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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온 교훈7:14~19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7:20~24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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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자신의 교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면서, 사람을 고친 자신에게 왜 노여워하는지 반문하십니다. 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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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온 교훈7:14~19
초막절은 7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34).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공식적인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뛰어난 교훈을 전하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곧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교훈의 출처라고 하십니다(16절).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교훈의 목적이라고 하십니다(18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의가 없고 진실합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가르침의 동기와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의 교훈이 진실하고 참된 근거는 무엇인가요?
나의 일(사역, 가르침)에는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 영광을 위한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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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7:20~24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 사역에 대해 변론하시며, 유대인이 안식일에도 시행하는 할례를 예로 드십니다. 유대인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제8일에 언약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행합니다(레 12:3). 할례를 행할 시기가 안식일과 겹치는 경우, 할례 규례를 더 중시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모세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22절; 창 17:9~14).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5:8~9)은 안식일 규례보다 인간의 생명을 우선시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정죄해 죽이려 합니다(5:16~18).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모세 율법을 내세웁니다(출 31:15). 진실한 의도를 살펴서 공의로 판단하지 않고 외모(겉모양)로만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판단 기준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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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
이단 교주들이 아무리 자기가 메시아라 외쳐도 절대 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나처럼 거룩하라!”라는 말입니다. 이단 교주들의 특징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삶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늙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후계자를 걱정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돈, 막대한 부동산과 보화들을 아무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고심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육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사람들을 유혹했지만, 정욕과 죄의 길로 가다가 멸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이단 교주 등을 내세운 사탄에게 마음을 뺏깁니다. 외모로 속이는 사탄에게 현혹당하는 것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말이 자기 입맛에 맞으니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고 다 옳다고 생각하니 자기 죄와 허물을 못 보고, 죄를 사하러 오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버리십시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모든 것을 내주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으로의 여행 / 유재명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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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7장 17절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들어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마음에 성경이 열리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길 때 복음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진다. - 존 맥아더
오늘의 기도
주님, 제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살펴 그 뜻이 제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순종하게 하소서. 제 어리석은 기준을 내세워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요한복음7:14-24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이 일을 두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이 일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 일로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셔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랍게 여겼습니다
이유는 배우지 않은 사람인데 어떻게 글을 아는지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과 대화가 오고 갑니다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대화가 지난번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일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말은 유대인의 입장으로서 굉장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20절에 "당신은 귀신에 들렸도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너희들이 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지
지난 번에 있었던 38년된 병자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22절에 이스라엘의 할례 이야기를 합니다 모세가 할례를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할례는 아기를 낳고나서 8일째 할례를 행합니다
8일째가 안식일이 되어도 할례를 행합니다
이유는 모세의 율법이 있기전에 아브라함때에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에 할례를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구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작 38년된 병자를 살리는 일은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것과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일
모두가 율법의 본질인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데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을 말하며,
안식일에 일하냐 일하지 않냐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근본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살리는데 사용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사용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잣대로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율법의 목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사람을 살리는 우리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당신의 교훈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외모를 보는 사람들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놀라워한다. 예수님이 유명한 랍비에게 배운 적이 없음에도 뛰어난 학식을 가지셨음에 놀랐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학벌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지금도 학위, 외모, 성별, 나이나 직업 등 외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 뜻을 전하는 예수님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교훈이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그에 대한 증거로 두 가지를 드는데 하나는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당신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되고 의롭다는 증거이며 또한 예수님의 복음이 복음이고 진리인 증거이다.
공의롭게 판단하라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벌인 논쟁을 마무리하며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외모를 중시하고 외적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할 때가 있는데 복음의 능력은 외적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또 우리가 중시하는 외적 기준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이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생명을 살리는 사명에 있어서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힘써야 하겠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셨기에 우리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았는데 자칫 세속적이고 인간적 기준으로 사명 감당하는 일을 제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마음을 모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중간에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랍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인 예수가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오직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께서 갑자기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질책을 하십니다.
무리는 황당해하며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요한복음 5장부터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유는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혈기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이 안식일의 논쟁이 되었고 결국 무리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무리가 지켰던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의 영광이 되어 자랑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 38년 된 혈기 마른 자를 고치는 사건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되십니다.
예수님은 22-23절을 통해서 할례와 안식일의 관계를 성명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할례가 안식일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7일에 한 번씩 돌아옵니다. 할례는 출생한 후 8일째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할례를 받아야 할 날이 안식일이 되는 경우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할례를 지켜야 합니까?
문제는 할례나 안식일을 지켰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을 당연히 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5장에서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할례는 단순히 남자의 양피를 잘라내는 행위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는 아브라함의 권속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할례의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을 맺은 후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이 모습은 만약에 언약을 어기면 쪼갠 고기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이 16장에서 언약을 불순종하고 이스마엘을 낳는 모습이 나옵니다. 즉 창세기 17장의 할례는 하나님이 은혜가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언약을 어긴 아브라함이 쪼갠 고기처럼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그의 양피를 잘라 내심으로 그를 대신하여 돌아가실 메시아에 대한 예표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1-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할례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진정한 할례와 안식일이 관계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일이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안식일)과 할례를 외모로만 판단했습니다. 그곳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할례는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과 할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킬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공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진정으로 공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시고 그의 몸을 우리의 할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꼭 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경건했습니다.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우리의 영광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삶을 주장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며 놀라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교훈이 진실한가이지, 그의 학벌이나 출신지역 같은 외모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18)
또한 예수님께서 38년이나 투병생활을 하던 자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모세가 명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며 비방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자기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더 큰 명령은 무시하면서, 예수님께서 돈 받고 고치신 것도 아닌데 병고치신 것을 일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일이 생명인가이지, 그 날이 어떤 날인가 하는 외모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19~24)
그러나 지금도 마귀는 항상 비본질적인 것을 부각하여 본질적인 것을 덮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눈을 가려서 복음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3~4)
어떤 목사님이 청년들을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하고 격의 없이 다가가려고 젊은이 예배를 만들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설교했더니, 사람들은 왜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 목단추를 하나를 풀고 설교하느냐 비방했습니다 참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수건을 쓰고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3:14~15)
그러나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써 주께로 더욱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수건이 벗겨지고 마귀의 미혹이 떠나고 주의 영 안에서 주의 진리에 다다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 복음을 초월하여 전파하는 삶입니다(14~16절).
홀로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은 초막절 중간쯤 되었을 때,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습니다(14절). 예수님은 동생들의 인간적인 충고를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세와 은혜가 충만한 이유는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16절,새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배운다는 것은 먼저 인정받는 랍비로부터 배워서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정규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음에 대하여 유대 엘리트층의 분노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이 지혜롭게 잘 전하고 또한 가르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해는 세상에서 얻는 지식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세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대단한 교육을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능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십자가 복음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분별하여 가르치는 삶입니다(17~19절).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예수님이 마음대로 지어낸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17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불의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18절). 그런 유대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모세와 율법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의 정신에 무지하고 지키지도 않고 있다고 지적하심과 동시에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책망하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후예들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정작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의 열심은 형식적인 데서 그쳤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심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내포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 그들은 결국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자신이 듣는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전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생각과 내 스스로의 말이 아닌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홍수처럼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고, 배움의 기회도 많아진 시대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거의 신학교 수준의 교육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열심과 열정들이 배우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와 교육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공과 영광을 구한다면 자칫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교묘하게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지 잘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받는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내 자신 스스로가 잘 분별하여 전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공의로 판단하여 순종하는 삶입니다(20~24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반응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오?’라며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한 한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21절)고 말씀하십니다. 즉,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하신 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내린 할례법을 열심히 준수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즉,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나에게 노여워하느냐...’(22~23절)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실천하기보다는 외형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을 향하여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차원에서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가능 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차원에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 또한 정당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이 정해놓은 신앙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엄중한 잣대를 내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문제 삼으면서 정작 내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닫고 공의로 판단하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과 권능을 힘입어 사람들의 반응을 초월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를 잘 판단하여 주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7:14~2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레 12:1-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6~9)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 8:33~36)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9~1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한일서 2:17
세상 만물이 주님을 통해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분 안에는 생명, 그 사람들의 빛이 어둠 속에서 여전히 비추고 있으나
그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음을 요한의 증거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짧고 바람 같은 이 인생길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 신실하신 주님을 사모하는 이들이 더 풍성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패역한 세대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노래하는 파수꾼과 청지기로 걸어가도록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소서.
보이지 않는 곳곳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고 계신 열방의 선교사님들을 지켜주시고,
그 가정과 자녀와 동역자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뤄지고 부족함이 없도록
그 모든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채워주시옵소서.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뻗어주시고,
그 은혜와 진리로 그 눈물을 덮어주시옵소서. 분쟁과 미움, 분노와 사랑이 식어가는
마음으로 빛을 잃어가는 이 나리와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소서.
감사와 찬송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