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꽃』
인간에 미치는 언어의 역할
" 이름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별명도, 애칭도,
심지어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사람.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일체의 기호가 붙여지지 않은 사람.
우리는 무엇으로 그 '아름 모를 소녀'를 떠올릴 수 있는가.
'이름'이 없다면, 하다못해 그에게 숫자 하나라도 붙어있지 않다면,
그는 정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언거가 먼저냐, 사물이 먼저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우리 인류가 언어를 사용한 것은,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기껏해야 만 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는 수억 년 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실재하는 나무가 언어인 나무보다 먼저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김춘수의 「꽃」은 우리에게 언어인 '나무'가 없으면
우리는 실재하는 '나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언어가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언어가 사물의 존재와 존재 인식에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언어로 질서화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는 수억 년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무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다면, 나무라는 언어로 인간에게 인지되고,
인정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무라는 사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의 꽃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 역시 '나무'라는 언어로 명명되지 않는 한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무가 '나무'라는 언어에 의해 비로서 나무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꽃>역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곧 언어에 의해 비로소'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이라는 분명한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김춘수의 「꽃」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음을,
곧 인식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역할 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사물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집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모든 사물도 언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X선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인간에 의해 발견되어 X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후에야
비로소 X선이라는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김춘수의 「꽃」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식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철학적 성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꽃'이라는 언어가 없다면 철마다 피어나는
저 '아름다운 하나의 몸짓'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
너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의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참고 자료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언어가 존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언어와 익명성의 극복
어린왕자를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던 97 모대학 논술고사는
고전논술의 원조격인 문제라도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어린왕자를 제시문으로 글이 암시하고 있는
참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는데,
우선 작품의 일부를 살펴보자.
"안녕" 여우가 말했다.
"안녕" 어린 왕자가 공손히 대답하고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여기 있어, 사과나무 아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니? 참 이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여우야."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단다."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길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 미안해." 조금 생가하다가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넌 여기사는 아이가 아니구나. 무얼 찾고 있니?"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사람들은 총으로 사냥을 해. 대단히 귀찮은 노릇이지. 하지만 사람들을 닭을 기르기도해.
사람이란 그저 한 가지 밖에 쓸모가 없다니까. 너두 닭이 필요하니?"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도대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냐구?"
"모두를 잊고 있는 건데, 관계를 맞는다는 뜻이란다." 여우가 대답했다.
"관계를 맺는구나?"
"응, 지금 너는 다른 애들 수만 명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내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 없고. 너는 내가 아쉽지도 않은 거야. 네가 보기엔 나도 다른
수만 마리의 여우와 똑같잖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워질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준재가 될 것이고.
네게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거야."
-생떽쥐베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왕자는 김춘수의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꽃이라 부른 장면을
어린왕자가 특정한 여우 한 마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바꾸어 보여 주었을뿐이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는 이름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1 대1 개인 관계의 시작이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첫 단계며, 애정을 확인하는 한 절차인 것이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관계도 의미가 없다.
현대인들은 비정한 익명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꽃의 전문을 보자.
1,2연은 이름을 불러 주는일을 통해
하나의 몸짓에 불러주는 대상이 꽃으로 익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꽃의 3,4연은 그러한 언어를 통한 대상의 인식이 익명성을 극복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 조건이라는 사실로 시적 인실을 확장시키고 있다.
어린왕자가 보여주고 있는 길들임을 통한 진정한 인간관계의 수립은 꽃이 말하고 있는
이름을 불러주는 일을 통해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이름을 모른다면 그는 나에게 있어서 이름모를소녀,
즉 익명의 대상일 뿐이다. 그의 빛깔도 향기도 장점도 아픔도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대상은 나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나는 그를 다른 남과 구별하여 생각하게 되고,
그 대상의 개성과 가치, 그리고 존재의 의미와 존엄성을 인정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첫댓글 화단에 올릴 글을 찾다가 읽게 된 것입니다.... 학창 시절 국어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딴지?걸었다가 무지 서운해 하시던 모습, 선생님의 살짝 고수머리까지 생각이 납니다..지금 생각하니 서로 좋은 감정이었던 것 같은데 왜 자꾸 서운하게 했는지,..ㅎㅎㅎ
우리네 어릴적 감정표현이라는것이 딴지걸기로 다가가기..아니였나요? 수줍음이였을까요?..김춘수님의 꽃...누군가 내 이름을 아름다히 여기게 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좋아하는 詩인데 오랜만에 반가워서...어린왕자랑. 내 어린 왕자 지금 혹한기 교육중 ..에고 맘 아려라..넘 추워서..ㅎㅎ
하지만...서재랑..방방이 따뜻함으로 가득차서 뭐...다 하는건데..하며 넘어갑니다.^^*^^*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련지????
실재하지만 인지되지 못하다가 이름을 통해 비로소 존재되는 것이군요,,,김춘수님의 꽃에서 꽃이라 부르는 그 행위와 어린왕자에서 여우를 길들이는 것은 똑같이 관계를 맺는 의미의 부여가 되는 것이고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되어 기억될수 있게 되겠군요,,,,,,뎀언니,,너무 재미있네요,,국어를 이런식의
접근방식으로 공부했으면 많이 재미난 과목이되었을텐데,,,,,^^*
문득,, 다만 하나의 몸짓인 것을 온갖 의미를 부여한 그 누군가가 위안을 받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나 하는... 언어 이전의 세계,, 궁금하긴 한데...
참 이상하지요?..이런 것에 대해 배울 때에는 왜 그렇게 지루했었는지?...그건 아마 나무님과 같은 경우?...*^^..송화님,.이 글이 그리 씁쓸하지만은 않는거지요?..ㅎㅎ 수멜님,..어찌 또 이런 무거운 화두를,..언어이전이라고요?...저는 딱 덮어 눌러 둘까 합니다..ㅎㅎㅎ
아고아고,, 말 잘 못하는 사람의 구실입니다. 온갖 난무하는 말들에 주눅이 들어서...
..*^^*..수멜님께서 언젠가는 눌러 둔 것?을 들어 올려 줄 것이라 바랜다면...부담스러울까요?...ㅎㅎㅎ ..틀림없이 수멜님안에 내재되어 있을 것 같은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