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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갑진대한
명궁 : 태음생년록·향심력자화과 문창 영성 홍란 대모 월덕 胎
천이궁 : 태양자화록·향심력자화기 문곡 천희 과숙 음살
8 기유대운[재살, 식신-비견, 편재-식신, 문창]
장제스의 본명은 ‘장지칭(莊志淸)’. 쑨원(1866 병인생)을 따르기 시작한 후 ‘장중징(莊中正)’으로 개명했으며(쑨원의 호가 ‘중샨(中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스(介石)’는 자(字)라고 한다.
저장성 펑화현에서 1887년에 태어났으며, 소금장수를 하던 아버지는 장제스가 여덟 살 때, 역사적으로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쑨원이 흥중회를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나서던 189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집안은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히 궁색했으며 장제스는 어린아이의 몸으로도 잠시도 쉴 새가 없이 집안일을 거들고, 또 공부에 힘써야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유교적 예법이 몸에 밴 사람으로서 어린 장제스에게 행동 하나하나를 예법대로 하기를 강요하고, 조금만 어긋나도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
이때 하던 공부도 당연히 전통적인 한학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 진궁 태음 명궁자
- 태음은 富를 주하므로 재성이 된다. 같은 재성인 화록 녹존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화권(戊) 화과(庚, 癸)를 만나면 강유가 조화되므로 좋으면, 창곡이 협하거나 회조하게 되면 반드시 문장으로 발달하며 박학다식하게 된다.
- 태음이 내향적이고 굴욕을 참는 것은 십이궁에서 모두 그러하지만 단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며, 진궁에서는 陷이므로 그 내향성과 굴욕을 참는 특성은 때에 따라서는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며 아울러 적시에 사나운 모양새로 나타낸다.
- 태음은 무곡과 육합을 하니 진궁 태음은 유궁 무곡 칠살과 육합이 되므로 사나운 장수인 무곡 칠살을 부려야 하므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걱정한 다음 움직이게 되며 사나운 장수를 함께 한다는 것은 나도 강경함이 있게 되고 견제하며 응대하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
- 따라서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를 한다.
- 男命이라면 반드시 강강한 여자(모친 아내 비서 딸 등) 權 속이 있어야 한다. 장제스는 3번의 결혼과 1명의 첩을 두었다.
- 女命이면 곧 독립성이 강하지만 쓸데없이 사사건건 강령綱領하여 문제를 만들 수 있다.
* 태음의 기본성격- 총명하고 우아하며 문예적인 기질이 있고 예절 바르다. 타인과 잘 다투지 않고 도량이 크나, 일처리에 있어서는 소심하고 관찰력이 예리하며 인내심이 있다. 까다롭다.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의심과 환상이 많고 질투심, 의뢰심, 결벽성이 있는 경우가 많다. 살성에 민감하여 살성의 악영향에 태음이 타격을 입기 쉬워서 살성을 보는 것을 싫어한다.
※ 명궁 생년록성을 가진 사람의 특성
(1) 한 평생의 福祿, 食祿, 財祿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2) 人緣이 좋고, 사람됨이 온화하고 타인과 잘 지낸다.
(3) 총명하고, 才華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自立格에 속한다.
(4) 사화는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기에 초년에 명궁에서 강한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과 같아서 어린 시절에는 재난이 많고 키우기 어렵지만 이 대한을 지나면 좋아지면서 化祿星의 解厄制化하는 功을 갖추게 된다.
※ 갑진궁 사화
(1) 염정 祿 (돈 버는데 이로움. 정신적, 심리적 만족)이 부모궁에 入하니 부모나 윗사람으로 인한 이로움이 있다.
(2) 파군 權 (개창력 강, 일 만들기 좋아함. 인력이 자원이 되는 직업, 모험을 좋아하거나 새로운 생각)이 자녀궁에 入하니 계축대한에 권력을 잡게 되며, 자식을 통제하려 할 수 있다.
(3) 무곡 科 (돈 버는 것이 지명도와 관련, 전문직 인사, 돈을 빌려주면 손해봄)가 노복궁에 入하니 아랫사람이 교양이 있고 예의가 있으며 본인도 온화하게 대하며 사이가 좋다. 귀인 작용력이 있다.
(4) 태양 忌 (시비와 원망, 인간적 모멸과 매도당함, 경쟁에서 밀림, 파재)가 천이궁에 入하므로 초년 고생이 있게 되며, 태양화기이므로 집안의 남자로 인한 아픔사가 있게 된다.
제2 계묘대한
18 무신대운 [겁살, 상관-겁재, 정재-상관]
16 계묘대한 파거월탐 - 파군(록) 자전선/대한부관선, 탐랑(기) 부질선/대한재복선을 인동 => 일본을 배우자.
17세가 되던 해에, 그는 서양식 학문을 익히기로 결심하고는 잠시 근대식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907년에 일본으로 가서 도쿄의 진무학교에 입학했다. 사관생도후보를 가르치는 이 학교를 다니며, 그는 쑨원과 그의 삼민주의를 알게 되었고, 일본식으로 소화된 ‘근대 문명’을 익혔다. 조국을 서구 열강의 침략에서 지키는 동시에 근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확실히 접속한 셈이다. 그리고 당시의 쑨원과 마찬가지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일본을 배우자[일본이 동북 망신방향]”는 것이었다. 또한 쑨원보다 젊었으며 군대식 기율이 몸에 맞았던 장제스는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에도 심취했다.
어려서 유교와 불교에 영향을 받고, 청년 시절에는 서양철학과 기독교를 접한 그는 보통의 군인이나 정치가들보다는 사색적이었으나 지식인답게 하나의 입장에 주력하거나 사상 그 자체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이 들어서까지 줄곧 공자의 말을 인용했으나 그가 좋아했던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마음(心)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양명학이었다. 양명학은 일본의 유신지사들이 선호했던 사상이기도 했고, 장제스가 보기에는 불교나 서양의 자유사상과도 통하는 듯했다.
※ 유학·이민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전택궁·天馬가 座한 궁·천이궁이 움직여야 해외로 이동이 가능하다.
☞ 천이궁 경술궁 태양자화록으로 외지에서 독립과 돈버는데 유리하며, 외지에서 만나는 인연이 좋다.
☞ 16 계묘대한 파군화록은 자녀궁에 入하여 전택궁을 照(비출 조)하고 탐랑화기는 부모궁(공부궁 문서궁)에 入하는데 천마로 인해서 외국과 인연이 있게 된다.
☞ 이 대한의 탐랑화기는 갑진대한 염정화록에서 탐랑화기로 바뀌게 되므로 공부의 특성이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제3 임인대한
26 임인대한 량자부무 - 천량(록) 천동(권) 부관선/대한명천선 : 정세 파악 임무
위안스카이(1859 기미생)가 독재체제를 수립하자 1913년에 타도 위안스카이의 봉기에 참여했지만 실패,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쑨원의 지시를 받아 일본, 만주, 러시아 등을 오가며 정세 파악 등의 임무를 수행했고, 국민당의 군사 부문의 지도자로 점차 자리매김해갔다. 일본에서 얻은 경험에다 수립 직후의 소련을 방문해 붉은 군대의 틀을 짜고 있던 트로츠키에게서 한 수 배운 것이 작용했다.
※ 관록궁 천량 천동생년권
(1) 관록궁 천량 천동생년권은 일생 관리로 총명하며 권세를 누리게 된다.
(2) 명궁 태음이면 관록궁 천량이 좌한다. 천량은 감찰 감독의 의미가 있는데 임인대한 천량화록이 되니 감사 감독 관리업무가 부여되었다.
(3) 부처궁 공궁이므로 관록궁은 부처의 천이궁이 되므로 바깥활동을 잘하고 자신의 직업에 도움을 주는 유능한 인재를 만나게 된다.
※ 관록궁 무신궁간 사화의 파급효과
(1) 탐랑화록이 부모궁에 入하면서 천마를 움직이니 직업적으로 해외 인연이 있으면서 부인도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2) 태음화권인 명궁에 入하여 태음생년록에 권세를 부여하니 직업적인 면에서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된다.
(3) 우필화과가 부처궁에 入하니 똑똑한 부인을 두게 되며 서로의 애정이 좋다.
(4) 천기화기가 재백궁에 入하면서 복덕궁 거문화기를 沖하니 천기화기대한에 직업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 위에 언급하였듯이 해외이동과 관련해서는 전택궁·天馬가 座한 궁·천이궁이 움직여야 하듯이 귀국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1913 계축년에는 전택궁과 천마궁이 움직이게 되어 다시 이동수가 발동하게 되었다.
일본 유학 당시의 장제스 | 쑹메이린과의 결혼. 그녀는아내로서 동반자로서 장제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
** 쑹메이링 - 1897(기해생) ~ 2003(계미년) 106세 사망
자유 중국 여류 정치인. 저장 재벌[浙江財閥] 송씨 가(家)의 3자매 중 막내. 미국 웨슬리(Wesley) 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장제스[藏介石, 장개석]의 후처가 되었다. 그 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약, 특히 대미 관계 조정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장제스는 2번의 이혼을 하였고 쑹메이링과 3혼을 하였다. 또한 여성계ㆍ종교계ㆍ항공계(航空界)ㆍ실업계 등에서도 활약하고, 이재(理財)에도 눈이 밝다는 평을 들었다. 일본과의 전쟁 중에는 카이로 회담에 장제스를 수행하였고, 1946년에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ㆍ1950년 이후 중국 부녀 반공 항아(婦女反共抗俄) 연합 회장으로 활약했다. 항일전(抗日戰)과 공산당과의 내전 중에는 미국 각지를 돌며 유세, 지원을 강화해 줄 것을 강조하였다. 1975년 이래 미국에 살며 자유 중국과 미국과의 유대 강화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1950년 타이완으로 건너간 후에는 국민당 중앙평의위원, 타이완부녀반공항소연합회[臺灣婦女反共抗蘇連合會]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에는 1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타이완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 이후 타이베이[臺北]에서 살았다. 그후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다시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1966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28 정미대운[화개, 비견-편인, 식신-비견]
★ 장제스는 29세 1915년부터 87세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놓았다.
▶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 사주에 인성이 많은 편인격 사주에 정미대운 편인운에 들어서니 꼼꼼하게 기록해놓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고, 1915년 을묘년은 未 중 乙木 투간으로 일적인 면에서 기록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미두수 상으로는 천량의 꼼꼼함이 관록궁에서 발동하면서 하는 일에 대한 기록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명천선 문창 문곡도 글을 쓰게 하는데 작용력이 있지만, 문학적인 표현이라기 보다 꼼꼼하게 일을 진행시키기 위한 부분이 강한 일기이므로 천량화록과 천동생년권이 작용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제4 계축대한
38 병오대운 [육해, 겁재-정인, 비견-편인]
36 계축대한 파거월탐 - 파군(록) 자미 자전선/대한명천선, 탐랑(기) 부질선/대한부관선
1924년, 쑨원은 그에게 황푸(黃埔)군관학교를 세워 혁명을 추진할 군사 간부를 양성하도록 했다. 초대 교장에 취임한 장제스는 여기서 약 2년 만에 5천여 명의 교육생을 배출했고, 이들 중 상당수를 국민당과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향후 중국의 주도권을 잡을 기반을 닦아나갔다.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있던 당시 쑨원과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에 상당히 기대고 있었으며, 국민당과 황푸군관학교에도 공산당 등 좌익 인사가 많았다. 그런데 장제스는 차차 그런 좌우합작 노선에 이의를 제기했고, 한 차례는 군관학교 교장직을 사임하면서까지 쑨원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소련인들을 여러 번 접하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세계의 공산화를 꿈꾸고 있다고 여겼고, 국민당의 친소 노선 때문에 국내 자본가들과 미국, 영국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걸렸으며, 국민당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면 좌익계 인사들을 배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1925년에 쑨원[음2.18 기묘월 을미일]이 사망하자 장제스의 그런 입장은 거칠 것이 없게 되었고, 그 다음 해, 자신이 당내 좌익계에 의해 모스크바로 납치될 뻔했다는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그 진위는 아직 불확실하다) 국민당 내 좌익을 척결하게 된다. 이로써 쑨원 생전에 2인자로 불렸던 왕징웨이(汪精衛 1883 계미생)도 친좌파적 성향을 추궁 받아 몰락했으며, 장제스가 국민당의 1인자로 떠올랐다.
** 중산함 사건 - 1926년 3월 20일(음2.7 신묘월 무신일) 국공합작하의 중국에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에 공격을 가한 사건.
1926년 3월 18일(음2.5 신묘월 병오일) 황푸섬 인근 해역에서 상선이 해적의 습격을 받아 상선보호를 위해 순시선을 파견해 달라는 보고가 있자, 즉시 작전수행이 가능한 중산함을 황푸[黃埔]로 파견하였다. 이때 순시선을 파견하지 않고 전투 주력함을 파견하여 공산당이 주도한 군사행동으로 오인하는 문제가 되었다. 장제스는 중산함이 기동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1926년 3월 19일 황푸섬으로 파견된 중산함이 광둥성 광저우[廣州]로 회항해도 되는지 보고를 받고, 자신의 지시없이 중산함이 항해를 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중산함 기동에 관련된 함장 리즈룽[李之龍]을 비롯하여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반공사건이었는데, 결국 국민정부 주석 왕자오밍[汪兆銘]이 장제스에게 항의하고 외유를 떠난다는 형식으로 마무리를 지었을 뿐 쿠데타에 대한 적절한 책임과 해결을 묻지 못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민당의 실력자로 급부상되었다.
장제스는 41세 1927년에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한 뒤로는 기독교로 정식 개종하지만,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같다”는 식으로 신앙을 편할 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신조를 항상 강조했으며, 그런 신조가 통하지 않을 때는 강제력이라도 써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곤 했다.
1928년에 옌시산(閻錫山), 펑위샹(馮玉祥) 등 일부 군벌과 합작해 2차로 북벌하여 베이징을 차지하고 있던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냄으로써 군벌 시대를 마무리 짓고 전국을 청천백일기 아래 통일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우면서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다.
권좌에 오른 뒤 북벌에서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간, 장제스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겪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정치지도자에 앞서 군사지도자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 성과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할 것이다.
※ 계축대한 궁간 사화 파급효과
(1) 명궁 갑진 파군화권이 좌하는 대한이므로 이 대한에 자신 스스로 전쟁불사 권력을 잡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2) 파군자화록이 되므로 군사간부 양성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부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3) 거문화권이 복덕궁에 入하면서 거문화기를 인동시키면서 대한 형노선이 되므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된다.
(4) 태음화과는 명궁에 入하니 승진 발전하게 되며, 대한 자전선에 있으니 부하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5) 탐랑화기는 부모궁에 入하면서 대한부관선이 되므로 윗사람에게 불복하거나 제거하려 한다.
※ 축궁 자파 조합
- 자파조합은 파구창신하며 부단한 ‘혁신과 개창’의 본성을 가진 파군과 황제성인 자미가 동궁하므로,이 조합은 개창력이 강한 조합이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육길성과 길화를 보아 조합이 좋으면 건설적인 혁신과 발전이 있어 안정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며 리더십이 있으나, 길성을 보지 않고 살성과 화기 등을 보면 파괴적이고 반항적이며 좋고 싫음을 지나치게 분명히 하므로 대인관계에 변화가 많고 이기적이며 극단적이 되어 인생이 불안정하게 된다.
- 축미궁에는 백관조공인 보필 ,괴월, 창곡이 동궁하거나 협하는 경우 영도력과 조력이 있게 되며, 시대적 조류에 적합한 개창성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게 된다. 자파도 묘왕지이므로 좋은 격국이 형성되기 쉽고 또 발달하는 사람이 많다. 자미가 좌보, 우필과 삼태, 팔좌를 볼 때는자신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처하는 것을 대비해야 하며, 이는 세상의 時勢로 인해 실질적 영도 지위를 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 축궁의 자미는 독좌하지 않고 자미와 파군이 같이 앉음으로써, 파군은 몸소 힘을 쓰고 몸소 행하는 특성이 있어서 황제성 자미의 신변을 따르면서, 행동력을 더하게 되므로 반역의 왕이 되어질 수 있고 제패하려한다. 황제의 성취가 두드러지는가 여부는, 모두 백성을 아끼고 현자賢者를 구하며 게다가 몸소 행하는 것에 있다.
★ 장제스는 축궁의 협에 좌보 우필과 삼태 팔좌가 있으며 괴월이 삼방에서 회조하고 있다.
제5 임자대한
48 을사대운[역마, 편인-편관, 겁재-정인]
46 임자대한은 관록궁 천기화기가 入하는 대한으로 일적으로 敗하게 된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장제스는 한편으로 일본과 대립하면서 소공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근거지인 루이진에서 산시성에 이르는 1만 2천 킬로미터를 퇴각하는 “대장정”을 함으로써 피신해야 했다.
항일전쟁의 필요성이 급박해짐에 따라 1936년에 장쉐량이 시안 방문 중의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촉구하는 “시안 사건”이 벌어졌으며, 1936년 12월 12일(음10.29 기해월 무진일), 중국 옌안에 있던 중국 공산당의 최후 잔당을 토벌하려는 초공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장쉐량, 양후청 장군이, 장쉐량군의 본부인 시안을 방문 중이던 중국 국민당 영수 장제스를 사로잡아서 국공합작을 요구하여 2차 국공 합작의 계기가 된 사건
이 때, 그동안 적은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1937년에 일본이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고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중일전쟁) 장제스도 고집을 꺾고 제2차 국공합작에 동의한다.
전쟁 내내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수적인 우위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고, 일본군은 몇 차례의 패배 외에는 거의 항상 중국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본의 인구와 경제력으로 볼 때, 중국 전체를 전장으로 삼아 오래 전쟁을 하다 보면 지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우며, 외국의 원조로 간신히 보급을 지탱하면서 버텨 나갔다.
▶ 임자대한은 선천 거문화기가 대한 천이궁에 좌하므로 바깥환경에 먹구름이 끼었음을 의미한다. 이 대한에 제2 세계대전이 있었다.
▶ 관록궁 무간 천기화기가 좌하는 대한이라 직업적인 면에서 다툼 시비가 발생하니 전쟁을 하게 됨은 당연하게 된다.
▶ 지위를 잃지 않음은 임간 천량화록이 관록궁에 入하여서이다.
제6 신해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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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갑진대운[반안, 정인-정관, 상관-겁재]
56 신해대한 문창화기가 命궁에 入하여 천이궁을 沖하니 대외적인 활동영역에서 배제될 수 있다.
장제스는 57세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을 카이로에서 만나 회담을 갖고 만주, 대만 등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중국 영토의 반환을 약속 받음으로써 한껏 승리감에 취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승리감은 뒤이은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외되고, 미국이 파견한 총사령관 스틸웰과 견원지간이 되면서 다소 빛이 바랬지만. 여하튼 장제스의 영도하에 중국은 사상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고, 제국주의 시대 내내 시달려온 반식민지의 그림자에서도 벗어나 “세계 5강”의 하나로까지 서게 된 것이었다(전후 수립된 UN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장제스는 두루 ‘화해’를 시도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중국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군과 거류민을 안전하게 귀국시키고 대일배상 청구권과 분할 점령권을 자진해서 포기하며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以德報怨)”는 정책을 취했다. 또한 소련과 우호동맹을 맺고, 마오쩌둥을 임시 수도였던 충칭으로 초청해 회담을 갖고 협력을 다짐했다. 하지만 국, 공의 화해는 길지 않았다. 장제스는 수적인 우위만 믿고 얼마 후 일방적으로 협정을 깨트리며 홍군에 공격을 재개했다.
아무튼 그 동안 다소 모호한 직책을 갖고 중국 최고통치자로 지내온 그는 국공내전을 재개하고 2년 만인 1948년에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하며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했다.
그러나 그 1년 뒤에는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된다.
장제스에게 대만은 꺼림칙한 땅이었다. 국공내전을 진행하던 1947년, 일본의 지배를 대신한 국민당 정부의 차별대우와 착취를 견디다 못한 대만 원주민(本省人)들이 들고 일어나자 이를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당시 약 3만 명이 살육당한 “2.28 사건”의 발포 명령자는 다름 아닌 장제스였음이 최근의 조사로 밝혀졌다.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 독재자. 총 재임 25년 282일. 중간의 1년 38일을 더하면 1948년 5월 20일부터 1975년 4월 5일로 26년 320일. 난징 정부 수뇌로 치면 1928년부터 47년간 중화민국의 지도자로 있었다. 다만 장제스는 한번도 마오쩌둥이 가졌던 것 정도의 권력을 대륙 전체에 행사한 적도, 가진 적도 없다. 장제스의 정권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군벌들의 연합체였고, 북벌과 반장전쟁으로 기세를 꺾어놨을 뿐 반항기는 여전했다. 이후 대만 섬으로 건너간 후에야 완전한 독재를 행할 수 있었다.
중화민국의 국부이자 개척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영웅 또는 부패를 방조한 무능한 독재자,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한다.
공포와 자비
인도적이고 민주적인 혁명,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온갖 부정부패와 부조리와 모순에 얼룩지지 않고 원만하게 평화롭게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적어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알려준다. 20세기 초 중국이 겪고 있던 변화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시대의 지도자는 하나만도 어려운 대업을 동시에 셋씩이나 달성해야 했다. 인도적이고 민주적인 ‘왕도’를 실천할 수 없다면, 지도자는 공포와 자비라는 ‘패도’만이 최선이었다. 공포정치로 분파들과 반대세력의 입을 틀어막는 한편, 토지개혁이나 세제개혁 같은 자비로운 정치로 민중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대륙에서 장제스는 공포가 불충분했고, 자비는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인을 말하며 불인을 행하는” 이상의 것을 했어야 하리라. 그래서 그의 “천명”은 바뀌었으며, 그는 쫓겨간 대만에서야 공포와 자비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륙을 혁명할 새로운 천명은 마오쩌둥의 손에 놓였다.
※ 신해대한 궁간 사화의 파급효과
(1) 시점상 신해대한에 거하게 되는데, 궁선으로는 부질선이니 문서궁에서 나를 배제하는 상이 된다.
(2) 거문화록이 선천 거문화기궁에 入하여 록기충으로 凶이 발생하니 나의 생각이 거칠어짐을 의미한다. 1947년 정해년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생각의 틀이 바뀜을 의미하니 달라진 정치 성향을 띄게 된다.
(3) 태양화권과 문곡화과가 천이궁에 入하지만, 문창화기가 명궁에 入하니 권기충으로 대외적 활동에서 나의 입지가 좁아진다.
(4) 질액궁은 신체를 主하고, 修養과 성질(성깔)을 주한다. 그 궁간에서 나온 사화가 복덕궁 명천선으로 향하니 나의 성격이 강강하고 무자비한 면이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제7 경술대한
68 계묘대운[장성, 편관-편재, 편인-편관]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본토에서는 미처 시도하지 못했던 사회개혁의 부재와 지도부의 심각한 부정부패로 대륙을 잃었다고 자책한 그는 1953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해 민중의 생활 안정과 자연스러운 공업화 토대 마련을 달성했고, 세법을 개정해서 산업자본과 복지예산을 확보했다. 공교육 강화에도 힘을 쏟아, 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 국민이 9년간 의무교육을 받는 체제를 일찌감치 수립했다.
그리고 부정부패를 엄히 단속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인척까지 가차 없이 처벌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만이 이후 순조로운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네 마리의 작은 용들”의 하나로 불리게 된 데는 장제스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본토 수복”의 염원은 끝내 물거품으로 끝났고, 대만에서 보낸 세월이 그 이전의 정치인생과 맞먹었음에도 이제는 세계무대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설움을 삼키며 은둔하듯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믿었던 미국마저 동서 데탕트의 분위기를 타고 1972년, 중국과 수교하는 “배신”을 하는 걸 보며 늙은 총통은 분노와 절망에 몸서리쳤다.
※ 경술대한 사화의 파급효과
(1) 선천관록궁 천동화권에 대한 화기가 入하니 선천 관록의 힘은 잃어서 본토 수복의 염원은 물건너갔지만, 대한 관록궁 천량화록이 관록궁에 入하여 그의 관리업적은 유지되었다.
(2) 태음화과가 명궁에 入하고 태양자화록이 천이궁에 있으니 명천선 록과로 공은 있지만, 무곡화권이 형노선에 좌하니 대세는 타인이 쥐게 되는 세월을 살게 된다. 나이가 60대 중반이후가 되어가니 수하인의 성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제9 무신대한
88 신축대운[월살, 墓 편재-식신, 식신-비견]
1975년 4월5일(음2.24 기묘월 신사일), 심장마비가 88년의 영욕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아버지의 철저한 독재체제와 원주민 차별 정책을 차차 완화하고, 1987년에 마침내 계엄령을 해제, 국민에게 참정권을 돌려주었다.
※ 선천화기와 궁간화기, 대한화기의 작용
- 선천사화는 평생 그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선천화기가 대한에서 沖하게 되면 10년 내에 凶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 生死 관련해서 命, 身, 복덕궁에 화기가 入하거나 沖하는 것은 凶하다. 대한 무간 천기화기가 복덕궁 거문화기를 沖한다.
- 1975년 을묘년 태음화기가 命·身宮에 入한다.
- 음2월 기묘월은 인궁에 좌하면서 문곡화기가 명신궁을 沖하므로 사망하게 되었다.
☆ 별자리 자미두수 연구소는 홍대에 있습니다. 현재 기초반, 실전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