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자는 여해요, 본관은 덕수다. 그 선조 중에 이변*이란 이가 있는데, 벼슬이 판부사(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의 증조는 이거*인데 성종을 섬겼다. 연산군이 동궁으로 있을 때 이거는 강관이 되었는데 엄격해서 꺼림을 당했으며, 일찍이 장령이 되었을 때 누구라도 탄핵하여 권력자를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해서 범 장령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 이변 :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의 문신. 세종 원년(1419)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이거 : 조선시대의 문신. 성종11년(1480)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설경이 되고, 이어 정언 · 이조정랑 · 장령을 역임했다. 연산군 원년 (1495)에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연산군3년(1497) 순천 부사에 임명되고 이어 호군이 되었다. 그는 언관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그 당시에 호장령이란 칭호가 있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가문의 음덕으로 벼슬했고, 그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순신은 어렸을 때 재질이 영특하고 활달해서 어떤 사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마을의 길거리에서 놀면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여 장로(長老)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집 문 앞을 지나가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장성해서는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로 출세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유학(儒學)을 업으로 했는데, 순 신 때에 와서 처음으로 무과에 합격해 권지훈련원 봉사로 보직되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녀(庶女)가 있어 순신에게 첩으로 주려고 했는데 순신이 응낙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순신은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승진하기를 도모하겠는가?” 라고 했다.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와 친근한 사람이 훈련원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천거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나, 순신은 원중 군무관으로서 옳지 않다고 버텼다. 그래서 서익은 이순신을 패지(牌旨=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보내는 글)로 불러 뜰아래 세우고 힐문했으나, 순신은 말과 기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곧게 변명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서익은 더욱 크게 노하여 기승을 부렸으나 순신은 조용히 대답하면서 끝내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서익은 본래 객기가 세어 남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동료들도 그를 꺼려 될수록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날 하리들이 섬돌 아래 있다가 모두 서로 돌아보며, 놀라 혀를 내두르면서 “이분(이순신)이 감히 본조의 정랑에게 대항하니 앞길이 어찌 될지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서익이 계면쩍게 기세가 꺾이면서 순신을 돌려보냈는데,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일로 순신의 인품을 알게 되었다.
☞ 서익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년(1569)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16년(1583)에 군수가 되었으며, 이해 종부사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에 파견되었다. 선조18년(1585)에 의주 목사가 되었으나, 탄핵을 받은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면되었다.
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는데, 옥리가 그의 조카 이분*에게 “뇌물을 쓰면 나갈 수 있겠다” 라고 은밀하게 말했으나, 순신은 이 말을 듣고 이분에게 화를 내며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를 어기면서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하였으니 그가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 이분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숙부인 순신의 막하에서 문서를 관장했다. 선조36년(1603) 사마시에 합격한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시부가 되고, 광해군 원년(160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후에 행병조정랑으로 임명되었으며,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순신의 사람 된 품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에 수양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희신과 요신인데, 모두 순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순신은 그들의 자녀를 자기 자녀와 같이 돌보아주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데도 반드시 형의 자녀를 먼저 보내고 자기 자녀는 뒤에 보냈
재간은 있어도 명운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재간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군중에 있을 때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다. 견내량에서 적병과 서로 대치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여러 배들은 이미 닻을 내렸고, 밤에 달빛이 매우 밝았다.
통제사는 갑옷을 입은 채로 전고를 베고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으면서 측근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게 하여 한 잔을 마시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하고 “오늘밤에 달이 매우 밝은데, 적병은 간사한 꾀가 많으므로 달이 없을 때도 물론 우리를 습격해 오지만, 달이 밝을 때도 습격해 올 테니 경비를 엄중히 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호령 신호인 나팔을 불게 하여 여러 배들이 모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선에게 전령했다. 척후 임무를 맡은 군사가 한잠이 들었던 것을 깨워 일으켜서 적병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했는데, 한참 만에 척후가 달려와서 적병이 온다고 보고했다.
이때 달은 서쪽 산에 걸려 있고 산 그림자는 바다 속에 거꾸로 비치는데, 바다의 반쪽은 어슴푸레 그늘이 져 있었다. 적군의 배들은 어두침침한 그늘 속에서 수없이 다가와 장차 우리 배에 접근하려 했다. 이에 중군에서 대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들도 모두 이에 응했다. 적병은 우리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았는데, 소리가 바다 속을 진동하고 총탄이 빗발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적병이 감히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달아나버리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순신을 신(神)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