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범어사 다비장에 이운된 양익 스님의 법구는 하얀 연기자락으로 금정산을 휘감았고 합장한 대중들의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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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새벽 가부좌를 한 채 고용한 모습으로 원적에 든 양익 스님은 ‘범어사 일주문을 가뿐히 뛰어넘었다’는 전설같은 일화들을 뒤로 한 채 검소하고 수행에 철저했던 스승으로 기억되며 대중들 곁을 떠나갔다.
양익 스님의 다비행렬에는 유달리 만장이 많았다. 그만큼 양익 스님을 추모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일까.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영결식에도 대웅전 앞 마당 가득히 합장한채 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불자들이 가득했다.
명종 5타로 시작된 영결식은 영결법요, 헌다, 헌향, 행장소개, 추도입정, 영결사, 법어, 추도사, 조사, 조가, 분향 및 헌화, 문도대표 인사순서로 엄숙하게 봉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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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은 영결사에서 “선과 무도 그리고 선가의 운력을 수행의 일환으로 삼으셨던 스님께서는 열반 직전까지도 불사에 열과 성을 다해 우리 후학들의 귀감이 되셨다”며 추모했다.
이어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은 법어를 통해 “오늘 양익 스님이 가셨다고 우리가 모여있지만 이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나에게 반드시 닥쳐올 일임을 알아야 한다”며 “우리의 생각이 오락가락 할 뿐 우리의 마음에는 오고감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다”고 법문했다.
범어사 주지 스님의 추도사에 이어진 범어사 신도회장이자 양익 스님의 유발상좌인 박정현 회장은 열여덟살부터 이어진 스님과의 인연을 회고하며 끝내 눈물을 보였고 조사를 이어가지 못하고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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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에 이어 범어사 일주문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양익 스님의 법구는 만장의 긴행렬을 앞세우고 범어사 다비장으로 향했다. 법구가 이운되는 동안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좌탈입망한 양익 스님의 법구가 가부좌한 모습 그대로 모셔졌기 때문에 범어사 다비장은 평소보다 높게 준비됐다.
양익 스님의 법구가 다비장에 모셔지고 숯과 짚을 차례로 쌓은 뒤 상좌대표 정경 스님을 비롯한 상좌들이 거화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다비장을 둘러싼 대중들의 정근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익 스님의 법구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비가 진행되는 동안 “부디 이 땅에 원력 보살로 다시 오셔 달라”는 대중들의 간곡한 바람들이 연기처럼 금정산 곳곳에 스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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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익 스님의 49재는 5월 12일 범어사 청련암 초재를 시작으로 2재(5월 19일) 성암사, 3재(5월 26일) 범어사 청련암, 4재(6월 2일) 대원사(영도), 5재(6월 9일) 범어사 청련암, 6재(6월 16일) 불승사, 7재(6월 23일) 범어사에서 봉행될 예정이다. (051)508-5164
양익 스님은 평생을 전통불교무도와 관법 수행의 체계 정립에 바쳤다. 스님이 집대성한 불교무도 ''불교금강영관''은 고려시대까지 전수돼다 중국 선종이 들어오면서 맥이 끊긴 즉신성불, 즉 현재의 몸이 그대로 부처가 됨의 밀교 수행법을 체계화한 것이다.
스님은 출가전부터 무술을 익혀 홍천과 서울 등지에서 사범을 지냈으며 출가 후 수행의 일환으로 무도를 연마하며 불교금강영관의 체계를 정립했다.
1971년 불교금강영관 관주로서 범어사 서지전에 대금강승문을 열어 불교금강영관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범어사 청련암 주지를 맡아 불교금강영관 연수원을 개관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정경 스님을 비롯한 고봉, 의정, 정산, 대일, 안도, 광운 스님 등 28명의 은법 상좌를 두었으며 인걸, 지연, 원욱, 적운, 원명, 각현 스님 등 19명은 연수원에서 무도를 지도하며 법상좌의 인연을 맺었다. 이 밖에도 강득화, 강명희 등 수 백 명에 달하는 재가자들도 제자로 길러내며 불교수행법으로서의 불교금강영관의 대중화에 불씨를 지폈다. 국내외로 90여 곳에서 스님에게 무도를 배웠던 제자들이 무술을 통해 불법을 펴고 있다.
‘금강영문신심일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제자들에게 일렀던 양익 스님은 몸의 극한에서 정신적인 초월을 이끌어내는 수행법으로 불교금강영관을 수행법으로 정립시켰다. 그래서 양익 스님은 검술, 창술을 배제하고 최고의 수행법으로서 금강영관의 틀을 잡은 것이다.
양익 스님을 은사로 12년간 대금강승문을 수련한 안도 스님은 “지난해 범어사 개산대재에서 금강승불무도를 선보였다는 이유로 몽둥이를 맞았다”며 “수행자답게 겸손하지 못하고 섣부른 잡기를 대중앞에 선보인다는 게 몽둥이의 이유였는데 그때 매를 든 스승의 힘이 젊은 시절보다 너무나 약해진 것을 발견하고 무상함과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자비심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양익 스님은 원적 직전까지도 홍천의 불사와 단양 동산 스님 생가복원불사에 매진했으며 원적 하루전 상좌 약연 스님을 불러 불사를 맡기겠다고 전하고 오후에 통도사 적멸보궁을 참배한 후 다음날 새벽 가부좌한 채 고요히 원적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