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예수 트레일
요즘 트레킹 코스를 설명할 때 ‘트레일’(Trail)이란 말을 주로 사용한다. <세계 10대 트레일>이 대표적이다. 저마다 선망하는 곳은 다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차마고도, 제주도 올레길도 해당될 것이다. 트레일은 길을 뜻하지만 잘 포장된 자동차도로는 아니다. 시골 먼지길이나 인적이 드믄 산속 임도(林道) 쯤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런 마음으로 걷는 여정이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중국 장안(長安)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걸으며 <나는 걷는다> 3권을 기록한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자취를 남겼다. 그의 걸음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트레일이 되었다. 새천년을 앞두고 도전한 일이었다. 2022년 여름 제주도를 출발해 313일째 되는 날 마침내 바티칸에 도착한 마라토너 강명구의 도전도 마찬가지다. 그는 베트남, 인도, 튀르키예, 그리스, 슬로베니아 등 16개 나라를 가로지르며 무려 1만 킬로를 달렸다.
일찍이 걷기를 설파한 트레일러들은 생각보다 많다. 문명의 이기는 점점 편리한 이동 수단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걸음보다 더 빠른 삶의 진보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온갖 정보를 빨아들이는 손바닥 안의 휴대폰이 얕은 재미와 편의를 주었는지 몰라도, 과연 기쁨이나 평온을 선물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비좁은 차 안과 사이버 공간에서 자유일 뿐, 심장을 뛰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걷는 일은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고 했다. 그는 홀로, 맨몸으로, 보행하는 소박한 존재를 이상형으로 삼았지만, 세상은 ‘자연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점점 타락하는 중이었다. 꼭 시골길이 아니어도 좋다. 키르케고르가 산책한 코펜하겐 도심은 인간의 온기를 쬐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로 걷는 일은 그만의 소통 의지였다. 철학자들의 걷기는 행위가 아닌 생활이었다.
길은 어디든 존재한다. 그 길을 걸으면 누구나 사색가가 된다. 건강을 관리하고, 여가를 활용하는 효능을 넘어서 걷기는 그 자체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는 사람이 바늘이고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이다”(<걷기의 인문학>)라고 말한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자신의 순례 경험을 통해 쇠이유(seuil)운동을 이어갔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이 감옥 대신 걷기 프로그램을 선택한다면, 한 달쯤 걷는 그 길에서 인생의 길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갱생(更生)의 길이다.
지난 주간에 동해안을 남북으로 잇는 해파랑길을 걸었다. 그 길의 맨 북쪽에 위치한 고성 일대를 평화의 길이라고 불렀다. 파주 임진각부터 동행한 4대 종단 DMZ 평화순례(2.29-3.21)의 종점은 통일전망대였다. 그 행렬의 끝에서 마지막 3일을 동행하였다. 간밤에 내린 봄눈은 남과 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을 온통 설악(雪嶽)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행 중에 강명구 마라토너가 있었다. 뇌출혈을 극복하고 종종걸음으로 유라시아를 횡단한 그와 함께 걸으며 ‘걷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새겼다.
인간의 삶을 ‘길’(道)로 비유한 지혜는 모든 종교에 널리 퍼져 있다. 천로역정(天路歷程)과 팔정도(八正道)는 길 위에서 진리를 구한다. 수도(修道)와 수행(修行) 모두 길을 내면화 시킨 상징적 어법이다. 보나벤투라는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여정(旅程)>을 남겼다. 자신의 믿음을 길로 비유하는 공통분모 때문에 길 위에서, 함께 길을 걷는다면 다행한 일이다. 모두가 추구하는 평화의 길이 그렇다. 평화를 찾는 해법은 달라도 적어도 방법은 맨몸으로 걷듯 평화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길의 신앙이다. 믿음의 길,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행보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여행에서 ‘예수 트레일’은 나사렛에서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불과 65km의 여정이지만, 공생애로 나가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오가는 엠마오 왕복길이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호산나의 길 또는 예루살렘 구 시가지에 있는 ‘비아돌로로사’(고통의 길)는 두루 복음의 길에 속한다. 베들레헴에서 가자와 시나이반도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예수가족 피난 길은 시급히 회복해야 할 평화의 길이다.
어느새 종려주일이다. 제자의 길은 얼마나 위대한 드라마인가? 갈릴리의 화사한 살구꽃 아래든, 골고다로 향하는 먼지 길이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길이다. 울음으로 아픔을 넘고 희망으로 불가능을 건너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뜻을 만나는 행복한 길이다. 고맙게도 최북단 명파해변으로 이어지는 산길에서 노랗게 멍울 맺은 산수유를 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