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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성헌(吝醒軒)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미
*부천 소설가협회 에서 발행한 무크지 <소설과 비평> 창간호(2009.01.05)에 실린 저의 졸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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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의 장편<만다라>1)에 나타난 일탈2)과 방황
이 정 미
1. 들어가는 말 --낯설게 하기와 구도소설에서 인물의 일탈과 방황
소설「만다라」(이하 ‘작품’)는 참된 해탈과 구원을 위해서 온갖 번뇌를 거칠 수밖에 없는 개별적 인물의 구도(求道) 과정을 전개한 작품이다. 작가 김성동은 1979년에 이 작품을 원본으로 처음 출판하였다가, 2001년에 ‘깊은강’(이하 본문 출처)에서 개작(改作)출판했다. 작품에는 작가가 고교 3학년 때 출가하여 10년간 승려생활을 하다가 하산한 후의 자전적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개작본에서는 원본에 비해 자전적 요소를 많이 배제하고 인물의 고뇌를 객관적으로 더욱 형상화했다.
처음 발표되었던 1980년대의 문학적 흐름을 살펴본다면, 민중문학과 참여문학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었으며 문학작품에서는 소비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소외층의 정서와 자의식 주인공의 관념적 유희가 일상 체험담으로 일관했다. 특히 소설문학에서 자의식 주인공은 늘 고뇌에 처해서 현실 부조리를 직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불교와 자기 구도가 융합된 신선한 발상이 깃든 소설로 주목하게 했던 것이다. 자기 각성과 깨우침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철학이 자의식에 빠진 일상적 소시민 정서에 친근하게 어필하던 시대 탓인지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독서계를 풍미했다. 그 무렵에 또 다른 차원의 종교소설로는 이문열의「사람의 아들」(1979)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방황하는 인물을 통해서 기독교의 원리와 질서체계에 회의하고 부정하는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나타냈다.
작품은 “실천적 논리 이전에 수행의 고뇌를 그린 소설이며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질문”3)과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은 불교를 소재와 배경으로 했으며 방법과 과정이 어떻든 일탈(deviance)과 내적 방황 끝에 구도에 이르는 승려가 등장하기에 일단 구도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작가 자신도 일인칭 주인공 법운에게 입산의 의지를 심어주는 방향으로 전개한 구도소설이라 칭했다. 실존적으로 본다면 구도에서도 일탈․방황은 있을 수 있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이란 낯익은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비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낯설게 하기’는 절대자를 신봉하는 종교와 인간의 일상을 대상화하는 구도 소설에서 흥미 있게 적용될 수 있다.
소설에서 작가의 의식은 기존의 윤리, 관습, 터부 등 이미 확정된 영역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에 지배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주관적인 심층 심리나 직관에 의해서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질서로 이끄는 경우가 있다. 소설 속의 일탈·방황하는 인물은 후자에서 창조된다. 그 인물이 구도소설 범위에서 성스러움을 표상하는 종교인의 얼굴을 한 채 일탈·방황을 반복한다면 일단 독자에게 흥미와 충격을 주기 마련이다.
이 글에서는 작품 속에 나타난 변별성이 있는 인물들의 일탈이나 방황을 하는 행동에 초점을 두면서 어느 수준의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는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영원한 타자로 남는 성자와 세속인
작품에는 일인칭 화자인 법운과 지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나온다. 주로 그들의 대화와 공간이동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있으나, 현재 시제에 의한 진술에는 과거 사건이 에피소드처럼 종횡무진하게 등장한다.
승적을 박탈당해 음주벽을 키우며 떠돌이 땡초가 된 수행 10년차인 32세의 ‘지산’. 그는 은죽사에서 승려로서 열성 수행하던 한때에 절에 온 여대생과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정사를 벌인 것이 현재 상태의 시작이었다. 그는 법운을 만난 뒤 그 앞에서 거듭된 일탈과 기행(奇行)을 일삼으며 말년에 파멸을 자초하는 회색인이다. 음주, 흡연, 여자관계 등을 즐기는 식의 일탈을 꾀하면서 승려인 자신을 희화하며 자조에 빠진다.
착실하게 선문의 규율를 지키며 화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수행하는 그의 도우(道友) 수행 6년차인 25세의 ‘법운’. 그 외 법운에게 큰 불심을 심어준 신심 깊은 수행자 수관이 있다. 수관은 자신의 손가락을 태우며 천편일률적인 수행태도에 회의를 품으며 법운에게 보수적이라 평하며 자신의 신심을 심화하려 노력한다.
대조적인 삶의 자세를 지닌 지산과 법운. 작품 공간에서 일탈 또는 방황을 하는 두 사람은 경기도 벽운사에서 우연히 서로 처음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법운은, 초면부터 거리낌 없이 술취한 모습을 보이는 지산에게서 “개판이군!”(7쪽)하며 잔뜩 경멸을 보일 정도로 역겨움을 느끼지만 곧이어 “뜻밖에도 땡초답지 않게 눈매가 깊고 서늘했으며, 그 눈매 속에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비애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8쪽)라며 강열한 인상을 받는다. 잠시 후 “너무도 태연자약해서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짓거리”(9쪽)에 묘한 호감을 느끼고 스스럼없이 접근한다.
법운은 지산에 대한 호기심을 못 이겨 그를 지켜보기 위해 벽운사에서 일부러 한 달 간 같이 지내고는 그와 함께 버스 대합실, 거리, 시골 정류장의 검문소 등까지 동행하며 여러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낸다. 나중에 대전에서 우유를 마시며 헤어지지만 나중에 벽운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그들은 일단 만나면 철저한 일숙주의자(一宿主義者)가 되어서 포교당과 시내의 조계사로 돌아다니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만행(萬行)하는 객승 신세인 둘은 지나는 곳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잠시 묵으려 하자, 교단에서 이미 땡초로 인정된 지산 때문에 객실사용을 금지 당한다. 그럴 때마다 법운은 동지로서 지산을 두둔한다.
법운은 지산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관념화된 신앙생활을 비판하며 의식의 변화를 꾀했기에 지산이 “그를 그렇게 못 견디게 하는 허무의 실체를 밝혀내고 허무의 실체를 뛰어넘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되기를,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답답하고 음습한 것들을 밝게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156쪽) 빌며 그가 승려로서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염원한다. 법운은 지산이 자신과 동행하는 동안에 음주, 흡연, 사창가 출입 등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힘든 묘한 끌심”(131쪽)을 느끼며 “자기의 말대로 진실하게 방황하고 진실하게 타락하고”(131쪽) 있는 것 같다고 줄곧 동조한다.
지산은 법운보다 선배라 그런지 법운과의 대화에서 우월감 있는 태도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서 자신이 겪은 신앙 체험으로 인한 회의와 반성 등 구도자로서 포부, 해탈, 견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도중 그는 그런 식으로 보편적 당위나 현실적 당위에 근거한 대화나 진술을 많이 한다.
법운은 지산과 한동안 접해 본 후에 자신과 지산을 비교하면서 “나 자신이 비열한 위선자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 없”(131쪽)다고 회의에 빠진다. 또한 “승려생활에 대한 회의와 인생에 대한 절망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49쪽) 그러나 법운의 이런 판단은 특별한 기준을 설정하지 않은 바에는 섣부른 비약이 될 수 있다. 적어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인식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산의 언행에서 쉽게 감화 받지는 않는다. 법운이 지산을 지지 후원하는 것은 특별한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감상 어린 호기심 차원일 수 있다. 그런 그는 훗날 지산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한 후에 정신적으로 지친 나머지 그와 인연을 끊을 것을 다짐한다.
법운의 성장과정과 입산의 동기를 밝히는 부분을 보면 사상 문제로 죽음을 당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받은 가족의 모습, 제도권 교육에 대한 회의 등처럼 심리적 억압과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입산을 권유한 지암 스님과의 대화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그에게는 무언가 상실감과 그리움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지산에게 쉽게 안식처인 양 동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성격과 사유 차원에서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애초부터 화합할 수 없었기에 진정하면서 영원한 타자(other)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3 번에 걸쳐서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다. 법운이 지산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것은 지산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작품 전반부에서는 불교의 질서를 뛰어넘으며 자조와 독설을 뱉으며 객승생활을 하는 지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자로서는 규칙대로 사는 법운보다는 땡초인 지산의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흥미를 지닌다.
법운은 지산의 괴이한 행동에 대해 때로는 반항을 하면서 연민을 느끼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내가 계율의 강 앞에 발이 묶여 협소한 소승의 세계를 살면서 위선자가 되고 있을 때, 그는 계율의 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광활한 무애의 대승 세계를 살고 있는 자유인인지도 모른다”(177쪽)하며 미화한다. 어느 때에는 “타락한 행위에 대한 비겁한 자기 합리화의 궤변을 농하지 마시오. 스님의 행위는 분명 파계이고 타락입니다.”(178쪽)라며 힐책한다.
(지산)“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길 포기하는 자에겐 이미 불경따윈 필요없는 거야. 그대는 그 대의 방법으로 살아가라고. 참선이 그대가 택한 방법이라면 철저하게 참선에 매진해서 끝 장을 내고. 잔 이리 내, 안 마시겠으면.”(131쪽)
(법운)“승려는 부처가 아니고 다만 부처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인간일 뿐이기에 당연히 욕망이 일어난다. 어쩌면 여자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젊은 승려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번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로 발심출가(發心出家)한 승려라면 그런 것쯤은 신심(信心) 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87쪽)
인용한 대사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수행 자세를 말해주는 예 중의 하나이다. 법운의 지산에 대한 양면적 행동은 오대산 암자의 토굴에서 둘이서 마지막 정진을 했을 때까지 이어진다. 지산의 입장에선 법운은 동조자이면서 적대자가 된다. 법운의 입장에서도 지산 역시 동조자이며 적대자이다. 법운은 그가 하는 불교 비판과 신앙 회의담를 들으며 “누구보다도 삶을 열망하고 있기에 끝없이 쏘아대는 각성의 화살”(167쪽)이라며 동조하고는 새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성한다. 지산은 법운의 그런 반응에 힘입어서인지 자신의 땡초 생활은 성스러움에 빠지기 위해 체험해 보는 순수한 일탈인 양 합리화한다.
지산의 일탈은 그 자체로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인간은 본성적으로 감정, 이성, 양심에 있어서 보편적인 바탕을 지니고 태어난다. 소설에 나타난 일탈·방황의 주체는 개별 인물이고 일탈·방황은 어디까지나 그 인물의 개성이다. 개성은 생활과 존재의 구체성이며 특수한 것이다. 인간의 개성은 개인의 존재 의의를 말해주지만, 원칙적으론 병적이고 폐쇄적인 것까지 포함되지 않는다. 개성은 보편의 세계에 편입되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인식․ 평가될 수 없다.
지산에게 병적이고 폐쇄적인 행동의 동기가 된 것은 불교라는 집단의식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론 두 가지 방법이 나온다. 지산처럼 세속의 질서(불교계의 계율을 포함)를 철저히 부정하고 은둔하는 삶이 그 첫 번째이고, 법운처럼 순응하며 사적인 영역을 충실히 지키며 타락한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지내는 삶이 그 다음이다. 그렇지만, ‘부정과 순응’에서 그 어떤 것을 택했든 간에 역설적으로 병든 사회의 질서를 강화해주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 사람은 세 번째로 만난 후에, 법운의 권유로 오대산 암자에서 마지막으로 같이 정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봉불식에 다녀온다. 그날로 지산이 술집 작부와 밤을 같이 보내는 것을 혐오스런 감정으로 목격하고서 홀로 암자에 돌아온 법운은 지산과의 인연을 끝맺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음날 눈길에서 동사한 지산을 발견한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그는 지산의 바랑에서 처음 잡기장을 발견하고 읽어보는데 그 내용이 작품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법운은 지산의 다비식을 치르고 나서 잡기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는다. 잡기란 말 그대로 평소에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기록이다. 지산의 잡기장 내용은 매우 관념적으로 서술되어서 자칫 지루함을 안겨준다. 작품에는 잡기장 내용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단편적인 불교 교리 내용이 자주 인용된다. 그것은 대부분 인물의 내면과 사건 암시를 위한 메타포로 보아야 할 것이 적지 않다. 잡기장 내용은 생전의 지산이 법운에게 늘 털어놓았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땡초 신세로 전락한 자신을 냉정하게 반성하면서 진지한 수행을 못했던 자신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감상적으로 탄식하지만, 이는 교묘한 자기 과시라고 할 수 있다. 뒷 부분에서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여자와 이층을 쌓았던 일, 토굴 속에서 묵언 수행하면서 동냥 온 어머니 또래의 노인을 만난 사연, 자신이 땡초가 된 계기의 주인공인 은죽사에서 만난 여대생을 꿈에서 알몸으로 생생하게 만났던 일 등이 나와 있다.
잡기장 내용은 그대로 실지 작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법운은 잡기장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 이것을 통해 작가는 법운으로 하여금 지산의 모든 사상과 융화를 이루게 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지산의 여자관계와 욕망의 문제를 살펴본다. 태초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원죄가 있었기에 인류 역사는 발전한 것이다. 종전의 민담이나 전설에서는, ‘~는 하지 마라’라는 약속이 모티브가 된 예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 즉 금기를 지키는 예는 거의 없었다. 지키지 않았기에 새로운 인식의 창이 열리고 사건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일수록 금기를 깨는 모험을 겪어야 감추어진 내면의 진실을 새롭게 인식하기 마련이다.
지산에게 땡초라는 멍에가 씌우도록 우연히 닥친 불운(은죽사에서 여대생과의 사건)은 그에게 결국 금기된 삶의 진실을 의식화할 수 있는 내면 싸움이 되었다. 개인적 해탈과 대승적 해탈 사이의 갈등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작품이 독자를 장악한 원인 중의 하나는, 세속과 이원화되어 있는 종교계에 이성(異性)문제라는 세속의 욕망이 깃들여 있어서이다. 금기 사항이란 시험대 앞에서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설정은 독자들에게 선정적인 자극을 준다.
지산은 작품에서 세 번에 걸쳐서 여자 관계를 체험한다. 작가는 그를 지켜보는 법운을 통해서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순수한 타락이요 자연스런 일탈행위라고 옹호하고 있지만, 필연을 가장한 무절제한 우연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며 독자에게 말초적인 유아적 흥미를 안겨주는 작위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굳이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의 인물의 행위에는 때로는 개연성이 무시될 수도 있으며 추상적 관념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교수행의 주체인 승려에게 음주 흡연 등의 잡기와 여자관계를 주요 모티브로 설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간 것은 작가의 남성적 편의주의 입장을 강조한 것이므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
병든 시대와 사회가 병든 개인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다. 현대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병폐가 심한 시대일수록 개인의 자의식을 존중해 주기보다는 개인에게 거대한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길 요구한다. 아웃사이더는 표면적으로는 불건전한 신경병 인물로 보이지만 병든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자신이 모두 병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병들어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적인 말로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즐긴다. ‘인간과 사회’, ‘육체와 정신’이란 정형화된 이분법을 거부하고 ‘존재와 무’라는 전제로 모든 것을 구별하려 들고 주어진 생활의 가치를 수긍하기 보다는 허무주의에 탐닉한다.4)
작품에서 지산은 인간 조건과 실존 사이의 부조리를 깨달은 인물로 그려진다.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수도를 하는 신분 계층은 한 인간이나 사회 동아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것의 허울과 모순을 발견한 후 그것과의 갈등을 겪으며 실천적반항을 하는 지산은 자신이 설정한 유토피아를 지니고 있다. 지산의 파멸은 자신의 범위에서만 끝냈지만 법운의 몫으로 또 다른 화두의 형태로 넘어온 것이다. 법운은 지산을 만나기 전에 관념뿐인 방황을 했었는데 그것에 커다란 자극을 가져다 준 사람은 지산이다.
3. 살아남은 자의 변화
법운은 지산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서 내적갈등을 거친 후에 지산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내적 변화를 이루고 있다.
지산이 승복을 입은 채로 일탈을 자행했던 것은 굴곡된 삶을 몸소 증언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보편타당성이란 작품 공간에서만 주장되는 것이다. 그의 일탈은 뚜렷한 사상은 있되 완성은 보이지 못하고 패자의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애초부처 자기 한에 못 이겨 자조와 탄식을 일삼은 것이기에 완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법운을 통해 기억이 되면서 끝없는 고뇌를 낳을 뿐이다.
법운은 지산이 죽고 난 후 세 사람을 만난다. 자신에게 평생 풀리지 않은 ‘병속의 새’라는 화두를 제시하며 도반생활을 권했던 지암스님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그리고 수행 중 잠시 알게 된 보리라는 여자이다.
법운이 절에서 수행 중 알게 되었던 여자는 보리 외에 옥순이와 영주가 있다. 법운은 서래사에 있을 때에 사하촌의 아이들에게 중학과정을 가르쳤었다. 그 때 가난해서 절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옥순이가 주지로부터 성매매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녀를 동정해서 절에서 떠나도록 주선을 한다. 영주는 법운이 무주사에 기거했을 때 거액을 시주한 서울 신도의 딸이다.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 감정을 품지만 억제한다. 그녀는 법운에게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의 아픔을 알아야 한다며 교과서 같은 관념적 언어에 속박된 불교 수행 자체와 교리 내용을 비난했었다. 법운은 그때 세속적 욕망은 저급하다면서 신심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답변한다. 며칠 후 그는 숲 속에서 그녀가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며 충격을 받는다. 나중에 학생법회에서 알게 된 보리는 한때 편지까지 주고받은 사이였고, 끝까지 법운의 탄식을 수용하며 그에게 연민을 보낸다.
지산에게는 슬픔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던 모성을 지닌 어머니와 타락과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자들이 있었다. 모성을 제외한 여성들은 지산에게는 파계의 계기가 되었고 법운에게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먼저 지암 스님을 찾아간다. 지암 스님에게선 “진저리쳐지는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아름다움도 청솔 위에 고고히 좌정한 학의 고고함도 보이지 않는다.”(248쪽)며 실망한다. 게다가 노사는 쓸쓸한 모습을 보이며 피로하게 “작금의 불교계가 세인의 지탄을 받게끔 타락한 것은 모두 선을 안 하기 때문이야. 자기 제도도 못한 주제에 남을 제도하겠다고 설쳐대는 때문이지.”(247쪽) 등의 근황을 비감어리게 들려준다. 그 무렵에 있었던 불교 종단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노사의 세속적인 모습을 발견하자 그는 감정의 혼란과 고독을 느끼며 이내 발길을 돌린다.
법운이 세 사람을 각각 만나는 것에서 그의 무의식 공간에서 억류되었던 억압된 사항이 드러난다. 법운은 어머니를 만나며 그녀를 용서함으로써 마음을 정리한다. 이런 점에서 지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운에게 모성은 출가의 계기가 되었고 슬픔과 상실감의 표상이었다. 법운과 지산이 간직한 모성의 공통점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법운은 “세간의 공부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라면 출세간의 공부는 그 알음알이를 놓아버리는 데서부터 떠나야 하는 거지. 대장부 이 세상에서 한번 해볼 만한 사업이라면 중 노릇밖에 없느니”(26쪽)라는 말을 새기며 출가를 했지만, 절에서 “하늘을 향해 춤추던 네 개의 다리. 온달처럼 둥그러우면서 하얗던 그 커다란 엉덩이”(90쪽)를 목격하곤 인생의 추악한 실상을 목격한 역겨움에 자신의 의지와 역행하는 본능과의 싸움 때문에 번민하게 되었고, “놀이 지는 시간이면 산문에 기대 서서 산사로 이어진 산길에 망망연한 눈길을 던진 채 누구를 기다리는 버릇”(160쪽)을 지니기도 한다.
종교는 절대적 이념을 지니고 있기에 거기에는 철학적 사유가 정지되어 있다. 교육적 면에선 자아를 객관화하고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게 해 주는 등 실존의 변화를 유도한다. 구도소설이라고 해서 내용과 주제에서 억압과 규율 체제에 대한 갈등이 없이 종교의 숭고한 이념 전달로 일관한다면 이미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때로는 패자의 미학이며 타락한 세상을 타락한 방법으로 드러낸다. 구도소설에서는 일탈·방황하는 인물들이 종교적 행위를 통한 구도에 이르기 앞서 실존의 변화 이전의 가혹한 통과의례를 보여준다.
작품에서 법운은 지암 스님을 만난 후에 곧이어 보리를 만난다. 그는 승려로서 처음 술을 마시며 생전의 지산처럼 방황의 길에 빠져들려 한다.
(보리)“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내가 우리가 되는게 아닐까. 예수와 부처가 부르 짖는 사랑과 자비란 것도 결국 이런 게 아닐까. 나를 뛰어넘어 우리가 되는 것. 하지만 이 것은 깨달음이 아니야.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라는 것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야. 실행 이야. 입으로 백년을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백 년 동안 불상 앞에 절을 해서 무릎이 닳아 없어진다 해도 단 일초 동안의 실행보다 못해.”
(보리)“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법운)“사실은 나도 몰라. 뭐가 뭔지 나도 몰라. 그래서 괴로워. 그래서 이렇게 술을 마시 고 밤거리를 헤매는 거야.”(269쪽)
보리는 법운의 뒷모습이 슬퍼 보인다며 여관까지 따라오지만 법운은 그녀를 설득해서 반강제로 돌려보낸다. 보리에게 지산이 생전에 조각했던 나무생불을 선물하는 것으로서 그는 비로소 그녀에 대한 집착에서 스스로 해방된다. 그는 여관을 나와서 역으로 가서 피안 행 기차표를 산다. 원본(1978년)에는 사창가로 가서 여자와 이층을 쌓은 후, 피안 행 기차표를 찢어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개정본(2001)에서는 “입선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모미생지전에 시심마오? 나는 정거장 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는 장면으로서 환속을 거부하고 입산 수행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태어날 때에 자신의 의지하곤 무관하게 태어나더라도(被投된 존재) 미지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 자신을 던지며(企投하는 존재)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무리에서 다소 비약이 있지만 소설 공간을 떠난 후에 대립에서 화해로, 좌절에서 구원으로, 욕망에서 해탈로 이어짐을 상상할 수 있다. 욕망이란 억제될 수만 있지 제거될 수는 없다.
법운이 ‘병속의 새’를 각인하는 장면이 작품 내내 13 번에 걸쳐서 나온다. ‘병 속의 새’는 인간이 처하는 실존적 억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날아야 할 새가 날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자기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열반에 든 지산과 현재까지 방황하는 법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법운은 지산과의 만남을 통해 변증법적인 인식과 발전을 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 다른 매너리즘이 될 수 있다.
작품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꿈과 같은 환상적 장면을 에피소드처럼 삽입해서 인물의 무의식적 억압과 방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의 한 예로 지산의 잡기장 내용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산은 석굴에서 정진하던 중 어느 날 몇 년 전에 열반에 드신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환영을 겪는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세계의 숨겨진 이면과 피안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환상의 세계는 곧 현실의 세계이다.5)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의 비밀을 바랑에 담아 지고”(7쪽) 방황을 하던 법운에게 ‘병속의 새’는 화두였는데, 지산의 다비식에서 “언제나 날 줄 모르고 한 군데 못박힌 듯 앉아서 끄윽끄윽 음산하고도 절망적인 울음을 울던 ‘병속의 새’”(239쪽)가 연기를 틈타서 날아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에게 끊임없이 추구의 대상으로 남는 환영이었고 끝까지 구도의 길을 가게 하는 원천이 된다.
4. 지식인으로서 고민하는 방법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종교를 소재로 한 소설의 작가의식은 종교적 희열과 성취감을 탈피하자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종교가 지니는 교리를 작중인물을 통해 전달하는 것보다는 개별적 인물의 종교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통해서 낙원의식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기에 일회성을 띤 삶의 의미는 더욱 절실하게 의문을 던진다. 무에서 창조된 뼈와 살의 현실적인 질량과 그 위에 얹히는 영혼의 무게는 다시 무로 되돌아가야 한다. 불교는 무에서 유로, 죽음에서 삶으로 윤회하는 ‘나’라는 존재를 찾는 것이다. 무가 바로 유이며, 죽음과 삶이 하나임을 깨닫는 색즉시공의 경지에서, 인간은 해탈에 이르며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운은 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데 그것은 늘 변증법으로 나타난다.
가지마다 잔뜩 눈을 얹고 서 있는 동백나무에는 피처럼 붉은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온 산 을 덮고 있는 백설과 백설 속에 각혈처럼 피어 있는 붉은 꽃……. 천 년의 침묵이 하 답답 해 터져나온 생채기인가. 팔만사천 번뇌가 쌓여 보리(菩提)가 되었는가. 반야(般若)가 되었 는가. 그렇다면 백설이 곧 동백꽃이요 동백꽃이 또한 곧 백설인가. 백설은 백설이요 동백 꽃은 동백꽃인가. 천지가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한 필의 말이어늘, 백설은 무엇이고 동백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보는 것이 있는 봄[有見見]이라고 하겠는가? 보는 것이 없 는 봄[無見見]이라고 하겠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봄[亦有亦無見]이라고 하겠는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봄[非有非無見]이라고 하겠는가? 아아, 말도 없고 들음도 없는 도리는 무엇인가?(121~122쪽)
인용부분은 법운이 벽운사에서 지산과 우연히 만나기 전에 겨울 한철 정진을 하는 중 깨닫는 내용이다. 노선사의 양구(良久:선종에서 법의 경계를 보이기 위해 쓰는 침묵)가 있은 후 도우인 수관하고 대화하기 전 나오는 장면이다. 이런 식의 탄식과 독백은 지산에게도 많이 나오며 수행자의 화두로 이어진다.
지산의 고민은 법운과의 대화와 그가 남긴 잡기장에 나와 있다. 작품에서 그는 나름대로 통찰력과 비판력을 지녔다는 점에선 지식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단지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정성이 중요하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만 따라서는 안 된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행동을 실천하거나 그 이론을 확립하지 못하면 지식과 삶이 겉도는 식민지적 상태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계몽과 훈계, 양심, 진보적 의식만으로는 버틸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어서 자신의 의사를 투쟁이란 과격한 방법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러면 지산의 고민을 작품의 시대 배경인 1980년대에 대입해 본다. 산업화의 문제, 소비사회의 욕망과 풍요를 말해주는 도회지 풍속을 비롯한 여러 사회 문제가 있었다. 1980년대는 군사정권과 민주화항쟁이 있었던 시대로서 지적 이념적 활기는 분명 시대적 제약이 있었으나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분단을 강화하는 체제를 비호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적극적 현실도전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그 대표적 방법은 출판물이었다. 1980년대가 거시적인 사회적 목표를 집단적 실천을 통해 달성해 나아갔다면 1990년대는 미시적인 사회목표를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 대안을 통해 달성해갔다. 작품에서 지산의 비판의식과 정체성 확립은 이런 맥락에서 추구할 수 있다. 지산이 당대 한국불교를 비판한 내용에는 도회지 감수성에 의탁한 민중문학적 요소가 있다.
“모두들 서울, 서울로만 몰리고 있어. 산사에서 도시로, 운둔에서 참여로, 전근대에서 근대 로, 근대에서 현대로, 관념에서 현실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염주처럼 목에 두르고 말이지. 아마 전국 승려의 반수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을 걸. 큰 절에 작은 절에, 보살 절에 무당 절에, 토굴이라는 이름에 사제 사찰 또는 호화주택에, 아파트에, 맨션에, 빌라에, 오피스텔 에, 원룸에…….”(76~77쪽)
“돈푼이나 있는 신도들이 절에 오면 중놈들은 갖은 아양을 다 떨며 기생처럼 내시처럼 그 들을 받들어 모시지. 그 여자들의 핸드백을 받아들고 일주문밖까지 전송하고…….”(81쪽)
“종교를 팔아 장사하는 모든 자들이 제일 먼저 부르짖는 게 뭔지 아나? 반공이야. 그리고 유신이고 총화지. 무슨 조치가 내려지면 제일 먼저 지지성명 내고, 무슨 궐기대회 같은 게 열리면 제일 먼저 커다란 프랑카드 만들어가지고 달려간다고.”(101쪽)
“……승려 사회보다 세속 사회에 더 많이 이름이 알려진 대종사(大宗師)의 유해에서 수습 했다는 사리를 친견한 적이 있다. 사리는 투명한 유리 상자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중략)
인간들은 쓸데없이 죽은 자에게 자꾸 넘치는 속내와 값어치를 나눠줌으로써 자기들의 피 할 길 없는 죽음에 대해 어떤 뒷받침과 다짐을 받아두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가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닐 터였다. 부당하게 가난하고 부당하게 병 들고 부당하게 고통 받는 중생 몇 백 명 아니 몇 천 명을 살려낼 수 있는 막대한 돈머리로 탑을 세워 타다 남은 뼈의 찌꺼기를 사리라는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을 그 대종사께서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188쪽)
인용의 앞 부분들은 모두 지산이 법운과 함께 다니던 중에 하는 말이다. 마지막 인용은 지산과 법운이 오대산 암자에서 정진하던 중 마을 아낙의 요청으로 요란하게 불상의 점안식을 치를 때 법운이 문득 떠올리는 내용이다.
지산이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배세력을 향해 주장하는 장면을 살펴본다. 어느 날 법운이 지산과 헤어진 후 방황하는 새처럼 표표히 떠돌다 벽운사에서 지산을 만난 후에 그에게 벌어진 일이다.
이튿날 지산은 주지와 대판으로 싸움을 했다. (중략)
“밤낮 자빠져서 술이나 처먹고 예불 한 번 안 모시는 너 같은 놈이 중이냐! 너 같은 땡초 때문에 불공이 안 들어온다구! 이 불법 망치려고 원력 세우고 입산한 마구니 새끼야! 당장 나가, 당장 나가라구!”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고, 지산은
“형식적으로 예불이나 착실히 모시고 뜻도 모르면서 염불이나 잘 외우는 게 중입니까? 참 말 어떤 것이 중이고 중의 본분인지 따져볼까요?그리고 나 때문에 망할 불법이라면 그런 불법은 백 번 망해도 좋습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부처님을 사랑하고자 발광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위선과 자기 기만의 장삼 속에서 부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오 라고 해서 들어온 절집이었던가요? 스스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 전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154쪽)
지산과 주지의 원색적인 표현을 담은 다툼이다. 지산은 다툼을 끝낸 즉시 바랑을 챙기고 “모든 것의 끝으로 가고 싶다. 고독의 끝, 번뇌의 끝, 분노의 끝, 허무의 끝, 방황의 끝, 슬픔의 끝, 절망의 끝”으로 간다며 “중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섬으로” 떠난다고 한다. 이후 법운은 나중에 절에서 또 다시 마지막으로 우연한 만난다.
심화된 자의식은 때로는 비일상적인 방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의식의 양상이 본래 내면적 자기 집중의 틀 안에서 자아에 대한 자각적 의식을 한다 해도 외부적 상황과 유기적 관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런 자의식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을 지니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를 ‘나’이게 하는 외부의 부당한 강압, 고통, 내부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 불안, 절망 등을 극복하면서 당연성을 띤 ‘나’이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어떤 집단에 비리나 부조리 또는 모순이 있다면 그것을 밝히고 도려내어 정화시켜야 할 게 아니냐. 최소한 그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느냐. 그것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냐고. 그렇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는 곧 세계이며 우주이고, 나의 인식은 따라서 우주 인식이 된다. 아아 나의 비밀, 나의 비밀이 풀렸을 때 저 광대무변한 우주의 비밀도 풀린다.”(105쪽)
이 부분은 법운이 한때 지산과 헤어지고 난후 홀로 객승 생활을 할 때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다.
5. 나오는 말
이상으로 작품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일탈과 방황을 거쳐서 자아각성에 이르는 참된 구도를 지향했는지를 그들의 욕망, 상처, 성찰방법, 현실비판 의식 등과 함께 살펴보았다. 작품에서는 인물의 고뇌와 구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메타포와 사건, 대화, 서술 등이 많아서 이 글에서 이 작품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사회 이후 소설에서는 영웅보다는 평범한 개인의 변별적 개성과 사회적 자각을 주로 표현했었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의 의식 중 좌절, 갈등, 그리움, 정체성 추구, 사회비판 등을 불교 교리와 연관을 지으면서 전개시켰다. 주인공이 내․ 외적 갈등 끝에 융화를 꾀하며 자기 정체성 추구로 나아간 것은 지식인의 자의식을 주 모티브로 삼은 당대 소설의 한 추세이다. 작품에선 단지 변별적 개성의 소유자인 지산을 그 주체로 삼았던 것이고 그 점이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관념으로 치장된 종교의 신성함에 대해 일탈·방황으로 대응하며 인물의 구체적 행동과 사건을 통해서 그 세속성을 노출한 것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신앙과 예술은 그 차체로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상반되어 있다. 종교의 관념화된 내용을 문학적 표현의 박진감과 경험에 대한 상상적 충실성으로 재창조되어야 비로소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신과 인간과의 갈등은 전후문학부터 새로운 모랄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소재로 등장했었다. 종교와 문학은 모두 메타포를 담은 언어를 매개로 하기에 문학의 사상적 배경의 기초가 되었고 문학은 종교의 표현 방법이 되어 왔다. 작품에서는 불교가 인간 실존의 문제와 상관되어 있다는 것을 인물들의 방황과 깨달음을 통해 보여주었다.
각주 해설:
1) 만다라(曼陀羅, mandala): 산스크리트어로 ‘본질, 정수(精髓)를 얻다’라는 뜻이다. ‘윤원구족’(輪圓具足:낱낱 살이 속바퀴로 모여 둥근 수레바퀴를 이룸)으로 번역되며, 모든 법을 죄다 원만하게 갖추어 결함이 없다는 뜻.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만다라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 부분적으로 있다.
불화 ‘만다라’: 일체제법(一切諸法)의 본질을 원만하게 성취한 부처와 그것을 추구하는 보살과 그들의 무수한 권속(眷屬)들이 모인 장엄도량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가 증험(證驗)한 깨달음의 경지를 완성된 형태로 화려한 색깔로 도해(圖解)한 것이다. 물질과 정신, 인과(因果), 색공(色空)의 세계가 만나 화합하는 지점을 표상하며 단순한 불화보다는 마음자리를 나타낸다. 숱한 번민과 갈등과 고통의 빛깔이 덧입혀진 상징이다.
2) 어떠한 일상적․항시적 상태를 벗어나는 현상. 또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범이나 제도에서 어긋난 행동이나 사고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근대 이후 사회 변동기에 나타나는 개인의 ‘사회화’의 실패의 한 양상으로서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현대인의 삶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다.
사회학에서는 공동체가 관용할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을 가리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욕구불만이나 공격성향을 가리킨다. 일탈은 개인에 대한 사회 규제적인 성격이 있다. 근대사회에서 도덕적 혼란, 자아정체성의 혼란, 아노미(anomie:무규율상태) 형상이 발생할 때 일탈은 위기감의 외적 표출이 된다.
(강상대, 「우리 소설의 일탈과 지향」,청동거울,58~63쪽에서 정리)
3)방민호, ‘개작에 담긴 뜻’, 「만다라」, 깊은강, 2001년, 293쪽
4)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이성규 번역, 범우사,1974년. 26쪽에서 정리
5)황수남, ‘<만다라>소설에 나타난 바람과 여성의 다원성’, 『비평문학』21호, 한국비평문학회, 2005. 3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