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도서관에서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책이 있길래...빌려서 보다가 일부만 발췌해서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요약, 정리하다보니 내용 전달이 조금 어려워진 감이 있기도 하고 내용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까지 밖에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그냥 재미 삼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룹 중 한국 재계의 Big 4 였던 삼성, 현대, LG, 대우만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1. 삼성의 탄생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이 처음 사업에 손을 댄 것은 동업자 2명과 함께 1936년 경남 마산에 협동 정미소를 경영하면서부터이다.
정미소를 통해 자금을 축적한 이병철은 김해 등지에 부동산 투기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은행 대출 문제로 부동산 투기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 이후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만주, 북경등지에 청과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한편 국수를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삼성상회의 흑자 경영을 통해 1943년에는 대구 지방 최대의 양조장이었던 조선양조장을 인수하여 1년 만에 생산능력을 연 7천 석에서 1만석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두 사업체의 성공으로 이병철은 서울에 입성하여 1948년 종로 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그 후 삼성물산은 1950년 결산에서 1억 2천만원이라는 엄청난 순이익을 내며 당시 상공부 등록 무역업체 543개사 중 랭킹 7위로 급상승하였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이병철은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해 국내의 고철을 수집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고 대신 홍콩으로부터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에 판매한 결과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10억 원의 순이익을 남기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2. 제일제당의 설립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 전쟁 직후의 만성적인 물자부족을 눈여겨 본 후 제당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
당시 설탕은 수요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지만 국내 생산 시설이 전무하였고 설탕의 재료인 원당은 미국의 원조물자로 대량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설비만 갖추어지면 누워서 떡 먹는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공장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협조로 마련하고 나며지 2천만 환은 상공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부산 전포동 고무공장 부지 1천 평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제당 설비 일체는 일본에 발주하여 1953년 6월 자본금 2천만 환으로 제일제당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연건평 615평의 제당공장은 하루 25톤의 설탕 생산이 가능하였다.
당시 외제 설탕의 가격은 근당 300환인 반면 제일제당의 설탕은 100환에 불가하였기 때문에 싼 값을 무기로 시장 진입에 성공하여 생산 6개월만에 설탕 공급 시설을 확대할 만큼 성공하였다.
제일 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하였고 설립된지 불과 2년 만에 처음 자본금 2천만 환에서 20억 환으로 증가하여 삼성의 주력 기업으로 급부상하였다.
이후 제당업계의 경쟁이 심해지자 업종 다변화를 시도하여 1956년에는 통조림 사업과 1957년 10월 제분 공장을 건설하여 제분업에 진출하였다.
3. 제일모직의 설립
이병철은 1954년 9월 자본금 1억 환의 제일모직 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모직업에 진출하였다.
공장은 대구에 약 7만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건설에 착수하여 1956년 완공을 하였다. 공장 설비는 독일의 스펀바우(Spinbau)사로부터 도입하여 1956년 5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초기 생산 품질이 열악하여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여 적자가 누적되어 갔다.
제일모직은 경영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기간산업임을 내세워 정부로부터 5억환이라는 거금을 융자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황에서 특정 기업에 그만한 돈을 융자해 주는 것은 누가봐도 특혜임에 틀림없었다.
정부는 자금 융자 뿐만 아니라 1958년에는 소모사를 제외한 모직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취해주므로써 제일제당은 외국 제품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게 되어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되었다.
그 결과 적자는 곧 흑자로 전환되어 1960년에는 자본금이 30억 환으로 증가되는 등 급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3.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 완성
1957년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은행주의 민간불허를 허용하게 되었다.(이것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생략함)
삼성은 조홍은행 주식 55%를 매입하는 한편, 흥업은행 주식 83%를 매입하는 등 졸지에 이병철은 전국 4대 은행 주식의 절반을 소유하는 국내 최대의 은행소유주가 되었다.
삼성이 이처럼 은행을 소유할려고 한 이유는 당시 시중의 사채금리가 연평균 50~60%의 초고금리였기 때문에 저리의 은행자금을 사업 확정에 손 쉽게 가져다 쓸 수 있었고 또한 국내 사업체의 부실화 정도등 기업정보를 입수하기 쉬워 가능성 있는 부실기업 매입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후 삼성은 한국타이어, 삼보 시멘트, 천일증권, 동일방직, 호남비료공업, 안국화재보험 등을 주식 매입을 통해 인수하거나 대주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57년 효성물산, 1958년에는 근영물산을 각각 설립하였는데 이 두 회사는 정부로부터 보다 많은 달러를 제공받기 위한 일종의 가공회사였다.
4. 1970년대의 삼성의 위기와 사업 다각화
잘나가던 삼성은 5.16군사 쿠테타로 등장한 혁명정부의 부정축재자 조사로 인해 한 때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병철 회장에게 부과된 부정축재액은 80억 환이었지만 정부는 비료공장을 지어 국가에 헌납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삼성은 한국비료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산에 연간 33만톤 규모의 요소비료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울산공업단지내에 36만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한 후 건설 중에 있었다. 그러나 건설 1년 만에 '한비 밀수사건'이 터짐으로써 창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맡게 되었다.
결국 공장은 완공을 20% 정도 남겨 둔 시점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 회장은 국고 환수를 선언하였고 결국 1967년 10월 한국 비료는 공식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었다.
이후 주력업종의 교체를 통해 사업의 다각화를 시도하였다.
삼성그룹은 1960년대에 기존 계열사 중 한국타이어, 삼척시멘트, 천일증권, 동일방직, 호남비료, 효성물산, 근영물산, 한국기계, 풍국주정, 조선양조, 동양대리석, 한일은행, 조흥은행 등 13개 업체를 퇴출시켰다.
그 대신 삼령산업, 미풍판매, 동양방송, 중앙일보, 중앙개발, 동방생명, 삼성문화재단, 고려병원(현 삼성병원),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삼성전자, 삼성산요전기 등 11개 업체를 신규 설립 혹은 인수하였다.
이미 성장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비료나 시멘트의 사업체를 퇴출시키는 한편 새롭게 시장이 확대되기 시작한 언론, 방송, 의료, 제지, 전자, 유통, 금융업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성장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물갈이의 배경이었다.
1975년 정부는 분산되어 있는 수출업체를 몇 개의 대형 수출업체를 만들어 전담시켜 수출역량을 극대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소위 종합무역상사제를 실시하였다.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면 국제입찰시 우선적으로 밀어 주며, 원자재 수입에 대해 우선권 부여, 수출신용장을 통한 은행의 금융지원 등을 받을 수 있는 수많은 특혜를 받을 수 있엇다.
삼성은 1975년 5월 19일 삼성물산이 최초로 종합무역상사 제 1호 기업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수출물량을 종합무역상사로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정부의 눈에 들었고 또한 수출기업들은 인수, 합병하는 방법으로 수출 물량 확보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삼성은 1972년 16개였던 계열사가 1979년에는 33개사로 늘어나게 되었다.
5. 1980년대의 사업 다각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정부의 각종 규제 정책으로 인해 계열사 확대 활동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삼성은 계열사의 확대보다는 기존 계열사의 규모확장에 촛점을 맞추어 사세를 확정하였다.
70년대부터 진출하기 시작한 전자, 조선, 반도체 등 중화학 공업과 첨단산업은 장기간에 걸친 투자와 연구개발이 요구되는 사업들이었다. 따라서 삼성은 이들 사업체의 내실을 다지는 기간으로 외형적은 계열사의 확장은 없었지만 각 개별 사업체의 매출액, 자본 등이 급증할 수 있었다.
특히 80년대 삼성그룹의 다각화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점은 주요 계열사별로 부설연구소가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 4월 17일 삼성전자 부설 전자종합연구소의 설립을 시작으로 80년대 내내 각 계열사별로 연구소 설립 붐이 조성되었고 82년부터 86년까지 총 4,600 여 억 원을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외 현지법인 및 현지 공장이 증가하였다. 국내의 재벌 규제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삼성은 '탈한국화, 국제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던 것이다.
6. 그룹의 계열 분리화 작업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이 사망하자 대권은 3남인 이건희가 물러받았다.
삼성의 계열분리 작업은 2남인 창희의 생존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물려받은 지분으로 새한미디어를 설립하였다. 1995년 삼성그룹의 계열 분리 과정에서 새한미디어는 제일합철을 확보함으로써 새한그룹의 태동을 예고하였다.
이후 계열 분리는 199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병철의) 장녀인 이인희는 전주제지를 분리하여 한솔제지로 기명하였고 이후 한국마벨을 인수하는 등 M&A를 통해 기업진단을 형성 재계 랭킹 30위로 단숨에 뛰어 올랐다.
3녀 이명희는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을 분리하여 신세계 그룹을 형성하였고 장남 이맹희의 아들 재현은 제일제당을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경영하였다.
출처 -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著) : 보다 자세한 사항이 궁금하시면 이 책을 보시길...
첫댓글 이병철회장이 6.25때 입었던 타격이 어느정도였나요? 인민군들에게 몰수당했단 말은 들었지만서두요.
이한구...이사람도 경제분야 전문가인데..하는걸 보면 좀;;
답글이 좀 늦었습니다. 이병철회장이 서울지역으로 옮겨간 사업체는 모두 쫄딱 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래 사업의 출발지였던 대구에 있던 회사 때문이었습니다. 이회장이 사업의 중심을 서울로 이전하면서 기존 대구의 사업체는 당시 같이 사업을 하던
전무인가...상무인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올라갔었는데(요즘으로 치면 전문경영인이죠) 이회장은 별신경 안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람이 대구의 사업체를 잘 가꿔서 이회장이 피난을 내려오자 그동안 모아둔 수익금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