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엔 여전히 황실이 존재하죠.
이에 일본 대중들에겐 황가 사람들의 삶, 특히 그들의 결혼 소식 등의 이슈가 항상 많은 화제를 모으는데요.
특히 125대 천황 아키히토 현 상황과 그의 아내 미치코 상황후의 러브스토리는 매우 유명하죠.
두 사람의 결합이 특별히 더 이목을 끄는 건 신분 차이를 극복한 결혼이기 때문인데요.
실제 미치코는 황실 입성 당시 최초의 평민 출신 황태자비였죠.
이에 황가는 오랫동안 그녀와의 혼인을 반대했지만, 계속되는 황태자의 노력에 결국 그녀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후에도 그녀를 향한 황가 사람들의 배척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미모의 수재로 자란 미치코
아키히토 천황은 1933년 쇼와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쇼와 천왕이 죽음을 맞이한 1989년의 다음 해인
1990년에 천황으로 즉위합니다. 황후 미치코와는 1959년에 결혼했는데요.
두 사람 슬하에는 나루히토 황태자 등 2남 1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쇼다 미치코는 일본 왕실 최초의 평민 출신 비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딸이었는데요. 그녀의 아버지는 쇼다 히데사부로는 아시아 최대 제분 회사이자
일본 재계 20위에 빛나는 닛신 제분의 회장이었고, 어머니인 후미코는 구 백작가문 소에지마 일족의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부유한 환경에 모자랄 것 없이 자란 미치코는 어느덧 성인이 되자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는데요.
학창 시절 그녀는 매우 뛰어난 학생으로 학생회장을 역임했고, 졸업 시에도 수석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실 그녀의 원래 목표는 대학원에 들어가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가문에선 그녀가 얌전하게 신부수업을 받고 결혼을 할 것을 바랬기에 대학원 진학을 반대했고,
결국 그녀는 그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테니스장에서 시작된 세기의 커플
이렇게 졸업 후 사교계에 진출한 미치코는 어느 날 미치코 친구와 함께 테니스장에 들리게 되는데요.
그때 지인의 소개로 그녀는 아키히토 왕세자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어 당시 두 사람은 상대 팀으로 테니스 경기를 치르게 되는데요.
경기 초반 미치코의 팀이 약세로 왕세자 팀에게 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기지와 리더십 발휘로 경기의 승자는 결국 미치코의 팀이 차지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왕세자는 아름답고도 지혜로운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되는데요.
그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점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만,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왕실은 물론 쇼다 가문에서도 환영할 수 없는 결합이었습니다.
황실은 그간 모두 왕족 내지는 화족에서 간택된 신붓감만 받았기 때문에
비록 부유층일지라도 평민의 자녀인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게다가 미치코의 아버지는 이미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은 상대가 따로 있어 황가에 시집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치코의 부모님은 그녀를 해외 여기저기로 도피성 여행을 보내기에 이르는데요.
하지만 양가의 반대가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먼 곳에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녀는 전화 및 서신 등으로 꾸준히 소식을 주고받는데요.
이 같은 과정에서 왕세자는 그녀에게 확신을 갖게 되고 전화 통화로 프러포즈를 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완고함에 황실도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게 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1958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의 혹독한 시집살이
하지만 결혼 전 이미 황가 내 눈엣가시로 전락했던 그녀는 이후 수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요.
미치코의 고난은 결혼 준비 중 천왕과의 첫 알현과 기자회견을 치르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었는데요. 이는 덴노를 알현하기에 알맞은 의상을 고르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쇼다가문은 자신들이 마련할 수 있는 최고급 의상을 딸에게 입히고,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궁내청 직원에게 전달합니다. 이는 해당 의복이 적합할지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는데요.
당시 직원은 쇼다 가문 측에 “짧은 장갑은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황실에서나 쓰는 긴 장갑을 도저히 구할 수는 없었는데요.
결국 그들은 직원이 보내준 긴 장갑을 미치코에게 끼워 기자회견을 치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후에 그녀의 집안은 엄청난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요.
이는 그녀의 집안에서 궁내청 직원에게 보낸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죠.
이에 황족들은 크게 분개했고, “출신은 숨길 수 없다며” 그녀의 집안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쇼다 가문은 이렇다 할 해명도 못하고, 수차례 사과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미치코를 향한 황가의 무시와 차별은 결혼 후에도 계속됐고,
특히 그녀의 시어머니였던 고준 전 왕후의 시집살이는 엄청났다고 하는데요.
황가 사람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만 드레스 코드를 알려주지 않아 그녀를 망신시켰고,
제대로 된 법도를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황가의 규칙을 여긴 그녀를 질타하기도 합니다.
황자를 낳은 뒤에도 계속되는 황가의 차별
황태자비를 향한 멸시는 이후 그녀가 자녀들을 낳은 뒤에도 끝나지 않았는데요.
게다가 그녀는 자녀의 출산 및 양육 방식에서도 기존 왕실의 관례와는 다른 방식을 더 선호했기에 미움은 커져만 갑니다.
실제 미치코는 궁궐 안 산재가 아닌 국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보통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아닌 유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기존 왕실 법도와 달리 직접 모유 수유에 나서며 스스로 양육하려고 했습니다.
또 그녀는 아이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에 어린 시절 대단한 말썽꾸러기였던 둘째 후미히토 친왕이 심한 장난을 치자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들을 따끔히 훈육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황후 및 황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평민 주제에 감히 귀한 황자에게 손을 대다니”라고 말하며 오히려 그녀를 크게 꾸짖었다고 하죠.
미치코는 황자의 친어머니이자 황태자의 엄연한 정식 부인이었지만 황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의 출신이었던 듯싶은데요.
아키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해 미치코가 왕비로 봉해진 뒤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자
이때부터 그녀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만 59세 생일에는 졸도한 뒤 실어증 증세까지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황실 내 여인 중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미치코,
당연히 화려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였는데요. 하지만 실제의 황가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