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6,59ㄴ-6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9 “나는 네가 한 대로 너에게 해 주겠다. 너는 맹세를 무시하여 계약을 깨뜨렸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1 너와 맺은 계약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내가 네 동생들과 함께 네 언니들도 데려다가 너에게 딸로 삼아 주면,
너는 네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62 이렇게 내가 너와 계약을 세우면,
그제야 너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낱낱이 늘어놓지만, 그 맥락은 예루살렘의 죄악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서 16장 1절부터 15절까지 읽고 그다음에 60절로 가는데, 15절부터 59절까지는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면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긴 고발과 심판 선고를 앞두고,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에제 16,60)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15절부터 59절까지 볼 때, 예루살렘이 지은 죄는 많고도 큽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처벌도 분명히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멸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멸망은 다른 어떤 데서 오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고하시고 실제로 치시기 전에, 당신께서 예루살렘에게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기, 아무도 돌보지 않고 던져 버린 아기를 하느님께서 살려 주시고, 계약을 맺어 아내로 맞으시며 귀하게 꾸며 주셨습니다. 생명을 지킨 것부터 먹고 입고 왕비가 된 것까지 모두 하느님께서 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렸어도 하느님 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십니다. 지금이 비록 심판의 때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피투성이를 살려 주시고 알몸을 덮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께서는 심판과 함께 이미 용서를 약속하시고, 한번 맺으신 사랑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으십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며칠 전 가슴을 움직이는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입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삶을 주도하게 됩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은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문명은 생각의 탄생으로 열렸습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생각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예술은 생각의 열매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제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장엄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우리 영화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BTS의 음악은 K Culture의 우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생각은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상(模像)’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과 지적 인식능력과 선택과 행위의 자유 덕분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대로 믿지 않으면, 믿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빵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우리가 빵을 적게 가져왔다는 말씀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빵을 많게 하는 효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사이의 교만과 헤로데의 욕망이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미신이 되고, 광신이 되고,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폭력과 전쟁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공동선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같습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혼인하여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