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시아=조선 원문보기 글쓴이: 현상태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자료출처 디지털 한국학>
=====================================================================================
이렇게 삼국사기 기록만 보아도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가 수천의 기병을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수천의 기병을 운용하려면 수만마리의 말이 필요하다. 훈족들이 전쟁을 할 때 한 사람당 말을 4-6마리 가지고 다닌다고 하였고, 징기스칸 부대도 대동소이하다고 기록에 나와 있으니 기병을 주전술로 사용한 고구려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마리의 말 최소 2마리 이상의 말을 가지고 있어야 기병전술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 수천 많게는 몇 만마리 이상의 말이 운용되었을 것이며, 그래야만 이 전쟁이 좌원대첩이라고 불릴 만 한 것이다. 또한 전장에서 죽게 되는 말이 생기므로 지속적으로 좋은 말을 공급 받는 지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초기 부터 강역안에 자체적으로 거대한 말 생산지가 있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마음대로 엄청난 양의 말을 징발할 수 있는 복속국이 있어야 한다 . 실제로 주몽은 동부여에 있을 때 부터 마구간을 관리였다는 사실은 동부여에 많은 수의 말이 있었다는 반증의 메세지 이기도 하다.
25사의 동이열전과 및 삼국사기에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의 동쪽에 접해 있다고 나오며, 말갈(靺鞨)과 백제(百濟) 왜(倭)가 이 자주 침입해 온다. 또한 말갈은 반도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현재 길림성 집안현을 기준으로 단동이 고구려의 서쪽 경계라 간주하고 사서에 고구려가 동서로 2000리라고 했으니 현 지도에 대입하여 보면 고구려의 동쪽 끝 경계는 현 블라디보스톡이나 북한 중국 러시아의 접경지대쯤 된다. 또한 남북으로 1000리이니 남으로 신라 북으로는 말갈에 접한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한다면 말갈이 신라를 쳐들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신라 초에 북방에 말갈의 침입이 빈번하게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그 기사를 삼국사기를 통해 보자
1)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14년(125) 봄 정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또 대령책(大嶺
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지났으므로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니 적병이 듣고서 물러갔다.
2)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 4년(137)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長嶺)의 목책(木柵) 다섯 개를 불살랐다
3) 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人大疫
- 8년(203) 겨울 10월에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이 기사를 보면 신라와 말갈이 전쟁을 하려면 양국의 경계는 접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는 고구려의 동쪽에 있어야 하므로 결국 신라는 아무리 봐주어도 최소 동경 130도 북위 45도 선상 주위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라가 있는 그곳은 함경도 앞 바다가 되고 만다. 그렇기에 반도로 삼국의 강역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위 기사에서 백제가 구원병이 등장하는데. 백제가 초기에 신라와 전쟁을 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많이 보이며 또한 말갈 또한 백제국경을 제 집 드나들듯 자주 넘어다니다.
그러면 굳이 사료적 지식을 모르는 아마추어라도 말갈/신라/백제는 거리상 가까워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있는 말갈이 한반도 충청도에 있는 아직 소국인 백제를 구원 가려면 그 사이의 낙랑/옥저 그리고 아직 남은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거쳐야 하며, 그들이 백제가 신라의 길을 얌전하게 터줄리가 없다. 또한 말갈이 백제 국경을 가게 놔두는 바보같은 짓도 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거리상 너무 멀며 한반도에는 곳곳에 산악지형이 많아 이동시일이 오래 걸리게 된다. 말갈이 야만인들이었으니 병법에 기초도 몰랐을까? 아무리 바보천치라도 험한길로 말을 타고 이동하지는 않으며, 이익이 보이지 않는 곳에 군대를 파병할리 없다. 전쟁은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이익 획득하기 위해 무력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행위이다. 따라서 반도사관은 곳 식민사관의 연장선인 동시에,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초기에 말갈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부분노가 선비를 쳐서 항복 시켰다고 나오는 기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를 쳤다는 기록은
4)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心感激
16년(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날 밤은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사졸을 위로하고 몸소 나무로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속으로 감격하였다.
서기 245년에서야 고구려와 신라가 북쪽 변경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것은 그전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며 동으로 고구려가 신라와 접했다는 기록은 후한서에 처음 나오므로 그 이전에는 동쪽으로 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그러나 신라가 마한의 동쪽에서 성장했다는 말로 보아 신라는 처음부터 고구려에 복속되어졌으나 서기245년경 독립을 시도하려는 독립전쟁의 성격또한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사관에 의하면 신라는 반도의 경상도 지역에서 소국을 병합하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서기245년에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면 고구려의 영도가 당시 경상도 일대였다든가 신라의 영토가 함경도 지역에 걸처 만주의 흥개호 일대에 까지가 초기 신라의 영토여야 위 사료를 만족시킬수가 있다. 백제 또한 현 길림성까지 올라와야 접할 수 가 있으며 또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으로 볼 때 백제는 원래 현 개마고원 일대에 있어야 하며 동시에 말갈과 접해야 되는 상황이 되버린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지리적인 강 산맥 등등 여러 위치가 안맞아 영역을 북쪽으로 올려야 하며 현재의 반도와 반주로는 지리적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함에도 . 강단사학은 물론 또한 재야 사학자들 조차 이것을 묵인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럼 만주 지역으로 옮겨 오면 설명은 되는가?
다음 백과사전을 보면,
- 만주 (중국 지역) [滿洲, Manchuria, 동북지구, 둥베이]
선사시대에 만주는 볼가 강에서 광대한 유라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한반도로 이동한 유목민족이 이용한 천연 간선도로의 동쪽 종점이었다. BC 1000년경 이미 중국 문헌에는 만주의 일부 부족이 언급되어 있다. 중국인이 만주 남부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BC 3세기경이었다. 그후 수백 년 동안 만주 남부로 이주하는 중국인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한대
(漢代 : BC 206~AD 220)에 만주땅의 일부는 한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한나라는 정복한 영토를 군(軍)관할구역으로 편성했으나 한나라가 무너진 뒤의 혼란기에 중국의 만주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약화되었다. ......................중략)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曰 "寡君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혁거세53년(서기전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서기 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八年
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十二月 地震 無雪
8년서기 64)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 十四年 秋七月 百濟襲破國西二城 虜獲民口一千而去 八月 命一吉
14년(167) 가을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돌아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興宣)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치게 하고, 왕도 또한 기병(騎兵) 8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 곳에] 다다랐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 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보자.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온조왕)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40년(서기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衆不可敵 乃還前所掠8월에 신라 왕이 일길찬(一吉 ) 흥선(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들을 쳐들어 왔다. 신라 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이어 한수(漢水)까지 엄습하여 왔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곧 앞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三年 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城主固拒 賊退歸
王帥勁騎八百 追之 戰沙道城下破之 殺獲甚衆3년(216)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였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퇴각하여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二十五年 春
靺鞨長羅渴獻良馬十匹 王優勞使者以還之25년(258) 봄에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은 초기 부터 기병을 운용해왔다. 기병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말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며,항시 말을 훈련시키고 길들여야 한다. 이것은 삼국이 말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에 있거나 그곳과 매우 가까워야 하며 좋은 말을 받고 후하게 보냈다는 말이 백제 신라에서 말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는 점을 알수가 있다. 또한 기병을 운용할 때, 최소 수백 ~최대 팔천까지 운용하는데, 약소국이라는 신라의 기병 운용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기병과 보병의 운용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점, 전쟁하는데 8천의 기병대를 이끌려면 보병 또한 만만치 않은 숫자일 것이며 ,그것은 병법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초기 삼국 또한 소규모의 국가가 결코 될 수 없다. 설령 탐라 (제주도)에서 말을 공급받는다고 해도 현재의 조랑말은 고려 이후에나 키웠다고 하며 몽골이 사육장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현 제 제주도섬에서 말을 공급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사실인지 알수가 있다.
위 사진은 제주섬 토속마이다. 이것을 가지고 전투를 하는가. 참으로 적의 놀림이 되고 싶으면 이말로 싸울 수는 있다. 이 제주 토속말인 청총마는 겁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나 물체가 접근해 오면 줄행랑을 치는 녀석이다. 과연 이말로 정예 기병을 만들수 있는가? 정예기병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최소한 앗시드 라딘의 <집사>에 나오는 몽골의 기병들이 타는 말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말은 서극마西極馬, 한혈마汗血馬라 하는데 이 말들은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 신강성/ 타지키스탄/ 우즈벡에서 생산되는 말을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말을 키우는 지역은 대흥안령이서 지역이다 .유목민이라고 해서 다 말을 키우지는 않는다. 유목지역이라고 불리우는 연해주 아무르강 이북에서는 말을 키울 수가 없다. 그 쪽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잘 살지 않는다. 그 곳 주민들은 또한 오직 양이나 순록을 주로 키우며 살아간다. 따라서 말갈 여진 후금/청이 여기 만주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최소 현 대흥안령 이서 내지는 몽고가 되어야 하며 삼국 또한 최소 대흥안령이서로 옮겨져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삼국사기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상 윗글에서 본 바와 같이 초기 삼국의 위치는 반도나 동북삼성지대에 있을 수가 없다. 최소 대흥안령 이서 아무르강 이서 에 있어야 한다. 이 위치를 만족 시키려면 최소 동경120도 이서에 있어야 하며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신라 또한 엄청난 양의 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온조왕 같은 경우 사냥할 때 기병 1천을 데리고 다녔으며 신라의 경우도 기병 2천 ~8천을 초기에 운용했다.
기병 8천이면 최소 보병 2만이상의 전투력이다. 결코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지극히 실질적인 숫자이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수 있다. 마한의 제후국이 수천의 기병과 수만의 보병을 함께 운용한다는 것은 이시대의 마한, 즉 중마한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월지국에 속해있는 마한/진한/변한 소국을 합치면 78개국이 된다. 백제가 신라가 초기 군사 1천에서 ~2만정도의 군대를 움직이며 성을 무수히 쌓은 것으로 보면 상비군은 더 있었다는 소리 이며, 다른 기타 소국들도 즉 왜 변한, 가야 ,낙랑 들이 결코 백제 신라에 전력이 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도 군대를 최소 2만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소국의 크기를 감안하여도 최소 오천이상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결국 마한을 백제가 통일하였다고 하니 그 소국이 54개국이다. 그것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을 당시 군대가 단순추산으로도 50만에 육박한다고 볼 수 있으며 진한 또한 24국이라고 하였으므로 진한을 통일한 신라 또한 20만 이상의 대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치원이 '고구려 백제가 전성시에 강병 백만을 보유했다'라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