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특별히 어린이 주일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아이들을 축복하시니라”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늙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메시지를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아테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네.”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마시오. 그것을 물려받을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시오.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귀한 교훈입니다.”
아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는다고 해서 안아주고 감싸주고 부족함이 없도록 다 채워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벌도 주고 매도 아끼지 않아야 사회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건강하고 성실한 시민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을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때는 늦습니다. 후회만 남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를 보면 그냥 공만 잘 차는 것이 아니라 참 바른 인성을 지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 손웅정 씨는 어떤 인상을 줍니까? 이전에 어린 아들을 얼마나 독하게 훈련시켰는지 이웃 사람들이 볼 때마다 저러다 애 잡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손웅정 씨가 무서울 정도로 두 아들을 가르치면서 교육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원칙을 세워 지켰는데 그 원칙을 세우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성경구절입니다. 잠 22:15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이 구절이 손웅정 씨가 아들에게 엄하게 한 이유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는데, 그것을 바로 잡아줄 사람은 부모나 스승이 되어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미련한 짓이 아니라 미친 행동을 해도 제대로 야단도 못 치고 벌도 못줍니다. 저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도 제제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학생이 평가를 하여 점수를 매기고 심지어 교육청 홈페이지에도 올릴 수 있으니 어떻게 야단을 칠 수 있겠습니까. 손웅정 씨는 이 말씀을 원칙으로 삼고 엄하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경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래도 너무 중요한 경기를 지고 와서 아들이 풀이 죽어 있으면 그때는 손웅정 씨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래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전9:4입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살아있으니 아직 소망이 있고 기회는 온다. 다음 경기가 또 있지 않느냐, 그러니 다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들을 인용하고 어떤 말씀을 적용하십니까? 평생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에 스스로 위로하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에게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상황에 따라 적용할 말씀, 일어서게 할 말씀을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 오기를 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어릴 때만 아니라 다 컸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만 해도 상당한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의 꿈과 비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좋은 학교를 가는 이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지성 선수와 김남일 선수는 자신의 인생이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나서부터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히딩크가 한국의 감독이 되기 전에는 그저 그런 선수였는데 히딩크의 눈에 발견되고 나서 그들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김남일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아니면 아나운서 아내도 못 만났을 것이고 그러면 아들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그의 삶이 모두 히딩크 감독 덕분이고 그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그의 인생이 그야말로 180도 바뀌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과의 만남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도, 나사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존 뉴튼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노예를 잡아 파는 선장이었으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후에는 예수님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지은 곡이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 자녀들도 예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미래가 밝아지고 바른 꿈과 비전을 갖게 됩니다.
부모들이 왜 자녀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갔습니까? 만져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마19장 13절에서는 예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기를 원하여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정말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축복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기 원하는 마음이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도리어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른들의 일에 아이를 데리고 옴으로 당시 사회 관습을 무시하고 그르친다는 판단 때문이고, 또 예수님은 바쁘고 심신이 피곤하신데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와서 성가시게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각없는 부모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아닌, 도리어 이들을 책망하는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기도 받기를 원하여 나오는 부모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하신 주님의 상황으로 볼 때 이 부모들의 행동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측면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를 복 받게 하고픈 부모의 마음을 이기적이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천국 시민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어린이는 그래도 순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일컬어 천진난만하다는 표현을 합니다. 일이나 말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고 참되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꾸미거나 남의 눈을 속이지 않습니다. 점점 어른이 되어 가면서 가식과 위선이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어른들과 다릅니다. 그야말로 순진무구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은 죄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 가운데서 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이 나타나 몸을 지배하고 이끌지 아니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진한 것입니다. 어른들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내려니 교묘하게 머리를 쓰고 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좋아하고, 물질과 명예로 차려입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어린 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가는 순수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이런 순전함을 찾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 어린이는 감격과 감동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별것도 아닌데 ‘와’ 하고 감격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여 감탄을 연발합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특징입니다. 어른들은 웬만한 일에도 별로 감격하지 않습니다. 좀처럼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이 점점 굳어져 단단해졌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심성이 있습니다. 칭찬에는 인색해집니다. 단점과 약점을 찾는 데는 빠르고 비판할 일을 찾는 눈은 밝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칭찬과 존경과 사랑의 감탄사를 연발하는 그런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린아이의 특성 가운데 철저한 의존성 때문입니다. 15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받들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대코마이' 라는 단어인데 ‘받아들인다’.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라고 했는데 ‘영접하다’는 말이 ‘받들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영접하다’는 의미는 어린아이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기에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따르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인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처럼 영접하시길 축복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의존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품에만 있으면 사자가 와도 두렵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아이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아이들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당연히 어린아이들을 돌아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데 어떤 방해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축복받는 자녀가 되도록 더 힘쓰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또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받드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