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회력설교) 20270524성령강림절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요 7:37-39, 민 11:24-30, 행 2:1-21, 시 25:1-15
갈증 없는 시대, 성령의 생수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방언의 기적과 함께 사도의 설교로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했다는 기록이 사도행전 2장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임재와 함께 교회가 시작됩니다. 보통 성령강림절엔 사도행전 2장을 설교 본문으로 취하지만, 저는 오늘 요한복음 7장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7장으로 함께 가보도록 합시다.
오늘의 교회력 복음서 말씀은 7장 37-39절, 단 세 절로 매우 짧습니다. 3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첫 단어가 “명절 끝날”입니다. 어떤 명절인지는 요한복음 7장 1-2절에 나옵니다. 이날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입니다. 예수님이 서서 외쳤다는 설명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유대인의 초막절 관습 때문입니다.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불리는 초막절은 모세와 함께 출애굽했던 백성이 광야 40년 생활 끝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한 날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자기 집을 비우고 마당이나 옥상, 또는 너른 공터에 나가 나뭇가지로 임시 장막을 짓고 그 안에서 잠을 자는 풍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시작하면서 “명절 끝날”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끝 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일주일 내내 들뜨게 됩니다. 멀리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이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마다 한 가지 의식이 반복됩니다. 이날 아침 의식을 위해 뽑힌 제사장이 황금 물병을 들고 성전 아래쪽 실로암 못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물을 길어 다시 성전으로 올라오는 데, 그때 모인 군중들이 제사장 행렬을 따라 올라가면서 시편을 노래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라는 구절이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겁니다. 그렇게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제사장이 성전 제단에 붓는 게 일주일 간 이어지는 초막절 아침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난 광야 사건의 기억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반드시 메시아가 나타나시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구쳐 모든 민족에게 흘러갈 것이라는 약속, 곧 에스겔 47장과 스가랴 14장에 기록된 환상을 기억하는 예배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절정에 이르는 날이 일곱째 날, 곧 명절 끝날, ‘큰 호산나의 날’이라 부른 그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제사장들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온 다음 제단 주위를 일곱 바퀴 돌면서 물을 붓는데, 이때 모인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호산나, 구원하소서.” 그렇게 백성들이 과거의 광야 40년을 기억하면서, 이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게 됩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 7:37의 그 짧은 구절에 담긴 배경입니다. 이제 37절을 다시 봅시다. 물 병이 비워지고 사람들의 노래가 잦아드는 그 잠깐의 순간에, 어떤 젊은이가 군중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
자 여러분,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면, 지금 이 광경이 얼마나 도발적이었는지 조금은 느껴지실 겁니다. 이건 단지 세상물정 모르는 MZ세대 발언이니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갈 성질이 아닙니다. 민족의 대명절, 국가적으로 중요한 공식행사 석상입니다. 제사장이 정해진 의례에 따라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났던 그 물, 메시아의 약속이 담긴 그 물이 지금 막 제단에 흘러내리는 데, 갈릴리 출신의 이름 모를 청년 하나가 불쑥 일어나 “그 물 말고 내게로 오라”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이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의 상황입니다.
요한은 이 일을 기록하고서 친절하게 한 마디 주석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9). 무슨 말인가요? 이 청년의 말은 그 성령이 나를 통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함께 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 사건을 읽었는데, 그 사건이 초막절 그날 바로 이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령의 출발점은 갈증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면서 읽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일이 일어날 대상을 누구라고 하시나요? 그 대상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목마른 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신앙이 좋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 경건한 채 하는 사람, 큰 믿음있는 사람, 기쁨이 충만한 사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라고요? “누구든지 목마른 자라면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갈증 있는 사람, 결핍이 있는 사람, 비어 있는 사람이 대상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주님이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정말 목마른가
예수님의 이 짧은 말씀이 우리 안의 굳은 껍질을 깨는 망치 같이 읽힙니다. 우리는 갈증 없이 성령을 받으려 합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과 결핍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채워달라고만 합니다. 우리 기도의 목록을 돌아보면, 대개 소원 목록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남편 사업이 잘되기를, 집값이 오르기를, 건강검진 결과가 좋게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기도의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고 경청하고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한 번 솔직히 돌아봅시다. 우리 대부분의 기도에 담긴 것은 더 큰 사업, 자녀의 더 좋은 성적을 향한 목마름, 더 빠른 응답이지, 하나님 그분 자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오늘의 시편 25편 첫 구절의 한 고백이 우리에게 비수처럼 박혀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 25:1). 시편의 시인은 주를 우러러본다고 하지, 주께서 주실 것을 우러러본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온 마음이 하나님 그분 자체를 향해 목 말라하는 것, 그 타는 목마름이 성령 오시는 자리가 됩니다.
받는 영성, 흘려보내는 영성
여기서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볼 만합니다. ‘그럼 도대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의 통념을 단번에 뒤집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잘 보세요. 무언가를 ‘받는다’고 하지 않고,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강’이라고 말하지 않고,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줄기 시냇물이 아닙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여러 강줄기입니다. 뚝방을 막아서 제어할 수 있는 그런 한줄기 물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솟구치는 강물을 주님은 성령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제껏 우리가 “당신은 성령 받았습니까. 얼마나 받았습니까. 얼마나 충만합니까. 얼마나 강한 임재, 강한 기적을 체험했습니까.”라고 하던 질문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늘 ‘내가 성령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주님은 성령의 방향을 내가 아닌 나 밖으로 돌려 놓습니다. 예수님은 또 성령을 생수에 비유하시는데, 생수가 어떤 물인가요? 살아있는 물이고, 살리는 물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신 곁에서 그 물로 누가 살아났습니까. 당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당신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살아나고, 갈증을 해소했으며, 얼마나 기쁨을 만들어 냈습니까?”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성령 받은 증거가 바로 이렇게 내가 대박 나는 게 아니라 나오 인해 이웃의 유익이 얼마나 커졌는지, 기쁨과 평안이 일어났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 받으면 눈에서 불이 나오고, 자기를 드러내고, 권위를 세우고, 자기 욕망과 감정을 채우는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오히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겸손히 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빛나는 자리에 올리는데 힘을 씁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는 우리, 세례 받았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의 교회는 어떤 성령의 사람인가요?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때까지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음이라”(요 7:39). 이 한 문장이 요한복음 전체에 담긴 메시지를 압축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줄곧 ‘영광’이라 부른 사건은 단 하나,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요 12:23). 그 직후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비유가 따라옵니다. 성령 받은 이에게서 빛나게 드러나는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자기 자신이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질 때 비로소 성령 받은 증거가 드러납니다.
진 밖의 엘닷과 메닷
마음이 좀 무거우신가요. 이제 위로의 음성도 함께 들어봅시다. 오늘 구약의 말씀으로 읽은 민수기 11장으로 옮겨봅시다.
구약의 말씀으로 민수기 11장 24절부터 읽었습니다. 모세가 70인의 장로를 세우자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배경이 좀 많이 불편합니다. 11장을 눈으로 빨리 읽어보세요. 애굽에서 노예였던 사람들 데리고 나왔더니 광야에서 기껏 한다는 말이 ‘라떼는 말이야’하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배고프다는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먹였더니 하두 먹어서 입에 물렸나 봅니다. 그래서 이어 나오는 불평이 고기 먹고 싶으니 고기 달래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여기저기 고기 안 주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모세가 괴로운 정도를 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고기 달라는 백성의 불평이 극에 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다 꼰질러 버립니다. ‘뭐하러 날 이 자리에 세워서 이 생고생을 시키시냐’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민수기 11장 16절부터 시작합니다. ‘그거 혼자 감당하지 말고, 장로 70명을 세워서 함께 해결하래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고기 달라고 했으니, 아예 냄새도 질리도록 먹여서 다시는 고기 달라는 소리 안 나오게 하겠다고 굳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18-24절까지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생고생하던 노예들을 데리고 나왔더니 고기 달라는 말 밖에 안 합니다. 폭폭할 노릇입니다.
그런 다음, 오늘의 교회력 본문 말씀이 시작됩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70명의 장로를 세우자 하나님 영이 세워진 장로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렇게 영인 임한 장로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그리도 달라던 고기를 백성에게 먹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진짜 이야기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24절부터 봅시다. 그날 회막에 없던 두 사람이 있지요. 엘닷과 메닷입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격이 모자랐는지, 몸이 아팠는지, 시간을 못 맞췄는지, 본문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두 사람은 회막에 없던 사람들, 변두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도 영이 임했고, 진 밖에서 그들이 예언합니다. 한 청년이 달려와 모세에게 이 일을 보고합니다. 옆에 있던 여호수아가 분개해서 하는 말이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막으소서”(민 11:28). 그때 모세가 무어라 답하나요.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
이 한 구절을 천천히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 권위를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 밖에 있던 사람에게 임한 영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백성에게 그 영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천 년이 지난 오순절 그날, 베드로가 일어나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인용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바로 이 소망이 1000년이 지나 오순절에 비로소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자유인도 종도, 안에 있던 자도 밖에 있던 자도, 모두 다 부어 받습니다.
갈증이 곧 자격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진영 밖의 엘닷이고 메닷입니다. 회막 안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부족하다고, 기도가 짧다고, 성경을 다 못 읽었다고, 십일조도 제대로 못 한다고, 직분자가 아니라고, 근본적으로 우리는 저 시대 저 장소에 있지도 않았다고 미리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돌아보며, 포기하고 갈증하는 사람에게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너, 너희에게 영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진 밖에 있다고 해서, 변두리에 있다고 해서,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고 해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다는 때, 그 갈증과 결핍은 부끄러움이나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신 복된 음성입니다. 그 갈급함과 결핍 위에 성령의 위로가 임합니다.
오늘 시편 25편을 읽었는데 거기서 들리는 음성도 바로 그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6-7).
시편 기자가 지금 자기 자신을 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마주합니다. 거기서 자기 죄를 보았고, 자기 허물을 보았고, 자기 한계를 정직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는 자리가 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임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위로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다. 나는 신앙이 부족하다. 나는 너무 늦었다. 나는 끝났다.” 그 음성에 오늘 본문이 답합니다. 광야에서 진 밖에 머물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임했다고.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그 평범하기 짝이 없던 갈릴리 촌놈들에게 영이 임했다고, 외국에서 온 이방인도 성령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 그 한 자격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갈증이 곧 여러분의 자격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빈손이면 충분합니다. 빈 마음이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티켓이 됩니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마칩시다. 주님이 생수의 강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안에 시작될 생수의 강이 처음에는 가늘디가는 한 줄기 시냇물처럼 보일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강이라고 부르기 민망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화내지 않고 한 번 더 참고, 외로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그런 작은 일들이 생수의 작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약속합니다. 그 작은 물이 결국 거대하고 제어할 수 없는 강들이 될 것이고, 사방으로 흘러 나가 메마른 땅과 사람을 살리는 생수가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2,000년 전 그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 광장에 서서 외치셨던 그 당돌하던 예수님의 모습, 또랑또랑하던 분의 음성이 바로 오늘 우리 예배 자리 한복판에 다시 울립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바라기는, 이 음성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생수, 메마른 이 세계를 살리는 생수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