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텔간돌포, 2000년 3월 9일
끼아라 루체처럼
지역을 방문중인 총본부 포콜라리노들과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각 사업들이 피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여러 시련들을 우리 운동도 접하지
만 최근에 우리 운동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특별히 기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이태리, 리구리아의 2젠인 ‘끼아라 루체 바다노’의 시복 절차가 진전되
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젠은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고 있으며, 해당 교구 내에서
의 첫 심사를 끝낸 후 로마 교황청에 관련 자료를 보낸 상태입니다.
‘끼아라 루체.’ 우리의 젠 ‘끼아라 루체’에게서 얼마나 많은 빛을 보게 되는지요! 특별히
그녀의 생애의 마지막 기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뿜어 나오는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남긴 말과 편지에서, 그리고 일생 동안 실천한 모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사랑 안에서 참으로 많은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태리의 ‘치타 누오바’ 잡지사와 전 세계에 있는 33개 잡지사에서도 이 젠에 대해 말하
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기사들을 통해서 그녀를 알고, 그녀의 삶에서 양분을 취하
며, 그녀를 우리 운동의 젊은이와 다른 모든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끼
아라 루체’는 비록 18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상 안에서 성숙한 삶을 살았고 모든 젊
은 이와 어른들에게 이를 증거해 보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 젠의 짧은 생애의 아름다움과 위대함과 성덕에 대해서 미리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우리 잡지나 곧 발간될 그녀의 일생에 관한 책을 통해서 그 젠에 대
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젠에 대해서 한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온통 이상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확신 안에서 한 가지 교훈이 되고 자극이 되는 것
을 끌어내고자 합니다.
우리의 합동전화는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이 점
에서 ‘끼아라 루체’는 우리의 선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들 중 한 편지에서 자기 결심을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성령께서 하신 일이 아니었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그녀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단지 그분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고 싶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분을 도구로 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버림받으신 예수님,그분을 위해서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그 성스러운 연금술 때문이 아닙니다.
‘끼아라 루체’는 특히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는 이 고통들이 귀중한 진주임을 알았고 하루 종일 이 고통들을 반기며 살았습니다. 그
녀는 특별히 강인함과 참을성과 인내와 항구함 등을 실천하는데 따르는 고통 속에서 더
사랑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것들은 시련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실천해야 할 덕들입니다.
그녀는 계속되는 육체의 고통들을 ‘놀라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그 고통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고 참으로“버림받으신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정배”로서 그분을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끼아라 루체’는 그분과 함께 살았고, 그분과 함께 자신의 고난을 ‘혼인의 노래’
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스러운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날 때,이 땅에 남아 있
는 육체에 웨딩 드레스를 입혀주기를 바라면서 세밀한 것까지 부탁했었는데, 저 세상에
서 자신의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행복해 할 것” 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참으로 행복하므로 부모님도 행복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근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아프
게 하는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들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영혼이 어두운
굴속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한층 더 가까이 느끼는 그 젠을 생각하면서 제가’49년도에
쓴 잘 알려진 묵상을 기억했습니다. 그 묵상의 제목은 “내게는 땅위에 단 한 분의 정배
가 있으니”라는 것입니다. 그 묵상은 이런 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것이
다. 나의 것은 이 순간 나를 스치는 고통이며, 나의 것은 옆의 영혼들의 고통이다...”
우리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저 세상으로 떠나는 문턱에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
다. 지금부터 이 구절의 가치를 깨닫고 이 말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삶의 역동적인 면에
매료되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머지 않아 ‘끼아라 루체’ 를 작은 성녀라고 혹은 우리 젊은 이들이 부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실현된 젠’ 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 합
동전화를 통해, 우리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있어 이 구절이 ‘우
리의 발길을 밝혀주는 빛’이 되도록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실천하고 있는 “버림받으신
예수님, 당신께서 저의 유일한 행복이십니다.”라는 말의 새로운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말만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적어도 며칠 동안이라도 하
루에 몇 번이나 이를 실천에 옮기는지 헤아려 보도록 합시다.
이 방법은 효과적이며 우리를 많이 도와줄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나의 신체적, 도덕적, 영신적 한계 안에서, 내 이웃 안에서, 그들이 당하는
온갖 형태의 고통 안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것이다”를 사는 것입니다.이렇
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각자의 성덕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성화에도
가장 좋은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끼아라 루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더욱 더 나
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이렇게 살기 시작합시다.
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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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하루 보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아주 좋앗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