청년단이다.
주로 평안도 황해도지역 즉 서북지역에 살던 지주들과 지주 자녀들로 이루어 졌다.
이들은 잔혹하리 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 었다.
1947년에 3월 1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에 이승
만의 후광을 업고 잔혹한 서북청년단이 투입되었다.
경찰 대신 투입된 폭력배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쓸수없을 만큼 처잠하게 제주 도민 3만명을 죽였다.
박정희와 한경직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미국이 남로 당 활동을 이유로 군사정변 자체를 의심하자, 박정희는 한경직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의 지지를 얻도록 하였다.
한경직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박정 희의 혁명공약에 공감해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고 박정희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반공 정권이라고 정당성을 설파 했다.
한경직의 말년
한경직의 말년은 비참했다.
치매걸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어쩔수없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후에 철저한 반공주의자들로 변하였고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