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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Franz Ferdinand 대공과 조피 폰 호테크 호엔베르크 공비 황태자 부처
암살사건의 일화에 관한 자료를 찾게 되어 올립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맏아들이다. 황제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던 루돌프 대공이 1889년 죽음에 따라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버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계승자로 추정되었다. 아버지는 1896년 죽었으나 1890년대에 그의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동생 오토가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는 궁정의 시녀인 조피 폰 코테크 여백작과 결혼하기로 결정해 황제 및 궁정 관리들과 심하게 대립했다. 이 결혼은 1900년 그가 낳을 아이들의 제위 계승권을 포기한 뒤에야 허용되었다.
외교면에서 그는 독일과의 동맹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의 상호이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군주의 위치를 강화하고 헝가리 내 다른 민족들에 대해 마자르족의 위치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개혁을 구상했다. 그의 계획은 전체 국민 중 한 분파가 추구하는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 정책도 다민족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의 관계는 그가 황제에게 계속 압력을 가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황제는 말년에 제반 문제를 저절로 풀리도록 방치해두었으나 자신의 특권에 대해 간섭하는 것에는 매우 분개했다. 1906년부터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군에 대한 영향력이 계속 커졌고 1913년에는 군 감찰총감이 되었다. 1914년 6월, 그와 아내는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리엘 프란치프에게 암살당했다. 1개월 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17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14년 프랑스의 자동차 공장인 파애튼에 빨간색의 오픈카를 주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공장에서 가져온 자동차의 색깔이 자신이 주문한 앵두색 빨강이 아닌 피색깔과 비슷한 어두침침한 빨강임을 보고 문제의 자동차를 어떻게 할까 난감해 하였습니다.
황실에서 쓰는 자동차의 색깔로는 좋지 않다며 공장으로 다시 돌려보내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묵살한 황태자는 대신 자동차를 타고 세르비아를 방문하겠다고 말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세르비아는 유럽의 여러 왕국들이 탐내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인 작은 나라였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자신의 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된 세르비아인들은 암살단을 조직하여 그가 차를 타고 지나갈 자리에 매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고슬리비아의 보스니아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황태자부처의 결혼기념일인 1914년 6월 28일, 황태자부처가 보스니아 지방의 사라예보를 방문할때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출신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리엘 프란치프가 황태자부부를 라틴교 인근에서 저격해 부부는 그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가브리엘 프란치프는 세르비아 장교급 비밀조직인 '블랙헨드'의 요원이였습니다. 그는 총격 직후 다리 밑으로 투신했으나 결국 현장에서 채포돼 징역 18년을 선고받았으나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종전되기전에 결국은 감옥중에서 결국 패결핵에 걸려 징역4년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결국 입원 며칠만에 숨을거두었다. 당시 블랙핸드 즉 검은손은 세르비아 독립운동단체입니다.
세르비아에 도착한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빨간색 오픈카에 부인과 함께 타고 사라예보의 거리를 지나다 암살단이 던진 수류탄이 자동차에 맞고 뒤로 튕겨나가 차 뒤에 쫓아오던 기병대가 폭사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사태의 긴박함을 알고 거리에서 빠르게 운전을 한 운전수는 V자형으로 꺾인 도로에서 속도를 낮추다 갑자기 총을 든 암살범들이 길가의 한 집에서 뛰어나와 뒷좌석에 있던 황태자 부부에게 총을 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순간 황태자비 소피아가 총을 맞고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본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도 가슴에 총을 맞고 운명을 하였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다고 하며 최후의 통첩을 세르비아에 보냈다. 세르비아는 요구 조건의 대부분을 받아들였으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의 대표를 참가시킨다는 것만은 내정 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이를 최후통첩을 거절한 것으로 보고 그해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두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원조할 뜻을 굳히고 군사 동원령을 내렸으며, 독일도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하여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니 프랑스와 영국도 러시아를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
결국 이사건이 원인이 되어 결국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된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시신을 오스트리아로 옮긴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가 타던 자동차를 사라예보에 두고 갔습니다. 그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자동차는 사라예보의 주지사 수중에 들어갔고, 자신도 황태자의 기분을 내본다며 문제의 오픈카를 타고 같은 길거리를 지나던 그는 갑자기 도로에 튀어나온 어린 아이를 피하려 핸들을 꺾다 벽에 부딫혀 한쪽 팔을 절단하였습니다.
그때서부터 운전사를 고용한 주지사는 어느날 작은 시골동네를 지나다 자동차가 전복되어 운전수와 함께 목이 부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주지사 다음으로 문제의 자동차를 갖게 된 인물은 주지사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의사였습니다. 이 세상에 저주는 없다며 장담을 하고 다닌 그는 몇주 뒤 머리가 자동차 바퀴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되었고, 문제의 자동차는 의사의 친척인 사업가 에게 양도되었습니다.
어느날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자동차의 시동이 꺼지는 모습을 본 사업가는 마침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던 마차를 탄 농부에게 자동차를 좀 끌어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무척 싫은지 뒷걸음질치던 말을 채찍으로 마구때린 사업가는 말의 마차를 풀고 자동차를 묶어 오르막길을 오르다 갑자기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며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 앞에 있던 말과 마부를 순간적으로 치어 죽이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그후 갑자기 멈춘 자동차의 앞 유리를 뚫고나와 목이 부러져 신음하고 있던 사업가는 황급히 현장에 달려온 주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뒤 사망하였고, 그후 문제의 자동차는 파란색으로 새로 칠해진뒤 경매에 붙여져 세르비아의 한 시민에게 팔리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탔던 자동차라고 자랑하며 5명의 친구들을 차에 태운 문제의 시민은 얼마후 돌 벽에 전속력으로 돌진한뒤 부딪혀 5명의 친구들과 함께 차안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후 6명의 새 주인에게 계속하여 양도된 문제의 자동차는 6명의 새 주인들을 죽인뒤 비엔나에 있는 박물관으로 팔렸고, 1944년 자동차를 비엔나로 가져온 박물관장은 차를 박물관에 전시한 다음날 아침 직장에 온뒤 '꿈에 내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이상한 악몽을 꾸었다'라고 말하고 그날 오후 문제의 차를 열심히 닦다가 연합군이 투하한 폭탄이 박물관의 천장유리를 뚫고 들어와 문제의 자동차에 맞은 뒤 폭발하자 산산 조각난 자동차 앞에서 폭탄파편에 의해 목이 잘려 사망하였습니다.
문제의 자동차는 1914년에 암살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저주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또한 그 자동차의 악랄한 저주에 의해 암살 되었던 것 일까요?
Life's Storybook Cover - Isla Grant
첫댓글 오메나~~. 이렇게 많은자료를~
훌륭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