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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과 인과법(因果法)의 차이>
경전에서는 ‘법(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를 ‘법(法)’이라 한다.”
“부처님은 법을 깨달았다.”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산스크리트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 의무,
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우주원리, 보편적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법(法)을 깨달았다.
정법(正法)을 성취했다.”라는 말은 “부처님은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이 발견한 ‘법(法)’의 내용은 연기법(緣起法)이었고,
<삿짜까 짧은 경(Cūḷa-saccaka Sutta-M35)>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모든 원인으로부터 생긴 법들 (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고 (如來說是因).
그들의 소멸도 [말씀하셨나니] (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是大沙門說).
부처님이 정등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에 연기법을
설명한 이 게송에서 말하는 뜻은,
“모든 존재[제법(諸法)]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는 말이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부처님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 때문에 태어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상응부경전(잡아함) -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➀ 차유고피유 (此有故彼有)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➁ 차기고피기 (此起故彼起) -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➂ 차무고피무 (此無故彼無) -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➃ 차멸고피멸 (此滅故彼滅) -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
➀⋅➂”라고 하는 것은 동시적(同時的)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 ➁⋅➃”라고 하는 것은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공식에는 무(無)시간적, 논리적 관계는 물론,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까지 고려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불교 술어로 표현하면 연기의 구기성(俱起性-논리성)과 계기성(繼起性-시간성)이다.
즉, 연기의 발생 원리는 구기성과 계기성의 양면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연론 중심의 논리관계로의 해석은 구기성(논리적)에 착안한 것이고,
인과론적인 종적(從的)관계로의 해석은 계기성(시간적)에 착안한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➀“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➂“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는 구절로써
연기의 동시적(同時的) 의존관계, - 구기성(俱起性-논리성),
즉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설명하고, 무(無)시간적, 논리적 관계를 말한다.
➁“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와
➃“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 - 계기성(繼起性-시간성),
즉 존재의 인과론을 설명하고,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를 말한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한마디로 존재에 대한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며, ‘원인, 결과의 인과법칙’이라 할 수 있다.
즉, 위의 두 항목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 둘 것은 연기법의 핵심은
위의 첫 번째 항목에 있지 결코 두 번째 항목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 첫 번째 항목은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을 말하고 있는 반면,
두 번째 항목은 인과론(因果論)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론은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인과론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과론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벌써 있어왔고,
타 종교에서도 말해온 보편적 법칙이지만
상호의존성의 연기론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 발견하고
처음 말씀한 것이다. 물론 연기론에 인과론도 포함되지만
이것이 핵심논리는 아니다.
인과론(因果論)이란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표현되는 것이 그것인데, 주로 중생이 짓는 업을 중심으로
선업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악업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선업선과(善因善果) 악업악과(惡因惡果)의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생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원인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해서 업보설, 인과법,
인연과보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소박한 연기이론은
주로 시간적 선후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해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위해 이런 인과론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의 출발은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기론을 펼친 것이지 선악의 인과론을 위해
펼친 논리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보통의 인과론(因果論)이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는 시간적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비해, 상의성(相依性)’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통의 인과론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시간적 선후 관계에 주목해서 이를 비대칭적으로 다루는 데 비해,
연기론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의한
대칭적 관계까지 포함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잡아함의 <노경(蘆經)>에서의
‘갈대 묶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세 개의 갈대가 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또한 둘을 버려도 하나는 서지 못하듯이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게 된다.”고 했다.
3개의 갈대 묶음은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원인이 되고, 서로가 조건이 되는 관계이다.
「물 분자가 물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서로 의지해야만
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자연 세계에서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꾸려나가는 사회 안에서도 그렇다.
자연 세계이든 인간세계이든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존재는 그러한 상호연관성으로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
연기론의 상의성의 내용이다.」- 양형진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의 법칙’
또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이법(理法)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相對的)이고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존재하는데
이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또는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이라하고,
줄여서 상의성(相依性)이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결돼 생기고 사라지기 때문에 연기(緣起)라 한다.
연기(緣起)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독립자존의 고정된 실체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물고기의 아가미와 물, 또는 새의 날개와 공기의 경우처럼
물이 없으면 물고기의 아가미가 무의미하고,
공기가 없으면 새의 날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곳에서 물고기의 아가미가 홀로 존재 할 수 있다든가
또는 물을 지배한다거나 새의 날개가 공기와 무관한
홀로 고유의 존재라거나 공기를 지배한다고 하는
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자는 상인상대(相因相待)의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으로
원만한 관계이므로 단 한 곳의 빈틈도 허용 할 수 없는
완벽한 동등함에 이르러서야 성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편에 조금의 하자가 생기게 되면
반드시 이 편에도 그와 꼭 같은 하자가 생긴다는 것과 같다.
사람의 신체 또한 물고기의 아가미와 새의 날개처럼
여러 가지 자연환경의 생태적 조건을 비롯해서 태양계와 은하계와
그 너머 무한한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의 한량없는 다차원적
조건들과 상인상대의 상호의존적으로 완벽한 균형관계에 의해서
원만하게 성립돼있는 것이다.
이 처럼 생물 이외에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조건들이 상인상대의
상호의존적 연기에 의해서 원만하게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자연환경의 파괴는 바로 인간생활의 파괴로 직결되므로 자연환경보호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법은 부처님이나 다른 그 누군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부처님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했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부처님은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
경전에서 부처님 자신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잡아함경 - 연기법경(緣起法經)>에 이르는 말이다.
한 제자가 이 문제에 대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부처님이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법계)]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여래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해 가르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은 부처님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불교가 시작됐지만
부처님 자신도 법을 발견함으로써 부처가 된 것이고,
부처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따라 사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게 했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자귀의 법귀의(自歸依法歸依)」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부처님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부처님이 일생을 바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고(苦, duhkha)’에 관한 문제였다. 부처님이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 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고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의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苦)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苦)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苦)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고(苦) 문제를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부처님은 먼저 고(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하고 규명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涅槃)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서 고(苦)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 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무아(無我)⋅무상(無常)⋅4성제(四聖諦)⋅12연기(十二緣起)⋅
공(空) 등의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그리고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연기법이 고(苦)와 ‘고의 소멸’을 해결하기 위한
교리로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후대에 내려올수록, 특히 근래에 와서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 현상을 설명하는 존래론에도 이 연기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동식물의 진화론(進化論)에도 이 연기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따라서 서두에서도 말했다시피 연기법(緣起法)은
이제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는
교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따라서 연기법(緣起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緣起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 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이전에도 소박한 수준의 연기법은 있었다.
인과법(因果法)이 바로 그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형태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결과[果]에 따라 ―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했다.
이런 인과법에 관한 이론들이 이미 고대 인도에 있었다.
그래서 연기법을 때론 인연법(因緣法)
혹은 인과법칙(因果法則)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해 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이것을 '피연생과(彼緣生果)', 즉 인연(因緣)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원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씨앗이라는 직접적 원인은 인(因)이 되고,
흙, 물, 기후 등의 제반 조건인 간접적 원인은 연(緣)이 된다.
이 예는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전후 사건의
인과적 연관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원인이 결과를 앞지를 수 없다는 과학이나 철학 일반에서의
인과율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과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둘 것은,
연기법은 ‘인과법칙(因果法則)’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대체로 한국불교학계에서는 연기에 대해 사물의 발생과
운행을 규명하는 물리적 법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기를 법칙의 일종으로 간주하게 되면
태어남과 늙음⋅죽음으로 귀결되는 연기의 순환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한 방식의 연기는 폐쇄적⋅결정론적 체계로서
실천 수행을 통한 해탈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와 같은 연기 이해에 근거한 무아는
괴로움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며,
오히려 괴로움의 현상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 임승택
그리고 만약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부처님 이전에 이미 있어온 이론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는 말과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돼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원인이 돼서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은 서로가 원인이고 조건이므로
이것과 저것은 함께 있고,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연기법은 인과적(因果的)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과법이라기보다 상호의존성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과법(因果法)과 상호의존(相互依存)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란 고(苦)의 발생과 소멸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 반면,
인과법(因果法)은 사물의 생성 소멸과정을 설명하는 존재론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고서 인과법과 연기법(상호의존성)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과법을 곧 연기로 여긴다면,
연기가 곧 자연과학적 생성ㆍ변화의 논리로 오인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연기에 대해 자연적ㆍ물리적 법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연기적 과정이 물리적 법칙과 동일하다면
의지적인 노력의 개입 여부에 상관없이 생성ㆍ변화는 지속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기법이 자연법칙이라면 수행의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불교에서 연기론은 고(苦)의 발생과 소멸 구조를 설명하면서
수행 정진을 통해 그것을 극복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물리적 자연법칙이라면
苦의 발생으로부터 늙음ㆍ죽음으로 귀결되는
연기의 순환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연기를 설명하는 과정에 흔히 인과법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결론에 가서는 연기와 인과법은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