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8,1-10ㄱ.13ㄴ.30-3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3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5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6 곧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 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8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0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13 아들이 살 것 같으냐? 그는 살지 못한다.
이 모든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31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32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 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