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 소장 미인도. 신윤복 미인도와 쌍벽을 이루는 미인도.
▲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 장인 선조 만큼 검소해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조선 왕 중에서 누가 가장 검소했을까. 옷을 기워 입고 나물 반찬을 즐겨 장수한 영조도 소박했지만 무능한 왕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선조만큼 검소한 왕도 드물었다.
조선 14대 왕 선조(재위 1567∼1608)는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수라에도 두 가지 고기를 올리는 법이 없었고 물에 만 밥 한 그릇과 마른 생선, 생강 조린 것, 김치와 간장이 고작이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 갔던 3녀 정숙옹주(동양위 신익성의 부인)가 "이웃집과 너무 가까워 말소리가 들리고 처마도 얕아 집 안이 외부로 다 드러난다"고 하소연하자 선조는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들여놓으면 그만"이라며 집 안을 가릴 수 있는 굵은 발 2개만을 하사했다.
전란을 겪은 후에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 밥알 하나라도 땅에 흘리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나인들이 불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는 "농사 짓는 소를 어찌하여 임의로 잡느냐"며 도살을 엄금하기도 했다.
▲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완도군 신지도에서 연려실기술을 완성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은 400종이 넘는 야사, 일기, 문집류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분류해 실록 등 정사에서 언급되지 않는 역사의 이면과 새로운 관점의 인물 묘사를 소개한 조선 역사서의 명저이다.
'연려실'은 부친 이광사(1705∼1777)가 지어준 서실의 이름이다. 아버지의 유배지인 완도군 신지도에서 42세에 저술을 시작해 30년에 걸쳐 완성했다.
태조 때부터 현종까지 283년간(1392~1674) 각 왕대 주요 사건뿐만 아니라 상신(相臣), 문신, 명신의 전기를 기술했다. 무엇보다 개인의 사견은 전혀 가미하지 않고 인용자료를 원문 그대로 실어 객관성이 뛰어나다.
18대 현종(재위 1659∼1674) 치세는 왕권이 가장 약했던 시기다. 현종의 성격은 너무 여렸다. 왕이 어렸을 때 대궐 문 밖으로 나갔다가 야위고 낯빛이 검은 군졸을 보고는 불쌍히 생각해 옷과 밥을 주게 했다.
할아버지인 인조가 표범가죽 진상을 받았는데 품질이 나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곁에 있던 현종이 "표범을 잡느라 많은 사람이 상했을 것"이라고 하자 왕이 손자의 마음을 가상히 여겨 물리치지 않았다.
효종조에 새끼 곰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 곰이 성장하면서 사나워지자 곰을 죽이자는 의견이 많았다. 세자는 "아직 해를 입은 이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깊은 산에 놓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효종은 "네가 임금이 되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가 없겠다"며 기뻐했다.
현종은 즉위 후 청나라 사신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군졸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명령을 전달하는 군졸이 빨리 걷다가 임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질 만큼 세게 부딪힌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해 당장 군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을 벌까지 주겠냐"고 웃어 넘겼다.
조선시대 단명한 임금들은 공히 여색을 멀리했으며 책벌레였다. 5대 문종(재위 1450∼1452)은 어릴 때부터 대궐에서 공부만 했다. 아버지 세종은 "세자가 늘 궁중에만 있고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으니 건강을 잃을까 염려된다"고 걱정했다.
문종은 금욕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임금이 향락을 탐닉하면 1000년을 살아도 만족하지 못한다"며 "부귀한 집의 자제도 남녀의 정욕과 식욕으로 몸을 망치는 자가 많다. 늘 여러 아우를 보면 훈계하고 타이르지만 내 말을 따르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세자시절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두 번이나 이혼했다. 문종의 외모는 수염이 길어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고 책은 소개한다. 어진이 현전하는 증조부인 태조나 친동생인 세조의 수염이 빈약한 것과 대비되는 기록이다.
책은 임진년 9월 왜병들이 파헤친 선릉(9대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무덤), 정릉(11대 중종 무덤) 조사과정도 상세하게 적었다. 조선 조정은 사건 발생 6개월 후 도감을 설치하고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그결과 선릉과 정릉 모두 관이 불탔으며 선릉의 두 무덤에서는 시체가 사라졌고 중종릉에만 시체가 남은 것을 확인했다.
조정에서는 시신을 훼손한 것으로 미뤄 보물을 갖기 위한 단순 도굴이 아니라, 왕조에 위해를 가하기 위한 계획적인 만행으로 판단했다. 조사관들은 중종릉에 남아 있는 시신을 두고 모두 의구심을 표했다. 중종이 승하한 지 50년이 다 됐지만 무덤의 시신 상태는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관이 모두 불탔는데 시체만 남아 있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과 함께 적들이 다른 무덤 등에서 시체를 갖다놓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런데 조사관들이 중종 시신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내시, 상궁 등 과거 중종 주변 인물들이 왕을 묘사한 기록을 제시해 흥미롭다. 이를 종합하면 중종은 중간 키 이상이며 수염은 붉으면서 많지는 않고 이마 위에 녹두보다 약간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몸집도 중간 정도며 얼굴은 길쭉하고 코끝이 높았다. 뒤통수는 평편하고 깎은 듯하여 갓쓰기에 방해가 된다고도 했다. 또한 몸에 항상 부스럼이 있었고 평소 침을 많이 맞아 침맞은 표시가 많았다.
신숙주(1417~1475)가 단종비 정순왕후(1440∼1521)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연려실기술에서 언급해 주목된다.
이런 내용은 조선 말 김택영이 쓴 역사서 '한사경'에 나오는데 이긍익은 파수편(破睡篇)과 월정만필(月汀漫筆)의 구절을 인용해 "노산의 왕비 송씨가 관비가 되니 신숙주가 여종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청을 듣지 않고 단종비에게 궁중에서 정미수(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 즉 문종의 외손자)를 기르도록 명했다"고 전했다.
신숙주는 세조에 편에 서면서 막강한 권력과 부를 보장받았다. 그의 아들 신정(申瀞)은 부친 덕에 이미 20대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사찰 노비가 돈이 많은 것을 알고 종으로 삼기 위해 옥새를 위조해 문서를 만들었다가 적발돼 옥에 갇혔다.
성종이 친히 의금부에 거동해 "뉘우친다면 네 부친의 공로를 생각해 곧 석방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귀하게만 자랐던 신정은 뉘우치기는 커녕 격분하면서 "억울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성종은 "어리석은 고집쟁이로구나"고 개탄했다. 결국 신정은 재상의 신분으로 옥새를 위조한 죄로 처형됐다.
예종조 최대 정치적 사건으로 남이(1441~1468)의 옥사를 꼽을 수 있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28세에 정2품 병조판서로 승진했다. 세자였던 예종은 그를 매우 못마땅해했다. 그런 예조는 즉위와 동시에 남이가 반역을 도모했다고 누명을 씌워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죽여버렸다.
남이는 국문장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모진 고문으로 다리뼈가 부러지자 "병신이 됐으니 살아 있은 들 무엇할 것인가"라며 역모사실을 자백했다. 남이의 죄명은 참인지 거짓인지 분변할 수 없으며 그의 옛 집터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지 못하고 채소밭이 됐다고 책은 덧붙인다.
남이의 장인은 계유정란(세조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의 1등 공신인 권람(1416~1465)이었다. 권람은 남이에게 청혼하면서 점을 쳤다. 점쟁이는 "(남이가) 반드시 젊어서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딸도 수명이 매우 짧고 아들도 없는 운명이니 (남이와 함께 살면서) 복은 누리되 화는 보지 않을 것"이라며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권람은 이 말에 남이를 사위를 삼았고 점괘대로 권람의 딸은 남이가 사형을 당하기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
조선 중기 개성 출신의 명기로 유명한 황진이에 대한 묘사도 매우 낯설다. 책은 황진이의 이름을 '진랑(眞娘)'이라고 했고 개성의 여자 소경 딸이라고 소개한다. 성품이 쾌활해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했다.
산수를 유람하면서 놀기를 좋아해 풍악산과 태백산, 지리산을 서슴치 않고 돌아다녔다. 떨어진 옷, 때묻은 얼굴로 이(蝨)를 잡으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노래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 그의 거처를 자주 찾았다. 그에게 갈 때면 늘 거문고를 멨고 술을 걸러 준비했다.
▲ 노비에서 형조판서까지 올랐던 정충신 장군.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자신감과 기개가 충만했다
노비 출신이었지만 형조판서가 된 정충신(1576∼1636)의 얘기도 전한다. 광주에서 태어난 정충신은 어머니가 노비였다.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법에 따라 그도 노비가 됐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개가 넘쳤다. 늙은 기생이 절도영 잔치에서 음식을 가져와 건네자 정충신은 뜻밖에도 "남은 음식을 남에게 먹일지언정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라며 뿌리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광주목사였던 권율이 의주로 파천한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응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17세의 정충신이 선뜻 자원해 단신으로 적병을 뚫고 장계를 임금에게 올린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정충신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그해 가을 의주에서 치러진 무과시험에서 그는 놀랍게도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한다. 그 직후 정충신은 이항복의 주선으로 선조를 직접 알현하는 영광을 가졌다. 선조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아직 어리니 좀 자라면 크게 쓰리라"고 했다.
정충신은 미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결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책은 정충신이 거만했으며 명망 있는 사람도 그렇게 대했다고 적었다. 최명길은 "정충신이 교만하고 무례하다고 하는데 그의 장점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두둔했다.
▷이긍익(1736∼1806)=가문은 소론에 속했으며 경종대의 신임무옥사건과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했다. 그의 아버지 이광사도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긍익 역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채 평생을 역경과 빈곤 속에서 보냈다.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로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역사서술을 지향했다. 사실성과 공정성을 추구해 남인, 북인, 노론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두루 섭렵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
첫댓글 미션님 감사합니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