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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1일 수요일
제1독서 : 아가 2,8-14 또는 스바 3,14-18ㄱ
복 음 : 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영적 우정
-주님과 나, 나와 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시편1과 3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론입니다.
따로와 함께의 여정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생각납니다.
반가운 이들의 방문을 대할 때 드렸던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방문 축일입니다’라는 덕담이 생각납니다.
참 좋은 도반들의 방문은 빈손으로 와도 구원의 방문처럼 반갑고
흡사 도반들의 방문 축일처럼 즐겁고 기쁩니다. 어제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그랬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참 많은 강론 주제로 사용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짧기도 하지만 때로 길게 여겨지는 삶의 외롭고 쓸쓸한 여정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 도반이요 도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도반의 예를 들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영적 도반인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늘 우리와 함께하는 영적 도반이 주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 도반과는 달리 인생 여정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함께하는 동반자同伴者이자 반려자伴侶者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영적 우정이 참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우정의 도반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는 애인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감미로운 에로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성 간의 열렬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간의 사랑으로,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견주어 해석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대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신비가들은
주님과 우리의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영원한 연인처럼 마치 에로스적 사랑의 감미로 체험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부 베네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마리말49)
참으로 잘 성숙한 사랑의 수도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면 정결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아가서 중 창가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황홀해 보이는 지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요,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세상에 이런 이성간 연정戀情의 사랑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쓰다 보면 오늘 제 1독서 뿐 아니라 아가서 전체를 써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우리 영혼들이 오매불망 그리워 찾아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 주님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우리 영혼이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오시는
대림시기 우리 주님,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도반이자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영적 우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영적 도반인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사랑의 만남은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두분 간의 영적 우정에 앞서 전제되는 주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마리아가 곤궁 중에 찾아 나선 영적 도반 엘리사벳입니다.
여러분도 마음 답답할 때 언제나 위로와 격려를 찾아 나설 도반은 있는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동시에 영원한 영적 도반인
태중의 세례자 요한과 태중의 예수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감격에 벅차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기쁨의 환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의 십년 체증이 활 풀렸을 것입니다.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기쁨에 넘쳐 덩실덩실 춤추던 다윗이 생각납니다.
마리아야말로 주님을 모신 계약궤와 같습니다.
바로 이 앞에서 다윗처럼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요한이 기쁨에 겨워 뛰놀았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인 주님 안에서 이렇게 만남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큰 위로와 격려의 구원을 받았을 것이며,
둘 간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졌을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영적 우정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 간의 영적 우정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 그분을
‘성인’으로, ‘위대한 영성생활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분을 자주 방문하여 만날 때마다 나는 그분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덕성이 함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분은 좋은 유머 감각을 지닌 분이고 맑고 밝은 분이며 아주 살아 있는 분이다.
그분은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대화도 잘 따라잡으신다.
나는 그분의 명석明晳함에 감동한다. 그분은 ‘큰 분(a great man)이시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영적 우정도 날로 깊이 해 주십니다.
대림2부, 다섯 번째 12월21일 M후렴 “오! 샛별이여(O oriens)”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 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의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허턴의 신자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신부님의 가족들이 기뻐하며 환영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던 아버지 장발 루도비코,
한국의 정치인이었던 큰아버지 장면 요한 총리,
춘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사촌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님이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어릴 때 사탕을 주셨던 할아버지,
휜수염이 멋있으셨던 외할아버지, 용돈을 주셨던 외할머니,
그리운 부모님,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큰 누님, 작은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위안을 받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상교회, 정화교회, 천상교회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반가운 분들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 성가대 단장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평화신문에 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부부도 만났습니다.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께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악은 피하고 선을 베풀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옛날 아인카림 엘리사벳 집의 마당에서 벌어진 일은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한 사건이었습니다.
고작 13~14살의 앳된 나자렛 산골소녀,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사촌 마리아가
친척이라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아이를 가져 슬슬 배가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엘리사벳의 상황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도 마리아보다 6개월 앞서 아기를 가졌는데,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그리고 수군거림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사벳 소식 들었는가? 노인네들이 참 대단하네 그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저 연세에 임신을 하다니!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별 생각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아인 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한 만남, 난감한 만남,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슬픔과 서러움에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 사이에는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기구한 만남이 즉시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한 두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기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종종 체험하는 결코, 원치 않는 만남, 부담 백배인 만남, 호의적이지 않은 만남도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면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직면하는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도 성령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견딜만한 현실, 이겨내고 극복할만한 현실로 변화되리라 확신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하였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없었기에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박재찬 안셀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 요한은
성모님 태중에 있던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놀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는 만나거나 방문할 때 그 사람만 보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이들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처럼 우리도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 뵈올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는 군대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갓 입대하여 강원도 속초에서 85번 훈련병으로 훈련소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매주 주일이면 사단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했는데,
어느 주일 제 옆에 다른 부대에서 온 상병이 앉았습니다.
아직 이등병 계급장도 달지 않은 훈련병에게 상병은 하늘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상병은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 사회에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등등의 호구조사를 하던 중,
제가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고,
신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상병은 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도 제대 후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상병에게 당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이제 한국에서 해산되어 공동체가 없으며,
왜관 수도원에 문의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휴가 때 그 상병은 왜관 수도원을 방문해서 성소 담당자를 만났고,
결국 제대 후 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도원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그때 만약 그 상병이 제 옆에 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그 상병 옆에 앉은 사람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였으면 프란치스코에 입회 했을까요?
저는 문득 그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 상병과 저와의 만남이 새로운 수도성소의 길로 인도했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잘못된 만남으로 서로를 불행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그릇된 집착이
집어삼킬 듯이 상대방을 구속한다면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만남들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만남들은 우리를 삶의 새로움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불가능한 임신한 두 여인이 만났습니다.
노년에 주님의 은총으로 기적처럼 세례자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과
성령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의 만남은
서로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만남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
마리아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성령에 가득 차, 한눈에 마리아의 잉태를 알아채고
그 기쁨에 넘친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연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기 또한 복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할 때 내 안에 예수님과 너 안에 예수님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따르지 않고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사람을 통해 방문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알아채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드리며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게 됩니다.
깨어 준비하는 삶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그 상병이 수도 생활에 관심이 없었다면,
바꾸어 말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제가 수도원에 가보라는 권유에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년에 아기를 갖게 된 엘리사벳도 임신을 한 후 얼마나 기뻤을까요!
오늘날과 달리 당시는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수치와 수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은총에 충만해 준비된 삶을 살았던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통해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면 어땠을까요?
슬픔과 근심 속에서 마리아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며 깨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미사에서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그분과 하나 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내 안에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은총의 말씀을 건네주고 축복해 주고
기쁜 날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그리고 너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미사 후에 성당 입구에서 마리아와 같은 여러분들께
“축복합니다. 기쁜 날 되세요.”라고 엘리사벳의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저와 이러한 인사를 나누면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마리아가 여인 중에 복된 이유가 바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삶 속에서 주님께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아닌 것에는, 단호한 마음으로
“아니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