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7. 금요일
前국정홍보처장 김창호
몇일 전, 김형오 전 국회의장께서 바른말 하셨군요. MB정부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했군요. “잘못된 것은 모두 대통령에게 책임을 덮어씌운다면 이것이야말로 레임덕”이라고 말했다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MB정권을 위해 거침없이 총대를 맺던 김형오 전 의장 입장에서야 당연히 할 소리를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국회의장 시절 김 의장께서는 MB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2009년 7월, 김형오 전 의장님께서는 지금 조중동 종편의 법적 근거가 되는 미디어법과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제한을 완화한 금융지주회사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김형오 전 의장께서 또 예산안과 '추미애 중재안'으로 불리는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또다시 날치기로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예산안과 노동관계법 처리를 독려하는 장시간의 통화를 했습니다. 이때, 김 전의장님께서는 놀랍게도 이명박 대통령께 '형님'이라고 호칭해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아마 이런 사건들은 헌정사에 중요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무기력한 민주당은 대표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시늉을 하거나 김 전의장을 윤리위에 제소하는 '쇼'로 넘어갔습니다.
국정홍보처 공무원들, MB에 충성할 수 있나?
그러나 김 전의장께서 하신 말씀이 오히려 그가 모시는 주군 MB에게 칼을 꽂는 모양새로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가 레임덕 운운하는 것조차 레임덕이 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필자는 김형오 전 의장의 레임덕 운운 발언에 대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 용어 자체가 이미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징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200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당선되자 인수위가 구성될 때 그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당시 김형오 전 국회의장께서는 인수위 부위원장을 맞았고, 이동관 현 대통령 특보는 인수위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점령군으로 거리낌없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당시 국정홍보처를 없애려 했고, 국정홍보처 직원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부처를 없애버리고 타부서로 흡수통합될 경우 그 부서에 가서 찬법신세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기관장이었던 저는 이들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필자는 국정홍보처 공무원들에게 인수위에 최대한 협조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새 정부에서 살아남아야 할 공무원들을 저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모든 책임을 필자에게 떠넘겨도 좋다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국정홍보처 인수위 업무보고는 인수위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실장, 국장급 간부들이 참석한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당시 김형오 부위원장과 이동관 대변인이 집중적으로 물었던 것은 "참여정부에 충성한 만큼 MB정부에 충성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러분들의 솔직한 생각을 듣기 위해 비공개로 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일체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테니 속마음을 얘기해달라"고 했습니다. 홍보처 간부들은 이런 천박한 질문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가장 직급이 높은 직원이 막스 베버의 '직업윤리' 개념을 빌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무원은 특정정파의 이익이나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결정한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공무원들의 직업윤리이며, 그래서 막스 베버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뒤통수 친 김 전의장
이 말을 순발력있게 낙아챈 것이 역시 기자 출신들인 김형오 부위원장과 이동관 대변인이었습니다. 이동관 대변인은 그날 오후 브리핑 룸에서 ‘영혼없는 공무원’을 강조하며 공무원들의 비겁하고 굴종적 모습만 부각시켰습니다. '영혼없는 공무원'이라는 자조적 용어가 언론과 공무원 사회에 회자되기도 했었죠.
그렇게 공무원들에게 '충성할 수 있느냐'고 다그치고 '영혼없는 공무원'으로 모멸감을 줬던 김 전 의장의 입에서 레임덕이라는 말을 듣게 되니 심정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것도 국정홍보처를 폐지해 수 십명의 직원들이 직장을 잃게 됐던 경험을 한 필자로서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국무회의가 열리지 못할 뻔 했습니다. MB가 해외순방을 위해 출국한 날, 마침 국무회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국무회의는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아 지연됐습니다. 지금 MB정부의 데림덕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MB는 아무 말없이 보고만 받았다고 합니다. MB의 속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장관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온갖 충성은 다할 것 같아 임명했던 장관들이 대통령 외유를 틈타 모두 국무회의를 태업해버렸으니 말입니다.
이 사태를 MB도 심각하게 인식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죠.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를 심각하게 느꼈다면 사표를 내도 마땅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일 없었듯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면피해버린 것입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질타를 받아도 싸다 싶습니다.
감사원의 감사, 공무원만 때려잡자?
대신 애궂게 빼든 칼이 감사원 감사입니다. 누군가 레임덕을 걱정해 감사원을 써먹자고 했던 모양입니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이번에는 감사원이 나섰습니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레임덕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레임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공무원들은 "왜 애궂은 우리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부산저축은행 비리는 이미 오래 전 감사를 통해 확인됐고, MB도 1년 전에 알고 있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이런 MB정부의 부도덕과 무능력은 못 본 척하고, 공무원들만 잡는다고 하면 그들이 동의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레임덕이 시작돼 고위공무원들이 야권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공무원들이 무사안일했던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첫째, MB정부가 공무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새 정권이 공무원들을 두들겨 패면 속은 시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스폰지에 주먹질하듯, 그 결과는 본래 의도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MB정부 정책에 도통 정당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영혼없는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공무원은 시대정신과 공공성에 부합하는 일을 갈망합니다. 모든 공무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자기 살 궁리만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이들도 자신들의 일과 존재이유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정당성없는 정부, 공무원 노릇 힘들다. MB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 정당성을 결여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4대강은 물론, 복지 축소와 부자감세 등과 같은 MB정부의 정책에 대해 공무원들도 불만인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무원에게 현상유지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특히 중앙공무원들은 나름의 역사의식과 소명의식을 갖고, 이에 부합하는 일을 할 때 신명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공무원이라 하지만, 정당성없는 일을 하는 것은 죽을 맛입니다. 당연히 레임덕이 빨리 와서 지금의 일에서 손떼기만을 바랄 겁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런 공무원들의 심사를 알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현재 장관들이 파악하고 있을까요.
제가 보건데, 이미 각 부처 장관들은 공무원들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MB가 ‘작은 정부’ 신화에 사로잡혀 대부처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MB정부의 대(大)부처방침에 따라 1개 부처에 약 1000 여명의 공무원이 근무합니다. 이런 조직은 장차관의 통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숨을 공간은 널려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보면 장관 숫자를 줄여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당성을 결여한 정권과 정책, 더군다나 대부처 조직에 숨은 공무원들을 다그쳐 레임덕을 피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딴다리 긁기'일 뿐입니다.
아무리 감사원, 검찰 등 사정기관을 다 동원한다고 한들 공무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껏 일해봤자 다치기 십상이고, 대충 눈치보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뭐하러 앞장서겠습니까. 이미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대놓고 반기를 들고 나선 상황입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모든 일을 사람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추어적입니다. MB정부의 결정적 실책은 바로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참여정부를 '위원회 공화국'이라며 공격했던 만큼 위원회를 없앤 것까진 좋았으나, 그 결과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장관들의 태업으로 국무회의가 연기되었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경우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청와대는 물론 총리를 비롯한 부총리들이 책임 영역이 시스템으로 짜여 있어 대통령이 부재하더라도 모든 일은 아무런 영향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온라인 보고 시스템 '이지원'은 대통령 중심의 업무체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 장관들의 태업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MB가 정부를 개혁한다는 미명아래 이같은 시스템을 망가트렸습니다. MB정부가 없앤 부처, 즉 홍보처, 예산처, NSC 등은 부처간 협력이 중요업무였습니다. MB가 인수위 시절 없애려 했거나, 없앴던 과기부, 정통부, 여성부, 통일부 등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발전전략과 맞물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부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부서 외에 우리 사회 미래 비전을 담당할 여러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참여정부가 막판까지 레임덕없이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짜임새있는 시스템의 덕택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사람이 아닌 제도를 믿었고, 그 제도를 공고화하는 것을 통해 역사가 진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수의 천재나 영웅이 아니라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를 공고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 신공항 건설, 과학단지 선정, LH 일괄 이전 등 국책사업 선정과 관련해 사사건건 지역갈등을 부추기게 된 것도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절차와 합리적 선택보다 정치적 술수와 꼼수에 의존한 결정은 필연적으로 화(禍)를 부릅니다.
과거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국민의 저항을 혹독하게 경험한 것도 시스템이 아니라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의 속삭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혹독한 경험을 하고도, 여전히 MB는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MB가 어떻게 무사히 물러나느냐입니다. 비록 MB는 싫지만, 우리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MB가 조용히 퇴로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새로운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유능한 장수는 퇴각하면서 리더쉽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기대하긴 글렀지만 말입니다.
前국정홍보처장 김창호 (http://truthpower.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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