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8─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2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교회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어린이에 관한 말씀 다음에는 그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다음에 다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문제는, 나 혼자만 죄를 짓지 않고 나 혼자만 구원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백 마리 가운데 나를 포함한 아흔아홉 마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하여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제키엘에게도, 동족에게 가서 경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가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악인이 죽은 책임을 그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일이 떠오릅니다. 어떤 신부님과 꽤 먼 길을 가던 중에, 작은 휴게소 같은 가게에 들렀습니다. 가게에 있던 자매님은 자기가 오래전부터 냉담 중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님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솔직히 신부님이 너무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고,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아도 내일부터 다시 냉담을 할 텐데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을 더 만드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일이 왜 이렇게 뚜렷이 기억날까요? 그 일을 저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자매님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혹시 그 뒤에 또다시 냉담하였다 하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 자매님을 계속 교회로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를 보았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앞에는 안덕 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집 앞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돌을 캐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선산이 있고, 집안의 장손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끔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해님만, 달님만 알아준다면 만족한다는 두메 꽃처럼 깊은 산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랫마을에 쉼터가 생겼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아픈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입소문이 나서인지 외지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시는 정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망하는 사람이 출생하는 사람보다 적어지면서 도시의 기능과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는 상주인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렸는데, 요즘은 강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강북만이 가지고 있는 정과 문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에는 고궁이 있고, 한옥이 있고,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의 취향과 입맛을 끄는 콘텐츠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적이 드문 마을들에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명동에서 8년을 살았기에 강북의 맛과 멋이 있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명동에서 나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과 남산길이 있습니다. 을지로로 내려오면 도심 속의 쉼터인 청계천 물길이 있습니다. 종로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혜화동으로 나가면 대학로와 낙산이 있습니다. 홍대, 연남동, 경의선 길, 성수동, 이태원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서울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여수에는 벽화 거리가 있고,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순천에는 습지가 있습니다. 양양에는 서핑 해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다릅니다.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멋지게 늙어가면, 새로운 콘텐츠가 접목된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미주 지역에는 140여 개의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이민과 유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한인 성당이 늘어났고, 공동체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한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인원의 감소입니다. 고령화되면서 고인이 되는 분들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은 미국성당으로 가거나,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민과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공동체의 갈등입니다. 사소한 이유도 있지만, 본당의 신축과 이동이 관련된 갈등도 있습니다. 사제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갈등의 폭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과는 다른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렇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