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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녀(假父女)
손 창 섭
이렇게 느지막해서 혼자 터덜터덜 집이라고 찾아 들어올 적마다 강 노인은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굴속처럼 휑하니 비어 있는 방을 생각하면, 강 노인은 금세 집에 돌아갈 흥이 깨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 자기 집도 아니다. 2만 환에 2천 환씩 까들어가는 사글세 방이다. 교외나 다름없는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토담집이다. 교통이 불편한 걸 참고 이런데 눌러 지내는 것은 단지 값이 싸고 주위가 시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눈이 내리거나 몸이 고된 날은 고르지 못한 언덕길을 간신히 추어 올라가며, 방을 옮길까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낚시 도구를 추켜올리며 어두운 비탈길을 더듬어 올라가고 있는 지금도 강 노인은 몹시 피곤하였다. 낚시질은 그가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취미를 붙여온 유일한 도락이다. 낚시질에다 삶의 보람을 걸고 살아온다면 그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낚시질에 도취함으로써 인생사의 번거로움과 괴로움을 잊고 지내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더구나 50 고개를 넘어선 요즈음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기에 여가만 있으면 한두 시간씩 버스나 기차에 시달리며 낚시터를 찾아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강 노인이었다. 구름과 산 그림자가 어리는 연못이나 수로에 낚싯대를 척 버티고 앉아서 찌만 지켜보고 있노라면, 주위 사람들의 괄시도, 겹겹이 쌓여온 고독도 잊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려나 근자에 와서는 나이 탓인지, 도구를 챙겨 메고 돌아오는 길은 걷잡을 수 없이 심신이 피로하였다. 그리고 집이 점점 가까워올수록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있던 고독감이 일시에 전신을 휩싸버리는 것이었다. 노인은 후유 하고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걸음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문대며 잠시 가쁜 숨길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산허리에 있는 집의 불빛이 희미하게 쳐다보였다. 물론 주인네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다.
강 노인의 방은 언제나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아무도 방에 불을 밝히고 그를 기다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저물어 돌아오는 날, 어둠에 묻혀 있는 자기 방 앞에 설 때마다 강 노인의 마음은 그지없이 헛헛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겨울이면 더했다. 질식할 듯이 어둠과 냉기만이 꽉 차 있는 방 안에 들어서면, 방바닥마저 얼음장처럼 차디차다. 성냥을 꺼내 남포에 불을 밝히고 손수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강 노인의 얼굴은 마치 석상이나 다름없이 무표정하게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강 노인은 자기 방의 불빛이 그리웠다. 밖에서 어두워 돌아오는 자기를 환히 비춰줄 불빛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지도 모른다. 고기가 든 다랭이(‘다래끼’ 의 방언. 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바구니. 대, 싸리, 칡덩굴 따위로 만든다)를 고쳐 들고, 어깨에 멘 낚시 도구를 한번 추켜올리고 나서 걸음을 떼어놓으며 강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마누라가 있나, 자식이 있나,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있길 하나, 돈이…….”
탄식하듯 하다가 강 노인은 마지막 말을 채 맺지 않고 마는 것이다. 돈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당한 저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생을 족히 놀고먹을 만한 정도의 재산은 장만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강 노인이 그만한 저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 앞에서나 꿈에도 그런 낌새를 보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하나도 믿을 놈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노인이라 함부로 사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웃에서나 직장에서나 강 노인은 섣불리 남에게 속을 주지 않았다. 그는 모반관 반민업체의 접수계원이었다. 해방 후 10여 년간을 단 하루도 결근한 일이 없는 모범 직원이었다. 말이 적고 실수가 없는 강 노인은 언제나 상사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다만 기계처럼 융통성이 없이 빡빡한 일면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 수도 있어서 주위에 푸근히 어울리지는 못했다. 항시 직장에서 내준 제복과 제모를 단정하게 차리고 다니는 강 노인은, 집을 나가는 시간이나 돌아오는 시간이 일정하였다. 자기 손으로 조반을 지어 먹고 점심밥까지 싸들고 강 노인이 집을 나서는 것은 7시 25분이다. 꼬박 1시간 5분을 걸어서 8시 30분 정각에는 틀림없이 직장 문 안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도 고정적이다. 5시 퇴근인 일반 직원보다 반 시간 늦게 직장을 나오는 강 노인은, 시장에 들러 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6시 40분이다. 이렇듯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여오기를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그러한 강 노인도 간혹 시간보다 늦어서 집에 돌아오는 수가 있다. 그런 날은 물론 낚시질을 다녀오는 날인 것이다.
지금도 주먹만한 양키 자물쇠를 따고 방에 들어와 불을 켜고 보니 8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이쿠, 저녁이 너무 늦었군!”
혼자 중얼거리고, 강 노인은 낚시 도구들을 대강 간수한 다음 부엌으로 바삐 나갔다. 쌀을 일어 안치고 나서 밥이 끓는 동안에 잡아온 고기를 깨끗이 다듬어서 요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날은 몸이 고되어서 부엌 일이 사뭇 귀찮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시장기는 부쩍 더해서 굶고 잘 수는 없다. 고기의 내장을 긁어내면서 강 노인은 자꾸만 외로워지는 것이다. 남들처럼, 고함을 지르고 쫓아 나와 고기 다랭이를 받아 들여가는 손자 녀석도 없고, 들어와 앉기가 바쁘게 진짓상을 차려다 바치는 며느리도 없는 자기의 신세가, 그림자를 대하듯 허전하고 서글프기만 한 것이다. 그러한 강 노인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 해치우고 나서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잠근 다음, 낡아빠진 옷 고리짝을 들출 때만은 주름진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이다.
고리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젖히고 난 강 노인은, 철 지난 누더기 같은 옷들 사이에서 우선 손바닥에 중량감이 느껴지는 금붙이부터 꺼내보는 것이다.
가락지, 반지, 팔찌, 마고자 단추, 비녀 등 여러 가지 누런 금붙이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보고 나서, 그것들을 소중히 도로 집어넣는다. 다음에는 집문서를 꺼내본다. 등불 곁에 바싹 가져다 대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를 한 자도 빼지 않고 읽어본다. 강 노인은 약 반 년 전에 집을 한 채 장만하였다. 유축이기는 하지만 2층으로 된 거리집이어서 아래층은 문방구점과 유리 가게에 빌려주었고, 2층은 다방에 역시 세를 놓고 있었다. 매달 월말이 되면 강 노인은 그리로
셋돈을 걷으러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인은 자기가 집주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관리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집문서를 다 읽고 난 강 노인은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음을 짓고 그것을 도로 봉투에 넣어서 옷 사이에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노인이 고리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10만 환의 현찰 뭉치였다. 틀림없이 자기가 묶어놓은 대로였다. 강 노인은 안심하고 돈 뭉치를 도로 간직하였다.
“자식두 다 소용없거든. 요즘 세상에 제대루 부모 섬기는 자식 없더라구.”
강 노인은 만족하였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도,
“지금 세상엔 돈이 있어야 돼. 암, 이를 말인가.‘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듯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다. 근년에 이르러 머리의 흰 털과 얼굴의 주름살이 알아보게 늘기 시작한 강 노인은, 차츰 재물이 불어가는 것과 동시에 마음 구석에는 뜻하지 않았던 공허감이 깃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물만 가지고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허전한 구석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불안을 덮어버리고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강 노인은 저녁마다 고리짝을 열어놓고 축재의 보람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지나가는 말로, 그러한 노인의 앞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사람이란 늘그막에 의지할 데가 없고 보면 남의 눈에는 초라해 보이고 당자는 그지없이 외로운 법이라고 하며, 이제라도 마누라를 얻으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속이 타고 고생되는 일이 있더라도 역시 인간의 낙이란 자식 기르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낙을 모르고 여생을 무슨 재미로 보내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실제 문제로서는 반드시 크게 자식 덕을 보자는 게 아닐지라도, 몸져누웠을 때 물 한 모금 떠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무자식 상팔자라우!”
버릇처럼 강 노인은 그 한 마디를 내뱉고 입을 뚜 다물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더러는 어째서 젊었을 때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강 노인은 으레,
“무슨 참견인고!”
그러고는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강 노인은 자주 딸을 앞세우고 낚시질 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다나는 자신은 언제든 한 줌이나 되는 흰 수염을 나부끼며 걸었고, 멋진 여자용 즈봉에 소매 없는 하늘색 셔츠를 입은 18, 9세 가량의 딸은, 낚시 도구를 어깨에 멘 채 한 걸음 앞서서 걷는 것이다. 이 딸의 아름다운 뒷모양을 자애로운 눈으로 지켜보며 걷는 부친은 간혹 실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면 딸은 어깨를 추며 쿡쿡 하기도 하고, 혹은 돌아서서 아버지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논이나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행복스러운 이 부녀의 일행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것이다. 강 노인은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꿈을 자주 꾸게 되었던 것이다. 수년 전 일이었다. 어느 날 근교로 낚시질을 갔더니 어떤 중년 신사가 17, 8세 먹었을 딸과 그보다 두서넛 아래로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그 딸과 아들도 각기 한 틀씩 낚시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제법 익숙한 솜씨들이었다. 점심때가 되자, 소녀가 깨끗한 종이에 무엇을 싸들고 강 노인 곁으로 다가왔다. 자기가 만든 샌드위치라면서 맛을 보라고 하며 소녀는 종이에 싼 것을 강 노인 앞으로 내밀었다. 소녀는 퍽 명랑하고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마, 많이 잡으셨군요, 아저씨.”
고기 구럭을 들여다보고 돌아서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던 강 노인은 뜻하지 않게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속이 빈 것처럼 너무나 허전하였다. 물속에 어리는 자기의 그림자마저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때의 광경이 강 노인에게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 기억이 요즘 와서는 이렇게 꿈으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 꿈을 깨고 날 적마다 강 노인은 서운한 생각에 다시 잠이 들지 못했다. 그게 꿈이 아니고 생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다. 그와 같은 강 노인의 꿈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으로 차츰 변해버렸다. 거리를 가다가도 건강하고 명랑하고 얌전해 보이는 소녀가 눈에 뜨이면,
‘고게 내 딸이라면…….’
하는 생각이 불끈 가슴을 치밀곤 하는 것이었다. 강 노인이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는 여자 사무원이나 급사가 수십 명이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정이 있어 보이는 애를 대할 때마다,
‘나도 요런 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실없이 가슴이 다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상하게 정이 끌리는 애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절히 대하면서 접근해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 사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제 겨우 15, 6세의 급사년들까지도, 이쪽의 친절을 기화로 강 노인을 이용이나 하고 놀려 먹으려 들었지 조금도 진심을 살뜰하게 받아들이려는 애는 없었다. 그래서 강 노인도 계집년들이란 할 수 없다고 투덜대며, 다른 접수계원들처럼 여사무원들에게는 딱딱하게 대했고, 급사애들에게는 사소한 일에도 눈을 부라리며 호령을 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내게 명랑하고 다정한 딸이 있었으면 하는 강 노인의 원은 날이 감에 따라 더 간절해가기만 했다. 최근에 이르러는 딸에게 끌려 다니며, 조르는 것을 뭐든지 사주기도 하고 낚시 도구를 앞세우고 같이 낚시질을 가기도 하는 광경을 강 노인은 꿈에서 뿐 아니라, 눈을 번히 뜨고 앉아 있으면서도 자꾸 공상 속에 그려보게끔 되었다. 그러한 강 노인의 마음을 다소라도 만족시켜줄 만한 기회가 의외에도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서무과에 새로 들어온 안종숙이라는 급사애가 강 노인을 무척 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종숙은 강 노인만을 유별히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생글생글하며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접하는 소녀였다. 예쁘다기보다는 귀여운 맛이 있는 소녀였다. 살갗이 희고 눈은 유달리 새까맣다. 그 까만 눈이 언제나 웃고 있었다. 그러한 종숙의 모습은 첫인상부터 강 노인의 마음에 폭 들었다. 첫 인사차 접수계에 처음으로 종숙이가 나타났을 때, 무조건 정이 가서 강 노인은 가슴이 설랬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이가 몇 살이지.”
하고 친절하게 묻는 강 노인의 질문에,
“열다섯 살이에요.”
퍽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부모님 다 계시냐?”
“어머니만 계셔요.”
“허어, 그래, 형제는.”
“남동생이 둘이구,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그럼, 네가 맏딸이구나.”
종숙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좀 수줍은 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어머니가 혼자 벌어서 다섯 식구 생활을 해나가나'”
“예.”
“그래서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도우려고, 여학교에두 못 가구, 이렇게 취직을 했구나.”
“작년 봄에 여학교에 들어갔다가 등록금을 못 내서 쫓겨났어요. 인제 첫 월급을 타면 야간 여학교에 나갈래요.”
“옳아, 그러냐. 참 기특하다'’
강 노인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당장이라도 학비를 대줄 터이니, 오늘이라도 야간 여학교에 입학을 하라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날 종일토록 강 노인의 머릿속은 종숙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종숙의 일만이 생각났다. 자리에 들어서도 강 노인은 자꾸만 종숙의 귀염성 있는 모습이 눈앞을 사물거려서 빨리 잠이 오지 않았다.
“오냐, 걱정 마라. 내가 있다. 내가 뒤를 돌봐주마!”
강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다음날부터 강 노인은 출근하면 종숙이부터 보고 싶었다. 얼른 눈에 뜨이지 않으면 강 노인은 일부러 옥사 내를 두루두루 찾아다니면서 종숙을 만났다.
“오오, 여기 있었구나. 그래 일은 고되지 않느냐?”
“괜찮아요.”
종숙은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서 정답게 웃으며 대답한다.
“오올치, 그래야지. 너무 긴장해서 몸이 피로하문 안 된다. 차차 낯들두 익구 요령이 트이면 슬슬 놀면서두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렇게 일러놓고 강 노인은 천천히 접수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가슴이 뿌듯한 만족감을 의식한다. 뜻하지 않았던 행복이 꼭 자기를 찾아와줄 것 같은 황홀한 기대에 강 노인은 쾌적한 흥분에 취해보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강 노인의 이러한 감정은 고조되어갔다.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지나는 동안에 강 노인은 종숙이와 완전히 친밀해질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강 노인의 정이 종숙에게도 고맙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틈만 있으면 종숙이 편에서도 접수계로 내려와서 강 노인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종숙은 강 노인보고 ‘아저씨’ 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강 노인은 무척 고맙고 기뻤다.
어느 토요일, 퇴근하는 길에 강 노인은 종숙에게 점심을 한턱내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별러오던 일이지만, 여느 날은 둘이 다 점심을 싸가지고 오기 때문에 좀처럼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강 노인을 따라 음식점에 들어와 앉은 종숙은 몹시 거북해하는 눈치였다. 자주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숙이곤 했다.
“자, 뭘 먹구 싶으냐? 설렁탕, 곰탕, 냉면, 갈비탕, 비빔밥 뭐든지 있다. 오늘은 아저씨가 한턱내는 거니까, 맘대루 먹구 싶은 걸 청하란 말이다. 그럼 뭘루 할까?”
강 노인이 그렇게 신이 나서 주워섬겨도, 종숙은 조그만 소리로,
“아무거나 좋아요'’
그러고는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또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강 노인은 할 수 없이 멋대로 음식을 주문했다. 곰탕 둘을 특별로 시켜놓고, 곁들여서 불고기 한 접시를 청했다. 그러자 종숙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을 한 듯이 미소 띤 눈으로 갸웃이 강 노인을 쳐다보며,
“아저씨이.”
하고 속삭이듯 불렀다.
“왜?”
“저어, 그 모자 벗으세요. 남들이 자꾸만 봐요.”
그리고 종숙은 제가 먼저 얼굴을 붉혔다. 강 노인은 그제야 종숙의 심중을 깨닫고, 쓰고 있던 직장의 제모를 얼른 벗어서 감추었다. 그것은 마치 역장처럼 누런 금테가 둘려 있는 모자였다. 이어 강 노인은 자기가 입고 있는 제복을 한번 살펴보고 나서, 음성을 낮추어 가지고,
“이건 괜찮을까?”
웃는 낯으로 종숙을 보며 물었다.
“건 남들이 몰라요!”
경찰복 비슷한 형의 회색 사지 제복은 정말 그렇게 남의 눈을 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인제야 안심했다.”
강 노인은 참말로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종숙은 그런 강 노인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를 죽여가며 웃었다. 강 노인도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종숙이가 날 막 놀리는구나.”
그러더니 별안간 우후후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이런 걸 먹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하며 종숙은 꽤나 맛있게 수저를 놀리는 것이었다. 강 노인은 만족한 듯이 불고기를 통째로 종숙의 그릇에 쏟아주고 나서, 가끔 이런 기름기를 먹어야 영양 보충이 된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찻물을 마셔가며, 강 노인은 종숙이보고 오늘로라도 당장 야간 여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학비는 자기가 빌려준다는 것이다. 종숙은 고 까만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한참이나 강 노인을 쳐다보다가,
“그렇지만; 야간 여학교두 둥록금이랑 책값이 꽤 많은 걸요.”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암만 많어두 괜찮다. 얼마든지 내가 빌려줄 테니.”
“그렇지만, 제가 월급을 타두 한 번엔 다 못 갚아드릴 거예요. 엄마가 절반은 살림에 보태 쓰신대요.”
“그런 걱정은 안 해두 된다. 아저씨에게 그만 돈은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갚아두 좋단 말이다. 한 번에 못 갚으면 두 번에 갚으렴. 두 번에두 갚을 수 없거든, 세 번, 세 번에두 안 되문 네 번, 네 번에두 어려우면 다섯 번, 그렇게 해서두 갚을 수 없거든 종숙이가 다음 어른이 돼서 갚으려무나. 알겠니?”
종숙은 뜻밖이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래두 돼요?”
“암, 되구말구. 아저씨가 너보구 거짓말하겠니. 학비란 얼마가 들든 아저씨가 무기한으루 빌려줄 테니 말이다. 어서 오늘이라두 입학 수속을 하란 말이다. 그래 너만 못한 애들두 다들 중학교옐 다니는데, 남보다 몇 곱이나 총명하구 얌전한 우리 종숙이가 온 학교엘 못 가다니, 온 될 법 이나 한 말이냐?”
종숙은 흥분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새까만 눈이 더욱 진하게 빛났다. 이 길로 학교에 가서 입학 원서를 타가지고 집에 돌아가 어머니와 의논해보겠노라고 하며 종숙은 음식점을 나오는 즉시 들뜬 걸음으로 쏜살같이 혜어져 갔다.
월요일에 출근을 하자, 종숙은 미리 와 기다리고 있다가 매달릴 듯이 반가이 강 노인을 맞아주었다. 어머니와 의논한 결과를 물었더니, 승낙을 받았노라고 하며, 종숙은 얼른 편지 한 장을 내주었다.
“어머니가요, 고마운 아저씨께 드리라고 하시며 편질 써주셨어요.”
편지 내용은 극히 간단했다. 안면도 없는 어른께 철없는 종숙이로 해서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에 이어서, 그러면 염치 불구하고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하되 차용한 금액은 5개월 후에 갚아주겠노라는 문면이었다. 잇달아 어린것들과 일에 몰려, 직접 찾아가 뵈옵지 못하니, 그 점 널리 양해해달라는 인사로 끝을 맺고 있었다. 겨우 보통학교를 나왔을 뿐인 강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낯을 붉힐 정도였다.
필적이나 문장이 자기보다는 월등히 능숙했기 때문이다.
“너희 어 머니두 공부를 많이 하신 모양이구나.”
“옛날에 여자 고둥학교를 나오셨대요.”
“나이가 몇이신데?’’
“서른 여덟이셔요.”
강 노인은 다시 한번 편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종숙은 우선 강 노인의 돈으로 야간 여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강 노인은 마치 자기가 진학하는 것처럼 홍분해서 분주히 서두르고 돌아갔다. 강 노인은 입학 원서를 위시해서 그 밖에 입학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류들을 일일이 읽어보며, ‘음, 음’ 하고, 감탄하듯 연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자진해서 종숙을 데리고 서무과로 올라가 사유를 설명하고 조퇴까지 시켜주었다. 강 노인은 입학에 소요되는 금액을 딱 맞추어 종이로 여러 겹 싸서 종숙에게 들려주었다. 강 노인은 일부려 한길까지 따라 나와서, 쓰리(‘소매치기’ 란 뜻의 일어) 맞지 않게 돈을 조심하고 길을 건널 때는 반드시 좌우를 잘 살피라고 몇 번이나 일러주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거의 달음질을 치다시피 저쪽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종숙을 강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한자리에 서서 암만이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 노인은 종숙을 불러 세웠다.
“종숙아, 얘, 종숙아.”
그것은 딸을 부르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음성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종숙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강 노인은 자기 편에서 바삐 쫓아가서,
“너, 책가방은 있느냐?”
하고, 상냥하게 물었다.
“그런 건 없어두 괜찮어요. 책보에 싸가지구 다니죠, 뭐.”
“아니다. 그래서야 되나. 인제 여학생 인데 아주 근사한 가방을 들구 다녀야지 책보에 둘둘 말아가지구 다니다니. 초라해 못 쓴다. 그럼 내 가방을 사줄게 수속을 끝내구 일단 여기 한번 들렀다 가거라.”
강 노인은 그 밖에 또 무슨 할 말이 없는가 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종숙이가 전차를 타고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뒷짐을 지고 돌아서 걷는 강 노인의 가슴속에는 삶의 보람 같은 것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저녁마다 늘어가는 재물을 계산해볼 때보다 더 황홀하고 벅찬 감동이었다.
강 노인과 종숙의 사이는 하루하루 더 가까워만 갔다. 그것이 마치 지상 명령인 것처럼 강 노인은 지극한 정성과 애정을 종숙이에게 경도해갔다. 일찍이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는 강 노인은, 50 평생에 처음으로 가슴속 깊이 줄줄이 흘러넘치는 사랑의 분류를 경험하는 것이다.
종숙의 청이라면 강 노인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고, 또 발 벗고 나서고 싶었다. 이러한 강 노인에게는 자기에게 부딪쳐오는 종숙의 태도가 아무래도 뜨뜻미지근했다.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강 노인의 극진한 정을 종숙은 그저 인정 있는 노인의 친절이나 호의 이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강 노인의 친절과 호의를 무척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종숙은 그것을 받아들일 ˙때는 미안해했고 거북해했다. 지난번에 책가방을 살 때만 해도 그랬다. 입학 수속을 완료하구 종숙이가 직장에 다시 들른 것은 퇴근 무렵이어서, 강 노인은 이내 종숙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방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가서, 강 노인은 종숙이더러 마음대로 고르라고 했다.
“집에 가서 어머니하구 의논해보구 사겠어요.”
“아, 이런 걸 다 의논해. 이건 네 입학 기념으로 아저씨가 그냥 사주는 거야. 나중에 갚아달랠까봐 그러냐?”
“그래두 어머니한테 물어보겠어요.”
종숙은 좋아하는 눈치이면서도 선뜻 달려들지 못한다. 강 노인은 종숙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점원에게 여학생의 가방을 최고급으로 골라달라고 했다. 점원은 이내 여러 종류의 가방을 주르르 꺼내놓았다.
“자, 어느 거든 네 맘에 드는 걸루 골라라.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얼른 맘대루 골라봐!”
강 노인은 조급히 이것저것 들어보였다. 그제야 종숙은 녹색 선을 두른 예쁘장한 가방 하나를 가리키며,
“이거 꽤 비싸죠?”
하고 수줍은 듯이 점원과 강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비싼들 가방 하나에 얼마나 할라구.”
강 노인은 선뜻 흥정을 하고 돈을 치렀다. 돌아오는 길엔 둘이서 빵집엘 들렀다. 종숙은 가방을 소중히 무릎 위에 얹어놓고 좋아하는 크림빵을 먹었다.
“앞으룬 말이다. 뭐나 필요한 게 있거든 서슴지 말구 말을 해라. 아저씬 종숙이가 원하는 거문 뭐든 다 들어주구 싶다.”
강 노인은 여느 때 없이 호젓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씬 돈이 많으세요?”
“별루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아저씬 혼자 사니까 돈을 쓸 데가 없지.”
“어머나! 그럼 아저씬 아주머니두 안 계시구 아이들두 없으세요?”
“아저씬 아무두 없이 혼자 산다. 그래,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다.”
“그럼, 진지는 어떡허세요? 그리구 빨래서껀, 바느질은 누가 하구요?”
“음, 그거 다 아저씨가 혼자 하지. 아저씬 말이다, 오래 혼자 살아와서 밥두 잘 짓구 빨래두 잘한다.”
“어쩌문.”
종숙은 감탄해 보이고 나서,
“혼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사세요?”
제법 위로조로 하는 말이었다.
“암 심심하지. 심심하구말구. 그러니까, 아저씬 자주 종숙이가 보구 싶구, 이렇게 마주 앉아 암만이구 얘기를 하구 싶은 게다.”
종숙은 강 노인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을 못하고 그저 머리를 숙여버렸다.
강 노인은 정말 잠시도 종숙이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만 안 보여도 강 노인은 자기 편에서 슬그머니 서무과로 올라가 보았다. 만일 종숙이가 제자리에 없으면 3층 건물 안을 온통 휘젓고 다니면서 찾아보았다. 점심시간만 되면 강 노인은 으레 종숙을 부르러 왔다. 접수계실이나 숙직실로 종숙을 데리고 가서 늘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다. 강 노인은 종숙을 위해서 일부러 점심 찬을 준비해가지고 왔다. 상당히 고급 반찬이었다. 월요일이면 반드시 전날 낚시질 가서 잡아온 붕어를 뼈까지 파삭파삭하게 고아가지고 오곤 했다. 종숙은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었다. 강 노인은 차츰 종숙이와 단둘이서만 오붓이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싶어졌다. 옆에 딴 사람이 있거나 드나드는 게 공연히 신경에 걸렸다. 마침 초여름이라, 강 노인은 점심시간이 되면 종숙을 건물 후원으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거기에는 꽤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드문드문 몇 그루의 상록수도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단둘이 무릎을 마주 대고 앉아 점심을 먹는 것이다. 둘이 같이 점심을 먹는다기보다, 종숙이가 맛있게 먹는 것을 강 노인은 구경만 하고 앉아 있는 격이었다.
“아저씨두 어서 드세요. 왜 그러구 앉아서 자꾸 나만 바라보세요.”
종숙이가 웃으며 지적을 하면 강 노인은 그제야 자기도 멋쩍게 씩 웃고 젓가락을 늘리는 것이다. 강 노인은 지극히 만족하였다. 종숙이와 단둘이 마주 앉아 점심을 먹을 때면 뿌듯이 가슴을 치미는 행복감에 도취하는 것이었다. 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애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천사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종숙은 강 노인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을 모두 한데 뭉친 거룩한 애정의 표상이었다. 강 노인은 자주 벅찬 가슴으로 종숙을 끌어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인형같이 자냥스러워 보이는 고 볼에다 얼굴을 비벼보고 싶었다. 이쪽에서 그러기 전에 종숙이가 먼저 와락 덤벼들어 어리광을 피워주었으면 싶었다. 좀더 친밀해지면 될까 될까 하고 강 노인은 날마다 기다려졌다. 그러나 허사였다. 강 노인은 기다리다 못해 더러는 이쪽에서 먼저 농담삼아 이런 말을 꺼내본다.
“우리 종숙이, 아저씨 입에 한번 뽀뽀해볼까!”
그러나 종숙은 대뜸 얼굴이 빨개가지고 해들해들 웃으면서 도리어 한 걸음 뒤로 물러앉아버리고 만다. 문득 그러한 광경을 지나가던 직원이 발견하고 실없는 농담을 거는 수가 있다.
“강 노인은 늘그막에 바람이 나셨군요. 아주 달콤한 장면입니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그런 소릴 들으면 강 노인은 단박 얼굴색이 변했다. 두고두고 그 직원과는 입을 열지 않는다. 최대의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숙이가 야간 여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강 노인은 한 번도 제 시간에 집에 돌아와본 일이 없다. 저녁마다 종숙이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강 노인은 부리나케 종숙이가 다니는 학교로 간다. 바로 학교 문 앞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앉아서 약주를 한잔하거나 가벼운 식사를 하면서 학교가 파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학과를 마치고 학생들이 우 몰려나오면 뛰어나가 정문 옆에 지키고 섰다가, 종숙을 만나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야 돌아서는 것이다. 종숙은 같은 방향에서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괜찮다고 늘 사양을 하지만, 여학생이 밤길을 다니면 봉변을 당하기 쉽다고 하며, 강 노인은 한사코 듣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점도 사실이지만, 한편 강 노인은 종숙을 한번 더 만나보고 돌아가야만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강 노인은 잠시라도 종숙이와 헤어져 있는 것이 허전하고 괴로웠다. 그러한 강 노인은 종숙이와 영원히 한집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늘 궁리해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숙을 양녀로 맞아들이는 일이 첩경이었다. 만일 본인이나 그 모친이 그것을 응하지 않는다면, 종숙이네 곤란한 생활을 전적으로 자기가 부담해도 좋다는 각오까지를 강 노인은 가져보는 것이다. 방이 두세 개 있는 전셋집을 하나 얻어가지고 종숙이네 온 식구를 아주 데려와버릴까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비추어볼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그것들은 좀더 시일을 요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 노인은 우선 종숙을 데리고 낚시질을 가보고 싶었다. 그리되면 딸을 앞세우고 낚시질 다니는 황홀한 꿈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는 셈이었다. 일요일에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어야 한다고 좀체 응하려 하지 않는 종숙을 강 노인은 두고두고 살살 달래어 오던 끝에, 하루는 마침내 승낙을 받고야 만 것이다. 아주 멋진 블라우스와 바지에다가 농구화며 등산모까지 사준다는 바람에, 종숙은 그예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약속대로 강 노인은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는 즉시 종숙을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몇 군데의 양품점과 백화점을 두루 돌아다닌 끝에, 반소매 연녹색 블라우스와, 코코아 색 바지, 홍콩산 특제라는 스포츠용 농구화와 등산모를 사서 종숙에게 들려주었다. 강 노인은 돈을 척척 세어 내주면서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이럴 때 쓰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왔다는 듯이. 아무튼 그가 이렇게 시원스레 돈을 물 쓰듯 척척 써보기는 처음이었다. 종숙의 마음을 자기에게 꽉 붙들어 매어두기 위해서는 강 노인은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종숙의 동생들을 위해서 과자 꾸러미를 들려 보내는 것도 강 노인은 잊지 않았다.
그날 밤, 강 노인은 마치 소풍날을 앞둔 국민학교 학생처럼 감미로운 흥분과 기대에 빨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은 날씨도 좋았다. 어제 저녁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행장을 갖추고 강 노인은 종숙이와 약속한 장소인 시외버스 시발점으로 일찌감치 나갔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나 일렀다. 강 노인은 그 한 시간 동안을 내내 서성거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간이 되어도 종숙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 노인은 더욱 초조해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약속 시간보다 반 시간이나 늦어서야 종숙은 할딱거리며 뛰어왔다. 어제 새로 산 복장으로 말쑥이 차리고 있어서 딴사람같이 멋지고 예뻐 보였다. 어머니가 꾸중을 해서 말다툼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눈물 자국이 있었다. 하여튼 강 노인은 반갑고 행복스러웠다. 여름날 아침의 교외 풍경을 바라보며 버스로 한 시간 가까이나 달렸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반 시간 이상이나 걸었다. 강 노인은 꿈에서처럼 낚싯대를 종숙에게 메워 앞세우고 한 걸음 뒤를 따라 걸었다. 강 노인의 얼굴은 젊은 사람처럼 빛났다. 잠깐 사이에 낚시터에 닿았다. 벌써 연못가에는 드문드문 선참자가 여러 패 앉아 있었다. 강 노인은 사람이 없는 장소에 뚝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고기를 낚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부녀처럼 오붓이 둘이서만 하루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강 노인은 종숙에게 낚싯대 다루는 법을 일러주고 나서 한 대를 버티어주었다. 여러 번을 거푸 미끼만 떼이고 나더니 종숙은 재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붕어 새끼를 낚아 올릴 적이 있었다. 그러면 종숙은 고 까만 눈을 번득거리며 사뭇 신기한 듯이 기성을 지르고는 강 노인을 부르는 것이었다. 점심은 물론 낚싯대를 버티어둔 채, 둘이 풀밭에 마주 앉아 먹었다. 강 노인은 도무지 시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내내 종숙의 입만 바라보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도 이 부녀 아닌 부녀는 한동안이나 정답게 소근거렸다. 강 노인은 종숙을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딸을 둔 아버지의 심
경을 맛볼 것 같았다.
“자, 어디 우리 종숙일 한번 안아볼까?”
강 노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종숙을 끌어당겼다. 종숙은 캐득거리며 버둥댔으나 기를 쓰고 뿌리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강 노인은 두 팔에 힘을 주어 종숙의 상반신을 간신히 끌어안았다. 종숙은 연방 깔깔대고 웃으며 몸부림을 쳤다. 강 노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종숙의 입에다 뽀뽀를 했다. 그러자 종숙은,
“싫어, 싫어.”
하고 소릴 지르며 전신을 요동하였다.
“종숙이 입에선 여태 젖 냄새가 나는구나.”
강 노인은 웃으면서 그러고 종숙을 놓아주었다. 종숙은 날쌔게 뛰어 일어나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대면서 강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역시 다정하게 웃는 낯이었다. 강 노.인은 흐뭇하였다.
그러나 강 노인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뜻하지 않았던 장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월요일 아침 강 노인이 출근해서 좀 있으려니까 종숙이가 웬 낯선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종숙은 풀이 죽어 있었다. 종숙을 따라 들어온 여인은 무엇을 싼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그 여인은 종숙의 모친이었다. 종숙의 모친은 강 노인에게 약간 머리를 숙이고 나서, 조용히 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강 노인을 싹 쳐다보는 눈매에 어딘가 매서운 데가 있었다.
첫눈에 졸하지 않은 여장부형이라는 인상이었다. 강 노인은 어리둥절해서 숙직실로 종숙이 모녀를 안내해 갔다.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종숙의 모친은 극히 형식적으로 여러 가지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새침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우리 애에게 대해서 지나친 친절을 베풀지 말아주세요. 남들처럼 잘 멕이지두 입히지두 못하구 떳떳이 교육두 못 시키지만 내 자식은 내 힘으로 키우구 싶어요. 더구나 아직 철이 없는 애에게 대해서 이상한 행동은 취하지 말아주세요. 날마다 얘한테서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서두, 처음엔 그냥, 세상엔 친절한 분두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단순히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차츰 친절이나 호의의 도가 지나치기에 께름칙하게 생각해오던 차에 마침내 제 귀에 불쾌한 소문이 들려와서 펄쩍 정신이 들었어요. 세상엔 눈두 많구, 입두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과부 생활 10년에 저는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어요. 더구나 어제는 애를 먼데루 꼬여가지구 가서 나이 보람두 없이 그게 무슨 짓이에요. 이 이상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앞으룬 절대 삼가주세요.”
여인은 그러고 나서 종숙을 돌아보며,
“너두 잘 알아들었지! 다시 그렇게 눈치 없이 굴었단 어머닌 죽어버리구 말 테다.”
하고, 흘겨보는 것이었다. 종숙은 아까부터 머리를 숙인 채 두 주먹으로 연방 눈물만 닦고 있었다. 강 노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겨우,
“건 오해십니다. 절대 오해십니다…….”
그러고는 입을 실쭉거리며 미처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 말씀두 마세요. 전 변명을 들으러 온 건 아니에요.”
종숙의 모친은 야무지게 똑 자르듯이 말하고는 가지고 온 보자기를 끌러놓았다. 그것은 어제 사준 옷과 그전에 몇 번 사준 물건들이었다.
“이 물건들은 도루 받아주세요. 그리구 학교 등록금으로 빌려주신 돈은 천하 없어두 2∼3일 내에 돌려보내르리겠어요.”
이쪽에서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종숙의 모친은 저 하고 싶은 말만 다 쏟아놓고는 부리나케 일어서 나가버렸다. 강 노인은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도 실신한 사람처럼 내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침내 조퇴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단골집에 들러서 술을 몇 잔 들이켜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길에서 15, 6세의 소녀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설레곤 했다. 모두가 종숙이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날 밤 강 노인은 종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보아온 재물을 또 끄집어내서 하나하나 점검해보다가, 이결 통째로 종숙에게 주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면 종숙이 모친의 오해가 풀리고, 종숙은 영원히 자기의 종숙이가 되어줄 것 같은 감이 든 것이다. 종숙이만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강 노인은 지금까지 모아온 전재산을 송두리째 바쳐도 후회될 것 같지 않았다. 이튿날 강 노인은 집문서와 금붙이를 단단히 꾸려서 양복 밑으로 허리에 두르고 출근했다. 종숙은 강 노인을 만나면 대뜸 울상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도망가듯 지나쳐버리곤 하였다. 강 노인도 일부러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종숙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괴롭혀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강 노인은 종숙이가 다니는 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가 파하기까지 꼬박 세 시간 가량이나 기다렸다.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여학생들 틈에 물론 종숙이도 섞여 있었다. 강 노인은 멀찍이서 종숙의 뒤를 따라갔다. 종숙이네 집 가까이 이르러서야 강 노인은 가만한 소리로 종숙을 불러 세웠다.
“어머닐 좀 만나게 해다고. 꼭 드릴 말이 있어 그런다.”
종숙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숙이고 자기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강 노인은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강 노인은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윽고 종숙이네 판자 대문이 열리고 사람의 모양이 나타났다. 종숙이었다. 그리고 종숙이 뒤에 열두서넛 되었을 사내애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저씨, 모두 제가 나빠요'’
종숙은 강 노인 앞에 다가와서 그러고는 울기 시작했다. 그 옆에 붙어 서서 무슨 무서운 물건이나 보듯이 강 노인을 잔뜩 노려보며, 따라 나온 소년이 내뱉듯 했다.
“얼른 돌아가래요. 우리 집에 또 찾아오문 울 엄마가 경찰에 알린대요.”
강 노인은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종숙이와 그 동생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강 노인은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이런 말을 했다.
“건 내 속을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난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종숙이나 너희 어머니를 나는 조금두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 어머니가 내 마음만 알아준다면 내 재산을 통째루 줄려구 이렇게 집문서랑 금붙이를 가지구 온 거다.”
그러고 나서 강 노인은 제복 속에 두르고 온 꾸러미를 만져 보였다.
“자꾸만 찾아오문 울 엄마가 경찰에 알려서 잡아가게 한대요. 얼른 돌아가요!”
종숙이 남동생이 역시 입을 뚜 내밀고 지껄였다.
“오냐, 다시는 안 오마. 두 번 다시 안 찾아오겠다. 하지만 너희 어머니는 엉뚱하게 날 오해하구 있다. 난 본시 여자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 그리워서 그랬다. 난 그저 덮어놓구 종숙일 기쁘게 해주구 싶었을 뿐이다. 내 맘을 그렇게 몰라주다니…….”
강 노인은 참말 여자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남편이 될 수 없는 생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는 사내 였다. 그저, 재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가슴속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 못 견디게 인간의 체온이 그리웠을 뿐이었다. 강 노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종숙이었지만,
“제가 나빠요, 제가 나빠요'’
하며,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더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한 종숙을 우두커니 한동안 바라보고 섰던 강 노인은,
“난 낼부터, 직장을 그만둘 테다. 너만은 안심하구 부지런히 출근해라. 공부두 잘하구…….”
그리고 강 노인은 마침내 발길을 돌이켰다. 강 노인은 어두운 길을 정신없이 걸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거의 되어서야 자기 집이 있는 산비탈 길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간신히 추어 오르고 있었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했다. 머리가 휘휘 내젓고 아랫도리가 자꾸만 휘청거렸다. 강 노인은 어제부터 제대로 식사를 할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쉬 죽으려나부다'
강 노인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나무그루를 의지하고 주저앉곤 했다.
다음날 강 노인은 정말 출근하지 않았다. 축 늘어져서 하루 종일 방에만 누워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종숙의 양복, 농구화, 가방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물론 그지께 종숙이 모친이 돌려주고 간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에 눈이 갈 때마다 강 노인의 속은 종숙이 생각에 더욱 홧홧 달아올랐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강 노인은 마침내 자리를 차고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 번만 더 종숙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종숙에게 사주었던 물건들을 도로 보자기에 잘 쌌다. 그리고 어제처럼 집문서와 금붙이를 딴 보자기에 싸서 옷 속으로 허리에 둘렀다. 현찰도 있는 대로 꾸려서 몸에 간직하고 집을 나섰다. 허기가 져서 결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길가의 판잣가게에 들어가 가락국수를 청했다. 그러나 영 구미가 당기질 않았다. 절반쯤 먹다 말고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종숙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차를 내려 꽤 오래 기다렸다. 교문을 나오는 종숙을 발견하자 강 노인은 조심스레 그 앞에 나타났다. 이틀 사이에 몰라보게 초라해진 강 노인의 모양을 보고 종숙은 적잖이 놀라는 눈치 였다:
“한 번만 보구 싶어 찾아왔다: 잠깐만 얘기 좀 듣구 가거라.”
강 노인은 종숙을 근처 음식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종숙은 딱한 듯이 주위를 살피고 나서 마지못해 따라 들어왔다. 간단한 음식을 시키코 나서 강 노인은 기도하듯이 이런 말을 물었다:
“종숙인 아저씨 따라 멀리루 가보구 싶지 않으냐? 아저씨하구 멀리 가서 단둘이 살까? 싫으냐?”
종숙은 대답이 없이 그 까만 눈으로 강 노인을 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눈이었다.
“종숙인 어머니 떨어져선 살 수 없는 모양이지? 역시 이 아저씨보다는 어머니가 좋은 게지?”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종숙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내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음식이 와도 두 사람은 별로 손을 대지 않은 채 자리를 일어섰다. 강 노인은 허수아비같이 전연 맥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강 노인은 허리에 둘렀던 보자기를 끌려서 옷 보퉁이와 함께 싸서 종숙에게 주었다.
“아저씨에겐 이런 거 다 소용없다.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구, 다시는 네 앞이나 너의 집 근처에 얼씬하지 않겠다구 전해 드려라. 그리고 부디 공부 잘하구!”
강 노인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돌아서버렸다. 종숙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강 노인의 초라한 뒷모습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끝-
2016년 10월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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