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하느님,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9,6ㄴ-10
형제 여러분, 6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밀알은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밀알이 없어져야 싹이 트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있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참 어리석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은 죽을지 말지 생각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씨앗은 죽고 다음 세대의 열매가 자랍니다. 또 그렇게 자라난 열매들은 누군가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다시 씨앗이 되어 그다음 세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본성에 따라 자연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뜻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어서,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길을 스스로 갑니다. “자기 목숨”(요한 12,25) 때문입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언덕이 멀리 있는 큰 산보다 크게 보이는 법이지요. 그래서 잠시 누릴 수 있는 눈앞의 이익, 편안함,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하고 밀알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택하는 것은 사실은 어리석음입니다. 밀알에게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시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죽겠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였지,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확신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박해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제자들이 원한 것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원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으로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제 아들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조재형신부)
첫댓글 성우 라우렌시오에게 오늘이 영명축일이냐 물었더니, 확실하진 않지만 아닌 것 같단다. 그리고 나서 더 이상은 대화가 없었다.
라파엘라의 생일이 오늘이냐고 어미에게 문자를 보냈으나 답신이 없다.
더 이상 진행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들 자기들의 관심사가 다르며 자기만의 생활이 있으니 굳이 거기에 끼어들면 불편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매사가 마찬가지다.
2020~2021년에 작성한 글들을 읽으면서 기억을 되짚고 스스로를 반추해보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바르게 갇고 있는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엇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