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 천주교 성지다·2]인천지역 주요 인물들
한국인 최초 영세자 이승훈 순교
가문 후손들과 신자들도 뒤이어
박순집·전학준 지역서 헌신
미국인 최분도 섬 지역 봉사
인천은 오랫동안 서울의 관문이자 무역의 거점이었다. 이런 지리적·산업적 특성 때문에 1810년대부터 인천 곳곳에는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인천의 천주교도들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조선 정부의 탄압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성전 건축이 가능해졌고, 1889년 7월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답동성당이 설립됐다. 답동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을 갖추게 된 것은 1897년 7월이다.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한국 천주교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승훈은 1783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해 천주교를 전도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이승훈의 묘역은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아들 신규(身逵)와 택규(宅逵)의 묘도 있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1868년, 증손 연구(蓮龜)와 균구(筠龜)는 1871년 제물포에서 순교했다. 인천이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관계자는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이승훈 가문의 근거가 인천이라는 점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강화도 태생의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신유박해의 전말과 대응책을 비단에 적어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는 밀서가 발각되면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참수당했다. 일명 '황사영 백서'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형 사건이다.
이들 외에도 '가톨릭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朴順集·1830~1911), '푸른 눈의 프랑스 신부' 전학준(全學俊·1873~1947)이 인천교구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전학준 신부는 박문학교를 설립하고 해성보육원과 해성병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수녀들이 1894년부터 운영한 해성보육원(당시 제물포고아원)은 한국 근대 아동복지사업의 '효시'로 꼽힌다.
미국인 최분도(1932~2001) 신부는 인천에서 30년, 이 중 덕적도 등 인천 섬에서 14년을 있었다. 낡은 미군함정을 병원선으로 개조해 의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김 양식 방법을 보급하기도 했다.
천주교 박해 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인천 신자들도 많다.
인천 출신의 심조이 바르바라(1813~1839)는 기해박해 때 자신의 집으로 피신한 교우들을 돌보다 체포돼 옥중에서 순교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이 안나(1841~1867)는 병인박해 이듬해에 가족과 함께 체포돼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27살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거행한다. 인천 출신 중에는 심조이 바르바라와 이 안나가 순교자 123위에 포함됐다.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